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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별난 게 아니라 예민하고 섬세한 겁니다 - 세상과 불화하지 않고 나답게 살아가는 법
제나라 네렌버그 지음, 김진주 옮김 / 티라미수 더북 / 2021년 9월
평점 :
절판
등공예 작가 풍 선생님과 부탄의 한 호텔에 누워 방의 벽지의 문양을 보며 그날 일정의 피곤함을 달래고 있었다. 그러다 풍 선생님이 벌떡 일어나더니 벽지의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대단해! 공장에서 인쇄한 벽지가 아니고 사람이 일일이 문양을 그렸어!”
나는 어릴 때의 버릇대로 벽지의 그림을 보며 여기서 저기까지 선 긋기를 하고 면적당 문양의 개수와 벽의 한 면에 몇 장의 벽지가 들었는지 세고 있었다. 풍 선생님과 같은 벽지를 보고 있었지만, 우리의 예민함과 섬세함은 서로 달랐다.
2층 높이에 있으면 뛰어내리고 싶다. 뛰어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고등학생 때까지는 계단을 이용하지 않고 1층 바닥에 위험한 게 없으면 1층 옥상, 2층 높이에서는 밖으로 뛰어내렸다. 버스가 복잡하면 내릴 때 창문으로 뛰어내리기도 했다.
또 사체에 관심이 많았다. 추리 소설을 좋아해 사체에 관심이 생긴 건지, 사체에 관심이 많아 추리 소설을 좋아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체에서 인체의 신비를 느끼곤 한다.
퇴근하는 길에는 하늘의 구름이 무슨 모양인지 꼭 찾아내려 한다. 그러다 운전 중임을 인지하고 정신 차린다. 2층 높이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만큼 윗집의 소음에는 예민하고 까칠해진다.
자율신경 실조증(기립성 저혈압)으로 디아제팜을 복용하고 있다. 이 책의 145쪽에 의하면 감각 처리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상담 도우미 연수에서 성인 ADHD 증상이 의심되었지만, 생활에 지장이 없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서 굳이 진단은 받지 않고 있다. 이 책을 읽고 자가 진단한 결과 나도 신경다양증 증상들이 있다.
주변 소음과 저혈압은 나를 좀 힘들게 하지만 그 외는 불편하지 않다. 나는 내가 겪은 고통만 이해하고 다양한 신경다양증을 겪고 있는 이들의 고통에는 공감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그리고 154쪽, 신경다양증이 연구 초기 단계여서 생소하기도 하다.
이상행동의 판별 기준은 통계적 기준, 사회문화적 기준, 주관적 불편감, 부적응성, 전문적 기준 등이다. 이 기준으로 살펴보면 미국에서 여성에 대한 HSP, 자폐/아스퍼거 스펙트럼, ADHD, 감각처리장애, 공감각에 대한 진단을 늘릴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책에 DSM이 자주 등장하기에 DSM의 장단점에 대한 언급은 필요한 것 같다.
정신 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 (naver.com)
■ 분류체계의 장점
1) 효과적인 의사소통, 명료성, 체계적으로 축적된 자료 제공
2) 연구 및 이론 개발의 기초, 유사성-차이점 인식에 유용
3) 주요증상, 진전과정, 원인, 치료법 선택에 유용
■ 분류체계의 단점
1) 개인의 고유한 정보 유실, 고정관념, 낙인찍기
2) 환자의 태도 변화(자기충족 예언)
3) 치료효과에 대한 선입견, 증상이 아닌 진단에 의한 치료 우려
DSM은 진단항목이 너무 많은 것(20개 대범주, 360개 이하의 하위 범주)에 비판이 있음에도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기에 신경다양증 진단을 추가하자고 한다. 하지만 단점 중 낙인찍기와 자기충족 예언에 주목해야 한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증상을 맞는 진단으로 보이게 끼워 맞추게 되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신경다양성 운동은 인간의 경험, 특히 ‘장애’에 대한 개념을 새로이 하려는 움직임이다. 이러한 운동은 DSM의 단점 보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데 동의한다.
그럼에도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부분은 저자가 이 책을 쓰기까지 살아온 사회문화적 배경이다.
한국어 교원 자격증과 다문화 사회 전문가 자격증 공부를 할 때 서구 사회의 백호주의 정책을 접하면서 서구 사회문화의 백인 남성 우월주의가 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리학적 접근 역시 백인 남성 중심이라 저자는 여성의 편에서 다양성 인정을 강조하는 듯하다.
그런데 저자는 ADHD와 자폐스펙트럼 진단이 남성 위주라고 말하면서, 고학력의 전문직을 가진 백인 여성들을 신경다양증의 예로 들었다. 저자도 같은 여성이지만 흙수저 계층에는 차별을 둔 건 같다.
또 여자아이들에 대한 정신질환 진단 부분도 공감이 잘되지 않는다. 아동을 대상으로 ADHD와 자폐 진단은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배웠다. 아동의 경우 환경에 따라 변화무쌍한 시기인데 진단을 내림으로써 아동의 발전 가능성을 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단을 받음으로써 배려를 받는 대신 아동의 가능성을 가두는 것보다 좀 더 천천히 진단을 내리는 게 낫지 않을까. 자폐 스펙트럼의 아이를 키워본 나의 경험이다.
HSP와 결은 다르지만 우리나라는 '화병'이라는 게 있고, 우리나라 문화와 관련한 정신의학적 증후군으로 인정을 한다. 그리고 본인과 함께 가족, 사회가 지혜롭게 극복하기 위해 관심을 가지고 노력한다. 이 부분을 보면 미국인 저자의 사회문화적 의식에서 우리나라와 차이가 느껴진다. 223쪽에 소개한 한국 건축가 전기정 교수님 역시 자폐인이나 환자라는 질병으로 규정하는 언어 대신 ‘고객’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는 사례에서도 의식의 차이를 느꼈다.
마지막으로 신경다양증 여성들은 이기적인 성향이 확실하게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기적이지 않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청소년기에 나타나 성인기에 사라져야 할 '개인적 우화'와 '상상의 청중'이 성인기에도 존재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신경다양증 증상의 원인의 스펙트럼을 넓히면 좋을 것 같다.
1부와 2부를 읽으니 융의 개성화와 성격 통합(분화과정에서 상실한 전체성을 회복하라)이 적절한 솔루션이 될 수 있지도 모르겠다. 당시 융의 개성화가 소수의 엘리트만을 위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어 비난을 받기도 했다. 앞서 같은 여성이지만 흙수저 계층에는 차별을 둔 건 같다고 언급했었는데 신경다양증의 특성과 융의 개성화의 공통점인 부분이다.
또 융은 의식적 태도와 기능을 조합하여 외향적 사고형, 내향적 사고형, 외향적 감정형, 내향적 감정형, 외향적 감각형, 내향적 감각형, 외향적 직관형, 내향적 직관형의 8가지 성격을 설명하였다. (이것이 요즘 유행인 MBTI의 초석) 이 책의 신경다양증 증상이 있는 여자들의 성격을 저자는 내향적이고 감각적이라고 표현하는데 융의 유형론의 6번째에 해당한다.
개성화 (naver.com)
내향적 감각형이라면, 감각이 밀려와 불안을 느낄 때 생각을 멈추고 객관적 사실에만 집중하는 마음챙김도 좋을 것 같다. 계속 자신의 감정과 감각만 따라가다보면 객관성은 잃은 채 상대의 마음을 추측하게 된다. 자신의 감정에만 집중하다보면 결국은 자신의 감정에 매립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신경다양증 중에서 특히 감각처리장애는 낯설었다. 신경다양증이 생소해서 모르는 부분을,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부분을 해결하면서 읽었더니 완독이 오래 걸렸지만 알아가는 과정에서 다양성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