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김열규 지음 / 사무사책방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학의 거장 김열규가 남긴 한글로 쓰여진 단 한 권의 『죽음에 대한 총제적 모노그래프』'

책 표지에 덧댄 라벨에 씌여진 책에 대한 한 줄...

사실 이 한 줄 표현이 나에게 이 책을 읽어보자하는 동하는 마음을 준 것이 사실이다.

예전에 셀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사실 여러번 읽었다. 그런데 너무 어려워서 정리가 잘 안되더라. 그래도 서양식 사고라고 해야할까 여하튼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단계를 가지고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간 책이었다.

동양적 사고, 거기에 좀 더 구체적으로 한국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죽음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 책 역시 어렵다. 나에겐...

표현도... 추론의 과정도... 서양 문학의 한 부분을 넘나드는 저자의 앎의 깊이가 버겁다.

셀리 케이건의 죽음론에서도 죽음이란 기억을 가진 어떤 의식이 나를 모르게되는 상황이 죽음의 한 모습이 아닌가 말했다.

이 책에서도 "넋"을 이야기 한다. 넋이라는 것이 기억이자 혼이자 의식이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넋나감이 죽음은 죽음이되 죽음의 넋나감은, 나간 넋이 다시 육신 속으로 되돌아올 수 없게 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것을 넋의 육신 회귀 불능의 상태, 넋의 영원한 탈신, 곧 몸 벗어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p88)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그것은 육체의 활동 정지보다도 더 이르게 올 수 있는 것이어서 죽음이라고 단정할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상태가 과연 살아있음의 한 모습일까?

기억을 잃는다는 것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가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치매라는 병이 무섭다.

살아서 장수와 부귀다남을 누린 끝에 남들이 다 '호상'이라고 부르는 그런 죽음을 한국인은 바란다. 그런데 다른 표현으로는 이 '호상(好喪)'은 "참 사치스럽고 욕심 사나운 죽음" (p159)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조건에서 무언가가 빠져 버리면 '악상(惡喪)'이 되고 떠돌이 방랑의 혼이 된단다.

이런 떠돌이 넋이라는 것에서 한국인이 저승에 대해 품었던 생각과 영혼 구원의 관념을 추론할 수 있단다.

저승에서 넋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떠돌이 넋은 없을터인데 이런 떠돌이넋이 있다는 것은 영혼의 구원자의 존재를 믿지 못함이 아니었을까?

영혼의 구원자의 존재가 상정될 수 없을 때 넋은 남겨진 이승의 문제를 그냥 둔 채, 저승으로 가지를 못할 것이다. 이승에 남은 채, 빚을 갚듯이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이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p160)

결국 한국인은 이승과 저승의 문제를 별개의 것으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일 터이고...

저승에서의 넋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죽어서 저승에 갔는데 살아간다는 표현은 어딘가 상당히 모순적이기는 하다... ^^) 이승에서의 삶의 인과관계일 뿐 그 인과의 사슬을 넘어 별도의 구원이 영혼 (넋)에게 주어지지 않는다고 봤다는 추정을 하게 된단다.

어쩌면 한국인에게 종교란 이승에서의 참된 삶을 살도록 이끌어주는 무언가이지 않았을까 싶다. 저승에서의 문제는 이승에서의 삶의 결과이니.

요즘 한국인에게 다양한 종교가 삶의 일부로 들어와있지만 그 종교들이 말하는 저승에서의 구원은 오래 전 이 땅에 살았던 그네들에게는 별반 감흥이 없었겠다 하는 생각이 문득.... (이건 그냥 내 생각일 뿐 저자의 주장은 아니다. ㅡ.ㅡ)

여하튼 어렵다.

책도 어렵고 죽음도 어렵고... 일부라도 제대로 이해했는 지 궁금하기도 하다.

한번 읽고 끝나는 책은 아닐터이니 다시 읽고 또 읽으면 그 알아감의 범위가 점점 커지리라 생각해본다.

[출판사로부터 무상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독후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