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지음, 메이킹북스 편집부 옮김 / 메이킹북스 / 2025년 9월
평점 :

잔잔함 속에서 드러나는 마음의 무늬
오만과 편견을 읽고 / 제인 오스틴 지음
메이킹북스 출판 (도서협찬)
이 책을 읽다 보면, 큰 사건 하나 없이도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소리 없이 요동치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번역의 결이 부드러워서인지, 인물들의 일상적인 대화조차 물살처럼 잔잔하게 이어진다. 그런데 그 잔잔함 속에 인간의 허영, 욕망, 자존심, 그리고 사랑이 아주 정직하게 드러난다. 얕은 소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속내를 깊이 건드리는 순간들이 숨어 있다.
초반쯤의 베넷 부부의 결은 특히 인상 깊었다. 베넷 씨는 냉소와 재치가 뒤섞인 인물이지만, 그의 아내는 20년이 넘는 결혼 생활 동안 정작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단순한 성격의 충돌 같지만, 그 뒤엔 서로를 읽는 데 실패한 세월이 곶감처럼 말라붙어 있다. 오스틴은 이 오래된 단절을 거창하게 부풀리지 않고, 담담한 필치로 그려낸다. 그래서 더 현실적이고 씁쓸하게 다가온다.
그와 대비되듯, 베넷 부인의 질투와 두려움은 종종 우스꽝스럽지만 한편으론 애처롭다. 딸들의 미래에 매달리는 모습, 재산권과 상속 앞에서 조바심을 내는 행동들이 속물처럼 비칠 때도 있지만, 그 불안의 근원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현실적 걱정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쉽게 웃어넘기지 못한다. 오스틴은 인물의 허점을 드러내면서도 잔혹하게 내몰지 않는다. 그 적당한 거리감이 소설 전체의 품위를 지탱하는 듯했다.
또 하나 재미있었던 지점은 ‘신중함과 속물근성의 경계’에 대한 대사였다. 그 선을 어디서 긋느냐의 질문은 결국 이 작품의 주제와 맞닿을 듯하다. 사랑이란 감정 속에도 경제적 판단이 스며들고, 도덕과 욕망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현실을 오스틴은 웃음기 어린 문체로 가볍게 건드린다. 하지만 그 가벼움은 생각보다 묵직하게 남는다.
무엇보다 마음에 남은 건 다아시의 변화였다. 엘리자베스를 위해 굴욕과 희생을 감수하는 장면은 화려한 고백보다 더 깊은 울림이 있었다. 이미 거절당한 여자 때문에 자존심을 내려놓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는 조용히 그것을 해낸다. 엘리자베스가 그제야 자신의 무례함을 돌아보고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을 동시에 느끼는 부분은, 인간이 성장하는 방식이 얼마나 복합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천천히 깨닫는 그 여정이 이 소설의 진짜 힘이다.
<오만과 편견>은 극적인 사건이 없는 것 같지만, 그 잔잔함 속에서 사람은 조금씩 보이고 조금씩 변한다. 오스틴의 문장은 대단한 파도를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서서히 마음을 잠식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읽는 동안 제일 많이 떠올랐던 말은 ‘이야기의 뿌리는 늘 우리의 일상에서 생겨난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이었다. 이 소설은 그 사실을 가장 단정하고 우아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베넷 씨는 재치와 냉소적 유머, 속 깊은 침묵과 변덕이 기묘하게 섞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스물세 해의 결혼 생활 동안 그의 아내는 그의 속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의 성격은 훨씬 단순했다. 그녀는 이해력이 짧고, 지식이 부족한 데다 변덕이 심했으며,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생기면 곧잘 ‘신경병’ 한자인체했다. 그녀에게 가장 큰 과업은 딸들을 결혼시키는 것이었으며, 유일한 위안은 이웃을 방문하고 새로운 소문을 전해 든는 일이었다.” p10
“베넷 부인은 정말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약혼 소식이 나올 때마다 신경질을 부렸고, 샬럿의 모습은 눈엣가시였다. 롱본의 새 안주인으로 여겨지는 그녀가 질투스럽고 밉살스러웠던 것이다. 샬럿이 집에 와서 콜린스 씨와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순간마다, 베넷 부인은 그들이 롱본 영지를 이야기하며, 베넷 씨가 죽으면 자신과 딸들을 내쫓을 궁리를 한다고 확신했다.” 116
“‘숙모, 결혼할 때 신중함과 속물근성 사이에 뭐가 그리 큰 차이가 있겠어요? 어디서 신중함이 끝나고 탐욕이 시작되는 걸까요? 지난 성탄절에는 제가 돈이 없어서 위컴 씨와 결혼하면 무모하다고 걱정하시더니, 이젠 1만 파운드를 가진 아가씨에게 마음을 두었다고 속물이라고 하시네요.’” p136
#오만과편견 #제인오스틴 #메이킹북스 #세계문학 #고전 #오만한자존심 #섣부른편견 #책리뷰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