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전태일은 바보회를 만들었을까? - 자본가 vs 전태일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58
이정범 지음, 이일선 그림 / 자음과모음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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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에 '천만 노동자의 어머니'라 불리시던 '이소선 여사'가 소천하셨다. 40년간 민주화. 노동운동에 헌신하셨던 이소선 여사의 소천은 많은 것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전태일이다.  스물두살의 젊은 청년이 '근로기준법'이라는 책한권을 들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며 분신을 했다.  이 짧은 기억들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영화속에서 만난 기억이다.  분신을 한 청년을 알고는 있고, 그의 어머니도 알고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단편적일 뿐이다.  1960년대를 나는 살아 본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에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한다. 그 짧은 삶을 말이다.

 

 

 

 196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경제는 세계 최하위 수준이었다. 경제 발전을 힘써 추진한 박정희 정부는 장기 집권을 했고, 우리 나라는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룩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시기를 흔히 '산업화 시대'라고 하고, 다른 이들은 '개발 독재의 시기'라고도 부른다.  같은 시기를 두고도 역사관이나 사상에 따라 부르게 부르는 경우는 상당히 많다.  농촌이 붕괴되고 대도시 곳곳에 빈민촌이 만들어 지면서 그 시기에 '달동네'와 '빨리빨리'라는 말이 나왔다.  농촌에서 올라와 산중턱이나 정상 쪽에 판잣집을 짓고 살면서 달을 보며 집을 나와 달을 보면서 귀가를 했다는 뜻에서 '달동네'라는 말이 생겼고, 공장장이나 사장의 '목표량을 빨리빨리 채우라'는 다그침에 '빨리빨리'라는 말이 생겨났다.

 

 

 

 전태일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시절은 그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 유복하지 않았다.  재봉일을 하시던 아버지를 보고 자랐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는 가족을 풍지박살나게 만들었고, 먹고 살기 위해서 산업화 시대에 밑바닥을 떠돌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평화시장의 미싱사가 되어 하루 14시간 이상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던 어린 동료들을 보며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전태일은 우리나라에도 근로 기준법이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에게 듣게된다.   제대로 학교를 나오지 않았던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읽기 위해 노력했고, 사업주와 관리들이 법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근로기준법은 1953년에 제정된 후 모두 11차례 개정되었고, 1997년에는 그때까지의 법률을 모두 폐지한 뒤 새로 제정해 2010년까지 모두 22차례 개정되었다.  전태일이 활동하던 때와 오늘날의 근로 기준법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전태일은 어떤 사업주나 노동자들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근로 기준법을 수없이 읽으면서 각각의 조항과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실상을 비교하게 된다. 그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1일 평균 13~16시간, 1주일에 78시간~96시간을 일을 했다. 유해 위험 작업에 대한 규정은 모두 무시되어서 대부분 신경성 소화불량, 만성 위장병, 류머티즘, 폐병을 앓았고, 작업장에 환기 장치가 없고 휴식 시간인 오후 1~2시에도 햇빛을 받을 장소가 없었으며, 평화시장 400여 공장 중 상수도가 나오는 곳은 고작 3곳이었다고 하니 노동여건이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주위 노동자들에게 근로 기준법을 알려 주던 전태일은 업주들로부터 위험 인물로 낙인 찍혀 직장에서 해고당하게 된다. 그가 만든 '바보회'는 자신들의 요구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징적인 뜻으로 붙인 이름이었다. 이 바보회는 후에 평화시장,동화시장,통일상가에서 일하는 재단사들의 모임이라는 뜻에 '삼동친목회'로 거듭나게 된다.  그곳을 통해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 개선 진정서'를 만들어 1970년 경향신문에 기사가 실리게된다.  경향신문에 실리면서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박정희로 인해 노동청과 업주들은 한동안 궁지에 몰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눈가리고 아옹처럼 그 시기가 지나도 근로조건이 개선되어지지는 않았다. 

 

 크게 좌절한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시위에서 있으나마나 한 근로 기준법을 불태워 버리자고 제안한 후 동료들의 눈을 피해 자기 몸에 기름을 붓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자살을 하기에 이르른다.  그의 극단적인 선택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옳다고 할수는 없다. 하지만 그와 같은 절박한 처지를 호소한 행위임에 틀림이 없다.  그 뒤 노동 운동과 인권 운동에 매우 큰 영향을 주어 대중들을 일깨우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재야 운동가 장기표가 쓴 글 '가장 인간적인 사람들의 가장 비범한 삶'중에 전태일에 관한 글이 있다.  "전태일은 학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어도 사물을 정확하게 통찰하는 명석함을 지녔을 뿐 아니라 그의 사상과 행적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문장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인간의 명석함이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인간에 대한 사랑, 동료에 대한 사랑이 아직도 우리가 전태일을 기억해야만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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