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급격한 경제 발전을 통해 근대 사회를 별달리 경험해보지 못하고 현대 사회로 휙 넘어온 느낌이다. 아니 그렇다고들 한다.
그래서 전근대적인, 근대적인, 현대적인 것들이 뒤섞여 시너지를 발휘할 때도 있고 마이너스적으로 영향을 줄 때도 있다.
짧은 기간동안의 근대화는 모든 것을 압축화했고, 개인화도 압축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압축된 개인화는 탈가족화, 핵가족화, 1인가구화 등으로 물리적 분리를 이루며 진행되었지만...
개인주의로 나아가는 정신적 분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장경섭에 의해 "무개인주의 개인화"라고 불려지게된 이러한 변화는 우리 사회가 지닌 지연, 학연, 혈연 등의 집단주의가 개인주의의 태동을 억제하고 있음에 따름이며...
내면의 개인화는 인정하더라도 외면의 집단주의를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강제성을 보이고 있다.
떼거리 문화...
개인의 주장과 생각이 속한 조직과 달라도 차마 내세우지 못하고 조직의 주장에 스스로를 함몰시키고 나아가 다른 사람의 다른 주장을 그외의 사람들과 함께 한목소리로 규탄하고 있다.
이는 개인이라는 가면을 쓰고 앞서가는 신세대인양 행동하면서도 혼자됨을 무서워하기 때문일 것이고...
가족으로 대표되는 집단의 원거리 가족주의가 여전히 기능을 하고 있음에 따름일 것이다.
우리는 개인주의를 수반한 개인화를 이루어야 하고...
이는 개인주의가 표방하는 독립적이면서 자율적인 개인이 상호 존중과 상호 협력을 통해 자유로운 연합체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문제 의식을 고양해야 한다는 말이다.
전체주의자가 '사회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개인주의자는 '인간은 세상과 영원한 긴장 관계에 놓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p115)
세상이 바뀌더라도 자기 실현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자는 여전히 개인주의자일 수 밖에 없지만, 이념과 사상을 갈아탄 전체주의자는 그 결을 바꿀 수 있다는 면이 있을 수 있다.
집단주의를 전체주의와 일치시킬 수는 없겠지만 지금 우리 주변에서 드러나고 있는 집단주의의 탈을 쓴 몰이사냥식 독재적 조직문화가 전체주의자의 이상적 염원을 구현하는 순기능적으로 움직여주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때 결국 우리는 가까스로 이루어낸 민주화/민주주의를 스스로 걷어차고 점점 더 비이성적 파시즘에 도달할 지도 모를 일이다.
민주주의와 개인주의는 상호 보완적이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더불어 개인주의가 꽃을 피우기 위해선 복지주의도 한 몫 해야한다.
주거, 일자리, 실업 수당 등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 개인은 다른 개인과 가족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가족주의로의 회귀다.
생존에 매달리는 상황이 아닌 자기 실현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는 여건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구분되어야 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지만, 그와 동시에 서로 다르게 태어나며...
개체성과 개인의 고유한 특성에 대한 존중은 근대에 이르러 인류가 이룩한 인권 신장의 최고 성과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가족과 조직, 지연과 혈연 등으로 인해 내 개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립과 자아 실현의 터전을 놓친다는 것은 한 번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너무나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을게다.
개인주의자는 주체가 된 개인이며, 개인 주체는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위하는 주체적 개인이다.
개인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를 개인 주체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며...
개인 주체는 세상이 지시하는 주어진 삶의 행로에 대해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자기가 원하는 삶, 자기만의 삶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개인이다. (p179)
개인으로서 바로 서고... 공적인 부분에 관심을 갖는 시민이 되어 보다 나은 사회가 형성되고 그런 세상에서 우리 스스로의 행복을 만끽하는 그런 세상이 되어가길 소망해본다.
특히 책 제목처럼 이기적이지 않은 이타적인 개인주의자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