루호 - 제26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 대상작(고학년) 창비아동문고 323
채은하 지음, 오승민 그림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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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 온다~

범 내려 온다~

정림깊은 골로 대한 짐승이 내려온다.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한 발이 넘고, 누에머리 흔들며, 전동같은 앞다리, 동아같은 뒷발로 양 귀 찌어지고, 쇠낫 같은 발톱으로 잔디뿌리 왕모래를 촤르르르르 흩치며, 주홍 입 쩍 벌리고 ‘워러렁’허는 소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툭 꺼지난 듯, 자래 정신없이 목을 움추리고 가만이 엎어졌다. – 이날치의 노래 <범 내려온다> 중에서

 

판소리 수중가의 대목이자 가수 이날치의 노래 <범 내려온다>가 떠올랐다.

레트로의 귀한, 고전을 현대적인 재해석한 <범 내려온다>의 뮤직비디오.

현대판 호랑이는 <범 내려온다>의 뮤직비디오 속 무용소들의 모습이 아닐까? 어쩌면 늘 곁에 있는, 깊은 숲 속이 아닌 우리의 생활 속 스쳐간 사람들 중 하나, 나의 이웃이거나 친구일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했다.

 

어린이책 <루호>는 그런 상상을 더 입체적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동네의 쓰러갈 듯한 한옥집 ‘고드레 하숙’. 구봉이 삼촌과 루호, 달수와 희설이 살고 있다.

주인공 루호는 초록가득한 식판을 보며 ‘고기’타령을 하는 초등학생 여자아이…이다. 특이한 아이, 사실 사람모습을 한 호랑이이다. 어느날, 마을로 강태 아저씨와 지아 남매가 이사가 오면서 평화롭던 동물사람들의 일상에 변화가 생긴다.

 

<루호>의 세계관은 판타지이지만, 우리의 세계와 닮아 있다.

어린이들이 있고, 어른들이 있다.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살아간다. 어른들은 지켜주는 이, 성장을 도와주는 이도 있지만, 위협이 되는 이도 존재한다. 어린이들은 자신 스스로의 모습과 자신이 원하는 모습 사이에서 늘 고민과 갈등을 한다. 어른들 역시 삶의 이유와 무게중심에 따라 행동을 한다. 독자인 내게는 보이는, 하지만 책 속의 주인공들에게는 보이지 않아 방황하며, 곤경에 처하며 다시 일어나는 중요한 요소들이 있었다.

 

선택과 행동

 

그들은 스스로 선택 했어. 용기를 내어 어떻게 살지 결정 한거야.

우리 자신을 만드는 건 바로 그런 선택들이야. 오랜 시간을 살아온 나도,

호랑이이자 사람인 너도 그렇지. 우리는 언제든 우리의 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 p60

 

삶의 선택권이 누구에게 있을까? 바로 나.

우리는 모든 순간이 선택이다. 아침 시계종이 울리면 ‘눈을 뜰까?’ ‘조금만 더 잘까?’ 하는 갈등에서부터 말이다. 살아지는 데로 사는게 아니라, 살고 싶은 데로 살아가기 위해 빵 고르듯 선택을 하고 산다. 숲을 떠나고자 한,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하고자 한 루호의 조상 호랑이들도 선택을 한다.

 

용기가 필요해!

루호가 한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루호는 우리가 늘 선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은 반만 맞았다. 하고 싶은 게 생겼다고 다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선택을 해내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P159

 

모든 사람이 선택을 한다. 선택은 다양하다.

 

그러나 나의 질적인 삶, 내가 원하는 삶, 공동체적 삶에는 의식적인 선택이 우선 중요하다.

용기 있는 행동. 선택은 쉬울 수 있지만 행동은, 실천을 어렵다. 작심삼일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행동의 원동력 용기가 필요하다.  

 

갈등은 왜 생길까?

“우리가 왜 사람한테 쫓기는 신세가 된 것 같니? 우리가 훨씬 더 크고 힘도 센데,

왜 사라질 위기에 처했을까?” P155

 

호랑이들의 존재에 대한 질문은, 호랑이를 우리 그리고 나로 바뀌고 화살이 되어 나에게 날라왔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고 있는데,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누군가를 원망한다. 탓을 한다. 그것에 루호는 정면으로 마주하고 답을 찾는다.

믿음의 부재

“우리가 서로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야.” P155

 

“걔들, 사냥꾼의 아이야”, “그 아이는, 호랑이야”

호랑이는 인간을, 인간은 호랑이를 경계한다. 좋은 모습, 다정한 모습을 알고 있지만, 우려하는 주변인들의 이야기로 아이들도 어느새 상대를 의심한다. 스스로의 눈으로 목격한 모습마저 믿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의 확인하지 않는 사실, 일부의 의견이 편견과 고정관념이라는 못이 되어 박힌다. 단지 확률일 뿐이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 눈과 내 발로 확인하고 확인하고, 그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전하면 된 것이었는데. 믿는다는 것도 결국 용기가 필요하다.

 

신념대로 전념하는 삶

‘우리의 선택이 우리 자신을 만드는 거야.’ P181

“날 알아본 게 너라서 다행이야.”p189

 

세상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스스로 찾아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정원을 가꾸듯. 의미 있는 가치가 있는 환경을 만들거나 찾아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사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런 나를 알아봐주는 당신이 있는 곳. 때론 즐길 수 있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는 곳, 함께 놀 수 있는 곳, 루호가 찾을 세상이고 나와 아이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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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라도 공부만 할 수 있다면 - 전면개정
박철범 지음 / 다산에듀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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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라도 공부만 할 수 있다면#박철범
#다산에듀

자신감 있게,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
나답게 살아가기 위한 여러 갈래의 길 중 공부를 선택한 사람, 변호사 박철범의 이야기를 따라가 본 책.

어릴 적 저자의 집 앞은 공사장 이었다. 저자의 놀이터이기도 한 빈터.
반터에서 아이는 하루하루 다르게 변해가는 빈터를 지켜본다.

모래, 돌, 철사. 콘크리트, 유리 등의 다른 재료가 해쳐 모이며 거대한 식물원으로 변화하는 모습
그리고 식물원이 완성된 날 식물원의 맨 꼭대기, 전망대에서 내려본 풍경들을.

🔔바로 그때 나는 처음으로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저 넓은 바다처럼 흐르는 세계를 만나고고 싶다고. 흘러간 물결만이 수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것처럼 나도 얼굴 자라서 나의 미래를 만나고 싶었다. 미래를 상상하는 첫 순간이었다. p22

첫 느낌은 나도 부모님께 선물 받은 책이자 내 또래 아이들의 책 상 위에 놓였던 그 책 <공부가 제일 쉬었어요>가 떠올랐다. 읽을까 말까 솔직히 망설였다. 그 때의 난 읽고나서 부모님의 의도가 있는 책이구나 했다. 그리고 청개구리 마냥 ‘아, 하기 싫어 졌어’’라는 반발심이 있었기에. (엄마 아빠 죄송해요.) 나는 떨림이나 충격을 받지는 못했다. 책의 인상은 그저 방 한구석을 꽉 채운 태극기와 애국심에 대해 생각해 본 정도였다.

소년과 식물원과 바다와 미래 구절이 나에게는 이 책을 읽어볼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다.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과정을 숱하게 목격했던 나인데, 나는 휘청일 정도로 또는 가슴이 방망이질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기에. 그 부분이 겹쳐져서 책을 넘겼다. (나는 그 보다는 점 더 먼 훗날이었지만)

🔔“너는 방법을 몰라서 공부를 못하는게 아니라 단지 공부를 안 하고 있는 거잖아!“ p80

타고난 개인의 기질과 성향, 타고난 재능은 어쩔 수 없다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핑계를 대는 나에게 뼈 때리는 구절이었다. 평생 학습, 평생 독서라는 말을 이제는 너무나 좋아한 나는 저자의 ‘있는 것” 중 타고나지 않았지만 내가 만들어갈 수 있는 요소들,  
나답게 살 수 있는 방법론을 찾아 읽어갔다.

공부가 필요한 이유

 ✨️공부는 ‘지식을 얻는 행위’라는 점이다.

🔔우리는 지식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눈과 좀 더 나은 관점과 대안을 제시하는 힘을 얻게 된다. 그 능력을 통해 내 주위의 사람들을 도울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의 행복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나는 아직도 공부를 이어간다. 쉽게 말해 나는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려고 공부한다. 나에게 공부란 자유를 가져다주는 수단인 셈이다. P264

학창시절의 나와 지금 시절의 나에게 ‘공부’란 단어는 다르다.
공부란 나를 일깨워 줄 모닝콜이자, 평생을 함께 할 삶의 페이스 메이커다. 때론 어렵고 때론 거리를 두지만 뗄레야 뗼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공부는 나답게 살기 위한 나의 시나리오를 좀 더 풍부하고, 좀 더 싶게 만들어 줄 요소이다. 스스로 선택한 아름다운 감옥이기도 하고.

그런 공부를 기복을 타면서도 계속 해야겠다는 것을 느꼈다. 아이들 아닌 내가.

아이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들만의 공부거리를 찾아 할 거란 기대감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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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동물원 (양장) 알맹이 그림책 11
조엘 졸리베 지음, 최윤정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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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동물원
무려 400마리의 동물들이 있는 동물원
작고 작은 동물부터 아주 커다란 동물까지
세상에 모든 동물들이 모여 있는 동물원

동물원인데
똑똑하다는 형용사가 붙은 동물원에
아이들 손을 잡고 입장했습니다.

동물원의 원장님 이름을 보더니
두째가 얘기하네요.

"누가 형님이고, 누가 동생이에요?"

조엘 졸리베 라는 이름은
두 자매의 이름 지민 지수 처럼 느껴졌나봐요.

동물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눈을 크게 뜨고 가까이
카메라인양 눈에 이완과 수축을 하며
잘 살펴야 하는데 자매는 소란스럽습니다.

저에게 재밌게 읽어주길
원하는 어린이의 호소하는 눈빛을
던집니다.

원하면 해드리는게 인지상정! Feat.포켓몬

왼쪽에서 오른쪽
오른쪽에서 왼쪽
위에서 아래
아래에서 위
가운데서 가장자리

엄마 마음대로 동물들의 이름을
불러가니, 아이들은 카멜레온 외에도
숨은 동물 찾기 하느라 신이 났습니다.

(낭독의 방법은
일본판 포켓몬 엔딩송 버전으로 했지요.)

더운 곳에 사는 동물
깃털이 달린 동물
물에 사는 동물
밤에 활동하는 동물 등

동물들을 다양한 분류법으로
모이다 흩어졌다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신나게 눈으로 쫓고
입으로 발음해 보다가
머리를 굴려 자신만의 생각으로
동물들을 분류합니다.

꼬리가 긴 동물
강아지상인 동물
발이 짧은 동물
같이 놀고 싶은 동물
가끼이하면 위험한데 가깝고 싶은 동물 등등

페이지가 끝을 달리고
이제는 다 읽었다 하는 순간

책 제목이 왜 똑똑한 동물원인지
깨닫게 되는 페이지가 떡 하니 나타납니다.

우리가 몰랐던 동물들의 사생활들.
참 흥미롭고 신기한 사실들인데
깨알같은 글씨와 빽빽한 문장.. ..
다 읽었답니다.

이제 엄마는 동물박사!
가 되었으면 좋겠지요.

동물원에 가 있는 느낌
몰랐던 동물들의 새로운 모습을 알고
나만의 동물원을 종이 위, 탁자 위에 차릴 수 있는
동물원 <똑똑한 동물원> 이었습니다.

생상의 동물원사육제를 들으며
나만의 동물원을 필사하는 두찌.

너무 자세히 그려서
시간은 걸릴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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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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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가 걸려 넘어진 돌들로 지은 성입니다.”

 

기운 세고 요리를 잘하는 소녀, 튼튼하게 자라는 발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소녀, 꿈이 있고 꿈을 스스로 이룰 능력이 있는 소녀, 가부장제에 흡수되는 결혼이 아닌 공통분모를 가지고 동행할 수 있는 우정을 만든 소녀. [해방자 신데렐라]는 리베카 솔닛과 처음 만난 작품이다.

 

여성으로 태어나 공주로 살아가야 한다는, 누군가 머릿속에 심어 놓은 도청장치가

내 DNA 어딘가에 스며 있다가 브라운관에 비치는 드레스를 입은 여성 캐릭터를 바라보는 아이들에게 전달된 것은 아닌지 고민하던 시기에 만난 통쾌한 책이었다. 마치 내 어릴 적 서점 구석에서 만난 흑설공주가 그러했듯이.

 

두 딸들이 태어났을 때마다 느꼈던 양가적 감정. 기쁨과 슬픔.

개구리들처럼 공감할 줄 알고 공명할 줄 아는 여성이라 기뻤다. 한편으로는 여성이기에 맞딱드려야 하는 불편함과 두려움을 내 아이들도 통과의례처럼 겪어야 할 현실에 슬펐다.

그래서 리베카 솔닛의 다시 쓴 이 신데렐라 이야기가 좋았고, 좀 더 알고 싶었다.

 

솔닛이 이야기하는 어른과 집

어른이라는 말은 법적 성년에 도달한 사람들은 모두 단일한 범주에 속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변해가는 땅을 여행하면서 스스로 변해가는 여행자들이다. 그 길은 누더기 같고 신축적이다. (중략)

어릴 때 살던 집을 떠나서 당신만의 집을 꾸릴 때 당신은 거의 평생을 아이로 살아온 사람이다. (중략) 어떤 경우이든 이제 홀로 서게 된 사람은 어른들의 나라에 갓 들어온 이주자인 셈이고, 그에게는 이나라의 관습이 낯설다. 그는 자기 인생의 모든 측면을 스스로 전사하는 법을 배운다. 그 인생이 어떻게 풀릴지, 그 속에 다른 누가 들어올지, 자신이 가진 자결권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P25

나로 만든 집을 생각한다.

아이였던 상태가 길었던 나, 엄마와의 보이지 않는 탯줄이 끊긴 지 얼마 안 된 어른의 길을 걷고 있는 나. 얼마전 동네 언니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일찍 독립했던 언니의 작은집. 아침에 눈을 뜨고 방문을 열면 세상이 성큼, 세상의 사람들이 성큼 문틈으로 눈으로 들어왔던 그 풍경을 생각한다.

자기 선택권과 자기 결정권을 누구보다도 빨리 가졌을 언니가 부러웠다.

나는 이주자. 살아 내기 위해 알아야 하고, 알기 위해 걸어야 한다. 길을 모르기에 일단 길을 나서야 한다. 무섭기에 안전한 이불 안, 편안한 집 안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기 싶지 않다. 스스로 발견하고 만져보고 사유하고 갖고 와, 축적해 보고 싶다. 울기도 웃기도, 실수하기도 성공하기도 하면서. 그리고 걸었기에 함께 나눌 수 있고, 배울 수 있고, 내 지도의 범위 길의 갈래를 넓힐 사람과 공간과 자연을 만나고 있다. 연결도 단절도 스스로의 선택과 책임으로, 그리고 권리로 알아가고 있다.

 

솔닛이 이야기하는 전쟁 같은 삶

 

젊은 여자들에게서는 자신을 의심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태도를 흔히 볼 수 있다. 젊은 여자가 유난히 표적이 되기 쉬운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이라면 나는 다르게 행동할 것이다. 지나가는 차를 세울 테고, 차도로 뛰어들어갈 테고, 소리를 지를 테고, 남의 집 문을 두드릴 것이다. 위험에 대한 나 자신의 판단을 존중할 테고, 그 상황을 벗어나도록 해줄 법한 행동이라면 뭐든지 취할것이다. 하지만 그때 나는 어렸다. 우리는 젊은 여자라면 소란을 피우지 말아야 한다고 배웠고, 무엇이 괜찮은 상황인지는 남들이 결정하도록 두어야 한다고 배웠다. 심지어 무엇이 현실인지도 남들이 결정하도록 두어야 한다고 배웠다. P84

 

대화 중 딸들이 느끼는 세상에 대한 세계관을 느낄 때가 많다. 홀로 길을 걸을 때 자신들은 누군가에 의해 납치되거나 위험할 상황에 처할 수 있기에 아직 나와 떨어질 수 없다는 얘기를 가끔 한다. 여기서 항상 나는 갈등한다. 아이들의 독립성을 위한 배려로 스스로 해야 할 기회를 줄 것인가, 아이들의 안전성과 준비되는 시간에 관한 아이들의 개인차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할 것인가를.

솔닛과는 달리 젊은 여자의 시절을 지난 나는 그녀가 열거한 문장의 상황이 된다면, 얼어붙을 것이다. 하지만 안다. 의식적인 노력, 지나가는 차를 세우고 차도로 뛰어들어가고 소리를 지르고 남의 집 문을 두드릴 시뮬레이션을 해야 한다는 것을. 물론 가장 좋은 것은 그런 상황에 나와 내 아이들을 두지 않는 것이지만. 스스로 이상하다고 느끼면 벗어날 줄 아는 감(촉)과 행동력 이전에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갖는 습관도 가져야겠다는 것도.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말하는 것, 행하는 것.

 

솔닛이 말하는 독서

 

미녀를 쫓던 신들은

항상 나무에서 경주를 끝냈다. – 정원, 앤드루 마벌

신화 속 여자들은 줄곧 다른 것으로 변한다. 왜냐하면 여자로 존재하는 것은 너무 어렵고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프네는 아폴론을 피해 달아났다가 월계수로 변한다. P129

 

프로듀스 101의 남성 버전과 여성 버전의 화면, 가사, 대상을 보여주는 카메라 워크에서 불편함을 느꼈다. 나중에 책으로 확인한, PD의 이야기(그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남성들에게 건전한 야동을 만들어주고 싶었다.’)에 소름이 돋았다. 이를 알고 바라보는 것과 이를 모르고 바라보는 것은 다르다.

책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은 다양한 텍스트 속에서 유린당하는 여성을 제시한다. 충격을 받은 것은 신화 속에서 숨쉬듯 자연스럽게 서술되어 있고. 더 충격적인 것은 내 아이가 지금 그리스로마 신화를 너무나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아이의 무의식 속에 새겨질 여성이라는 스스로 사라지고, 희미해져야 하는 선입견, 삶의 루틴이 생길까 봐 두렵다. 나는 어떻게 아이와 이야기하면 좋을까?

 

그 시절 나는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읽는 잡식성이었다. 젊은이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럴 때가 많다. 자신이 어떤 기준을 갖고 있는지, 무엇이 자신에게 자양분이 되는지, 무엇이 자신의 의욕을 꺽는지를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다 차차 책의 숲에 난 오솔길을 따라가는 법을 익혔고, 지형지물과 계보도 익혔다. P132

 

사유의 방에 머물 수 있는 것은 책이라는 물성을 안고, 텍스트를 눈으로 손으로 마음으로 접하고, 머리로 생각한 다음, 입으로 내뱉었기 때문이리라. 남인 부모, 내가 아이에게 아니라고 말하기 보다는 아이와 따로 또 같이 읽는 시간과 경험을 늘리는 게 나을 것 같다. 목소리를 내기 전까지 목소리에 실을 수 있는 자기 기준, 자기 이야기, 자기의 욕구를 충분히 갖는 기회를 갖는다. 그런다음 마치 각자의 길을 달리다 휴게소에서 만나듯 서로 만나 관점을 주고 받는, 인풋 후 아웃풋할 수 있는 안전하고 편안한 대화의 장소를, 그늘을 만들어 놓는게 좋겠다.

목소리를 가진다는 것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가청성, 신뢰성, 영향력이다.

우여곡절은 있겠지만 운명대로 살다, 여자의 이 말을, 나는 손상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손상이 있었어도 그걸이 내가 세상에 온 목적을 수행하는데 저해가 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중략)

흔히 낙원은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곳, 아무런 의무가 없는 곳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낙원을 원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낙원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종착지가 아니라 우리가 길잡이로 삼아서 항해해야 하는 북극성이다. P300

 

페미니즘을 떠나 자기만의 방, 철저히 혼자가 된 사유의 방에 앉아 여성을 둘러싼 프레임을 다각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이제는 사유의 방 건너편으로 가야한다. 목소리를 내어 서로의 성찰을 나누는 시간,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홀로 간직할 책이 아닌, 여럿이 소리를 내보아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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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플라스의 악마 반올림 54
박용기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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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플라스의 악마라는 종이책을 읽었다.

눈은 문장을 따라가며

머리는 문장을 상상하며, 말 그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뉴턴, 아인슈타인, 우주, 블랙홀,  양자역학, 상대성이론, 라플라스의 악마 등

과학과 SF장르의 자가 프레임(이건 어려워, 싫은데)의 안경을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라플라스의 세계관,

초기 조건만 알면 모든 일을 예상할 수 있다는 착각을 생각한다.

궁극의 원리만 알면 이 세계를 알 수 있다는 오만함,

과학과 기계문명이 발달하면 인간의 일 그리고 인간 자체를 지배할 것이라는 공포를 마주했다.

 

“우주 안에서는 우주를 다 알 수 없어. 바다를 벗어나야 바다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듯이 우주를 벗어나야 진정으로 우주를 이해할 수 있지.” P31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듯,

인간과 상황, 인간과 과학 사이에도 적절할 거리가 필요한데,

거리감 없이, 본질이 무엇인지 파악되지 못한 채 현상 속에만 매몰되어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인간과 상황, 인간과 과학 사이에서 인간은 주체적인 움직임을 양보하고, 피동적으로 움직여지는 존재로 여기고 성급한 결론을 내고, 두려워 떤다. 기계에게 일자리를 뺏기고, 기계의 지배를 받고, 결국 지구 밖으로 쫓겨나리라는.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해야 하는지 알 때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세계는 궁극의 원리로 규명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거야.”

 

과학의 세계도, 어린이의 세계로 그렇다.

어른인 나, 아이였던 나의 행동이 중요하다. 라플라스의 악마가 될 수 있는 것도 나, 세계의 이해자가 되는 것도 나이다. 가장 나답게 살 수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 머리에서 가슴, 가슴에서 발로의 끊임없는 순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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