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특별한정판, 양장)
한강 지음 / 창비 / 2020년 4월
평점 :
품절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본문 중에서)


1980년 5월에 대한 내 기억은 명확하지 않다. 신문은 보지도 않고 TV론 만화만 즐겨 보던 나이였던 데다 부모님 품에서 고이 자라기만 해서 세상이 어떤지 알 길이 없었다. 지금 어렴풋이 남은 기억은 아버지가 광주 근교에 살고 계신 가까운 친척들을 걱정하시던 모습뿐이다. 그리고 86년, 88년의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광주에 없었던 나에겐, 대학생들의 잦은 데모가 뭘 의미하는지 몰랐던 나에겐, 인권이란 단어가 있는지조차 몰랐던 나에겐 80년대는 개발과 번영에 한걸음 다가간 시기였다.


하지만 광주는 달랐을 거다. 소설 속 광주에 사는 ‘나’는 총에 맞아 죽었고, ‘너’ 역시 살아남지 못한다. '네' 곁에 있던 ‘그들’은 생존했지만 모두가 정상적인 삶을 누리진 못한다. 트라우마, 유린당한 몸과 정신에 대한 경멸, 구해내지 못한 죄책감 등으로 위태한 삶을 살아가거나 삶의 끈을 놓아버린다. ‘우리’를 떠나보낸 ‘그들’에겐 80년대뿐만 아니라 살아 숨쉬는 모든 시간이 고통의 시기였을 것이다. 90년대, 2000년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까지도.


이 책은 무척이나 힘들게 읽힌다. 이런 저런 자료를 통해, 그 때 그 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여러 노력 덕에 많은 사실들이 알려진 터라 더 그렇다. 강렬하게 압축되어 전달되는 영상과 달리 비교적 느리게 다가오는 글자들을 보면서 감정적으로 이렇게 힘들었던 건 처음이지 싶다. 슬픔과 안타까움은 말할 것도 없고 왜 그랬을까,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 그 많은 목숨과 아픔을 외면하는 게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계속해서 책을 읽는 동안 나를 괴롭힌다.


현실로 돌아와 보면, 얼마 전 법원에서 80년 5월 당시 신군부의 헬기 사격이 인정된 판결이 나왔다. 어쩌면 그 당시 발포 명령자가 누구였는지를 밝히는 지점까지 조금 더 접근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혐오와 대립이 그 어떤 때보다 도드라진 시대상을 볼 때, 그 세태에 기가 막히게 올라타는 정치인들의 행태를 볼 때, 진실을 밝히겠다는 흐름은 언제든 거꾸로 되돌려질 수 있다. 그러지 않으려면 책 속 ‘그들’의 슬픔과 죄책감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어야 한다. 개인의 비극이 아닌 이 땅의 비극이어야 하고 슬픔에 공감하는 걸 넘어서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역사가 좀 더 밝은 쪽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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