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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구의 증명 ㅣ 은행나무 노벨라 (오디오북) 7
최진영 지음, 김다올 외 낭독 / 은행나무 / 2022년 11월
평점 :
한때 내 인생에서 누군가 지워지기를 바란 적이 있다. 제발 좀.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를 지울 방법은 내가 사라지는 것. 내가 이 끔찍한 관계 속에서 발을 빼고 어딘가로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아예 실현 불가능한 방법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에겐 실현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와도 담을 쌓아야 했으니까. 그건 나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거였으니까. 그래서 그 사람이 더, 더 미웠다. 그 사람이 한심했고, 그 행동에 치를 떨었고, 그 생각이 기가 막혔다.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기력한 내가... 실망스러웠다. 그렇게 내 젊은 시절의 한때가 흘러가고 있었다.
인간관계라 하면 단순히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말하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 사회에서 부여하는 사람의 의미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이미 포함되어 있어서다. 가족이란 혈연 범위, 돈에서 비롯되는 각종 지위, 계층. 수많은 것들이 모여 사람을 이루고 그런 존재들이 관계를 형성한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관계라면 그나마 괜찮지만, 선택할 수 없는 관계가 자신을 굴레처럼, 낙인처럼 지배한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나? 굴레를 깨뜨리라고? 낙인을 지우라고? 모든 걸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그래서 이 사회가 너에게 부여한 의미가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라고? 흥이다.
책을 읽고 쓴 글 치곤 지나치게 감정적이다. 그건 작가가 지나치게 지독한 소설을 써서 그렇다(그렇게 우겨본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 얘기인데 도무지 처음부터 끝까지 편치가 않다. 단순하고 전형적인 설정이지만 그래서 이성보단 감성을 더욱 자극한다. 관계 속에서 버둥대는 구와 담을 보면서 한때의 내가 떠올라 더욱 그렇다. 그런데 한때의 나라고? 지금의 나는 그 누군가를 완전히 지운 걸까?
사진첩을 정리했다. 옷장 정리를 하다 구석에 처박힌 대여섯 권의 옛날 사진첩을 발견했거든. 그 사람이 있고 내가 있고 또 다른 누군가도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다 지나간 건가? 그때의 많던 감정의 격동들이?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내 경우는 그 사람을 지우려 했기 때문에. 하지만 담은? 소설 속 담은 어떨까? 사랑하는 구를, 구의 존재를 자기 안에서라도 어떻게든 증명하려고 하는 담은 시간에 많은 걸 흘려보낼 수 있을까? 궁금한 것처럼 물음표를 달아보지만, 마지막 문장을 읽고 책을 덮는 순간 이미 나만의 대답을 찾은 모양이다. 그러니 이렇게 감정적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