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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패키지 - 정해연 장편 스릴러
정해연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12월
평점 :
감히 열흘짜리 유럽 여행은 넘보지 못해도 여행사의 미끼 상품인 싸구려 패키지여행은 약간의 용기로 넘보는, ‘가끔은 여행 정도 가는’ 허영의 그릇을 채워 주는 훌륭한 역할을 수행한다.
(본문 중에서)
패키지여행을 떠나는 관광버스. 처음 들린 휴게소에서 약간의 소동이 있었지만, 곧 다시 출발했고 첫 번째 경유지에 도착한다. 하지만 한 여행객의 캐리어 안에서 토막 사체가 발견되면서 패키지여행은 중단되고 만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어렵지 않게 특정된다. 피해자는 김도현. 초등학교 1학년. 가해자는 김석일. 김도현의 아버지. 휴게소에서 연락도 없이 사라져 버린 패키지여행 참여자들이었다. 가명을 썼을 거란 경찰의 예상과 달리 모두 실명이었고 긴급히 수배가 떨어진다. 얼굴이 뭉개진 채 토막 사체로 발견된 아이의 몸에서 장기간 학대를 받은 흔적까지 발견되고 언론은 들끓는다. 빨리 잡아야 한다는 모두의 관심 때문이었을까? 김석일은 뜻밖의 장소에서 별 저항 없이 붙잡힌다. 어떤 남자의 집에서 그 남자를 칼로 찌른 후 현행범으로.
이번 이야기도 범인을 찾는 이야기가 아니다. 범인은 명확하다. 명확하지 않은 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가다. 부모가 돼서 어째서 아이를 버리고 학대하고 죽여야만 했으며, 축복이어야만 할 아이들에게 ‘태어난 게 죄’라는 굴레를 씌어버린 어른들의 못난, 안타까운 선택을 하나씩 풀어 헤친다. 사건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담당 형사까지 아동학대로 인해 가정이 파괴된 적이 있는 터라 작가의 다른 작품인 <구원의 날>처럼 감성의 개입이 꾸준히 일어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렇다고 해서 밋밋하게 과거의 사실만 드러내진 않는다. 이렇게 될 거라 당사자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자식을 위해 했던 두 개의 거짓말, 그로 인해 누군가에게는 사실과 진실이 다른 것이 되어 버린다. 이야기는 그 점을 뒤늦게 깨달은 캐릭터들이 나름의 선택을 하며 끝을 향해 내닫는다.
이 글 맨 처음 썼던 문장은, 소설 첫 부분에 등장하는 패키지여행에 대한 여행사 직원의 인식이다. 그리고 소설의 끝부분, 숨겨진 진실을 깨달은 형사는 등장인물과 대화를 하던 중 피해자 가족을 패키지여행 상품에 빗대는 말을 듣게 된다. 허영, 허울, 질시, 외면, 욕망. 형사는 이 사건을 담당한 순간부터 계속해서 아내와 아들과 자신을 떠올렸다. 분노, 원망, 절망, 그리고 죄책감.
힘들고 위험한 일이 산재해 있어도 국민을 지킨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가족은 지키지 못했다. 가족도 이 나라의 국민인데, 자신의 가족은 지키지 못했다. 안에서부터 깨지고 있는 것을 모른 체했다.
(본문 중에서)
담당 형사인 박상하는 하나뿐인 가족인 아들을 찾아간다. 학대로 망가져 버린 하나뿐인 아들. 그 아들과 등을 맞대고 앉아 희망을 품는다. 우린 패키지여행 같은, 그런 가족이 아니라고. 그런데 비비 꼬인 나는 이런 생각도 든다. 왜 하필 희망은 판도라 상자에 들어 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