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사화 조선 핏빛 4대 사화 2
한국인물사연구원 지음 / 타오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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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개국 이래 문치에 힘을 쓰고 유학을 장려했기 때문에 우수한 학자가 많이 배출되고, 유림은 활기에 차 있었다. 그러나 세조∼성종 때에 이르러 그들 사이에 주의, 사상, 감정, 정실 향토관계 등으로 여러 파별이 생겼는데, 개중에는 뜻이 상통하는 파도 있었으나 서로 대립·반목하는 파도 있었다.  이를 네 파로 대별하면 훈구파, 절의파, 사림파, 청담파 등이다. 이 대립, 반목하는 파들은 서로 동력하여 함께 커갈 생각보다는 조선을 핏빛으로 만들어 버렸다.   1498년(연산군4)~1545년(명종 즉위)에 일어난 네 차례의 사화를 4대 사화라고 하는데, 1498년(연산군4)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무호 사화,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로 유명한 갑자사화, 1519년(중종 14) 남곤, 홍경주 등의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의 신진 사류가 축출된 사건인 기묘사화 와 1545년에 왕실의 외척인 윤임, 즉 대윤과 같은 파평 윤씨인 윤원형, 즉 소윤 사이의 권력 다툼에 말려들어 많은 선비가 타격을 받은 을사사화다. 

 

조선 왕조 500년 역사속에서, 근 50년 사이에 무수한 선비들이 죽어 나갔다.  연산군 4년부터 10년 사이에는 두번이나 피의 향연이 이루어 졌으니, 그의 폭정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알수 있는데, 타오름에서 나온 두번째 사화,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행위와 함께, 사화가 일어난 배경, 주요 인물과 연산군 폐위인 중종반정까지 다루고 있다.  갑자사화는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크게 제거된 상태에서 연산군과 그를 싸고 돈 궁궐 세력이 훈신 계열의 재력을 탈취하고자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비에 대히 묵과했던 훈구파 대신들을 흠잡아 일으킨 사건이다.  연신군은 생모 윤씨의 사사를 전혀 모르고 자랐다가 공신들을 배척하려는 임사홍의 밀고로 어머니가 사사된 배경을 알게 된다. 이 사화는 윤씨의 폐위와 사사사건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고ㅗ, 연산군의 포악하고 잔인한 복수심에서폭발한 사건으로 보이나 그 내역을 살펴보면 조정 신하들 간의 암투가 이사건을 조장하고 격화시킨 것이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특히, 임사홍은 궁중과 부중 양파의 대립 관계와 연산군의 복수심을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연산군의 폭정과 만행은 성균관과 사원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훈민정음의 교습과 사용을 금하는 한편, 한글 서적을 모아 불사르는 등 문화의 정체와 인륜 질서의 파괴를 가져왔다.  거기에 투기와 유희가 극을 달했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결핍 때문인지, 현실의 괴로움과 분노를 망각하기에 여인들과의 유희와 술이 손쉬운 일이었기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자행한 일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며 세상에 대한 복수를 펼친 것인지, 연산 군은 그가 내린 선택은 어떤 변명이든 무마시킬 만큼 인간 본능의 끝을 보여줬다. 황윤헌의 애첩을 취하고는 눈물을 보인다는 이유로, 황윤헌의 목을 베고, 애첩의 목을 베는가 하면, 설중매가 꿈에 남편을 보았다는 말을 듣고는 그 남편의 목을 베었다.  선왕의 후궁이었던 정귀인과 엄귀은은 몽둥이질로 죽이고도, 순임금을 일러 천하의 대효라 합니다만, 전화보다 도 더 효자가 이 세상에 또 누가 있겠습니까?라고 위로해 주는 임사홍의 말을 듣고 둘도 없는 총신이라 하니, 할말을 잃게 한다. 그뿐이 아니다. 인수대비를 내쳐서 시름시름 앓다 죽게 만들고는 상복을 입은 채 고기를 씹으며 술을 마시고 심지어는 외도까지 거리낌없이 자행하였다. 그것도 인수대비전에 있던 비자 고미를 데리고 말이다. 연산군이 세자였을때, 선생이던 조지서는 연산군주는 재주가 비상해 한번 들으면 잊지를 아니하고 때로 학문의 뜻을 말할 때면 큰 학자도 따를 수가 없을 만큼 도도한 데가 있는 왕세자였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무서운 성미와 방종을 가진 세자가 지금의 모습으로 지존의 자리에 나아간다면 장차 크나큰 일을 그르칠것이라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 되었다.

 

책을 읽다 읽다, 이렇게 끔찍한 형벌들은 처음 봤다.  죽은자의 무덤을 파내 관을 자르고 시체를 자르는 부관참시, 산 사람을 산채로 강물에 집어던치는 형벌, 무덤을 파고 송장의 허리를 베어 그뼈를 갈아 가루를 만든 다음 바람에 날려 버리는 쇄골표풍, 들지 않는 무딘 칼로 몸을 짓이겨서 죽이는 참혹한 형벌인 능지처참, 바른말 한다는 이유로, 환관 김처선은 혓바닥이 잘리고, 다리가 잘리고 시체는 호랑이에게 먹이고, 처(處)라는 자가 들어가는 말이나 글은 쓰지도 못하게 하였단다. 그래서 처서(處署)는 저서라하고 '처용무'를 풍두무(豊頭舞)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니,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연산군은 선정이니 악정이니 하는 것을 따지기 보다는 우선 자신에게 반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원칙과도 같아서, 밉살스럽고 바른말 하는 선비 무리들을 없애 버리는 것이 편했을 것이다.

 

연산군의 학정이 나날이 심해지자 , 1506년(연산12년) 훈구세력은  임사홍, 신수근 등의 궁중 세력과 결탁해 진성대군을왕으로 추대한다.  훈구파들은 무사들을 훈련원에 모으고 진성대군에게 거사를 알리는 한편 신수근, 신수영, 임사홍 등을 불러내 격살하면서 정변을 성공시키고,연산군을 폐위한뒤 진성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 진성 대군이 곧 중종이며, 이 정변을 중종반정이라고 한다.  중종은 백성들에게 신망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능히 한 나라를 이끌어 날갈 품격을 갖춘 인물이라고, 진성 대군을 옹립하려 한다는 소문은 그 전부터 있어, 연산군에게 죽을뻔하였다가, 영산군과 연산군의 비의 구원으로 죽음을 면한 인물로, 진성대군은 연산 군주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것이 조비의 <칠보시>와 같다고 생각을 했었다.  이러고 보면,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결국은 진성대군이 연산 폐위와 함께 왕이 되었으니 말이다.   연산군의 학정은 끝났으니 정치의 주도권이 훈구파에게 돌아가면서 중종이전부터 문제되어 온 정치 체제의 모순에 대한 근본적인 시정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후에도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림은 계속되었다.

 

작가의 말처럼 인류의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알려준다. 이 나라에서 생겼던 역사는 모순되든, 올바르든 우리와 상관없는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의 사연이 아니며 이 땅을 지키고 살아갈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한다. 미래는 지나간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하고, 현재는 과거를 딛고 선 시간이라고 말이다.  과거의 불행을 무시해버리면, 불행이 와도 알지 못하고 대비하지를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과거, 그 옛날 역사를 우리의 관심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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