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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개장의 용도
함윤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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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삐걱대는 공간, 불안정한 관계, 설명되지 않는 믿음과 환상이 이 책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은 현실에서 한 발 비껴선 지점에서 출발하지만, 끝내 다시 현실을 바라보게 만든다. 귀신과 미신, 꿈과 같은 환상적 장치들은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만큼은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이 책의 소설들은 불안정한 인물들을 통해 ‘살아간다는 감각’이 얼마나 위태로운 균형 위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물들은 저마다 결핍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며, 그 감정은 설명되지 않는 믿음과 선택의 형태로 드러난다. 환상은 도피처가 아니라 외면해왔던 감정과 상황을 직면하게 만드는 통로로 작동한다.

특히 2인칭 서술이나 시점의 혼재, 현실과 꿈의 중첩 같은 서사적 장치는 독자를 안전한 관찰자의 위치에 두지 않는다. 독자는 인물의 감정과 선택을 함께 감당하며, 쉽게 해소되지 않는 질문과 여운을 마주하게 된다. 읽기를 마치고 나면 몇몇 장면과 문장, 특히 이야기의 시작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글을 읽고 쓰는 일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이처럼 섬세하고 단단한 소설들을 한 권에서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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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모음 2025.여름 - 65호
자음과모음 편집부 지음 / 자음과모음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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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모음』 2025년 여름호(제65호)는 문학이 독자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는지를 꾸준히 고민해온 계간지의 태도가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주었다. 이번 호에서는 말의 힘과 쓰임, 책임을 사유하는 글들이 중심을 이룬다. 특히 머리글에서는 2024년 겨울, 한 사건을 둘러싼 감정과 시간을 되짚으며 ‘말’이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남긴 무게를 조명한다.

‘크리티카’ 코너에서는 유승민 인지언어 연구가의 「광장의 언어가 우리에게 남긴 감각」이 인상 깊었다. “2024년 12월 6일, 지구 반대편에서 한강 작가의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었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글은, 독자로 하여금 단순한 해석을 넘어 당시를 감각적으로 복원했다.

시 부문에서는 장혜령 시인의 「말하는 여자」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포르노그래피 복제 시대의 서정시」와의 서사적 연속성을 통해 시 안에서 ‘여자’라는 존재를 다시 불러내는 구조가 강렬했고, 이미지의 전복이 남긴 감각도 오래 남는다. 또, 김홍중의 에세이 「로셀리니와 시몬 베유」는 촘촘한 주석 속에서 깊은 사유의 흐름을 따라가게 만든다.

새롭게 바뀐 표지 디자인 역시 눈길을 끈다. 예전의 ‘목차형’ 표지에서 벗어나, 미술 잡지를 연상시키는 시각적 실험은 이번 호가 지닌 정체성과도 닿아 있다. 이처럼 『자음과모음』은 여전히 문학의 경계를 실험하고 확장하며, 독자에게 사유와 감각의 입구를 제시하고 있다. 오랜만에 신청한 서평단이었지만, 책값 이상의 감동을 얻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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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트리플 28
김남숙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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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파주」를 읽으면 모두가 똑같이 가질 의문 한 가지가 있다. ‘나'는 왜 여전히 정호와 함께하는가?
정호가 군대에서 현철을 괴롭힌 악랄한 방식들, '나'에게 쓰는 말투나 말버릇 등을 보면 언젠가는 '나'를 해칠 수도 있을 것 처럼 보인다. 심지어 현철은 소설 속에서 '나'에게 결혼할 거냐는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화자가 그에게서 떠나는 것을 두려워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이 답을 찾지 못한다면, 답을 찾지 않아도 화자는 결국 또하나의 가해자처럼 보인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 의문에 대해 이야기하고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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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사라진 정오 NEON SIGN 8
김동하 지음 / 네오픽션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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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동안 거의 단편소설만 읽어서 오랜만에 짜임새 있는 장편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그렇게 읽게 된 소설 『그림자가 사라진 정오』라는 소설은 내가 바라던 소설 그 자체였다. 작가 소개의 말 처럼 일종의 서스펜스를 가지고 시작되는 소설은 사람들이 그림자를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사건을 주인공이 알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최근에 본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내용이 생각났는데, 인사이드 아웃1의 내용을 간략히 설명해보자면, 시즌1은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감정 컨트롤 본부에서 불철주야 열심히 일하는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 다섯 감정들이 이사 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라일리’를 위해 그 어느 때 보다 바쁘게 감정의 신호를 보내지만 우연한 실수로 ‘기쁨’과 ‘슬픔’이 본부를 이탈하게 되자 '라일리’의 마음 속에 큰 변화가 찾아온다는 내용을 다룬다. 해당 시즌에서 슬픔이가 본부를 이탈하는 사건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컨트롤 할 때 슬픔이 없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주변 인물과의 관계, 본인의 성장 등)를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그림자가 사라진 정오』도 마찬가지인데, 슬픔이 없는 인간의 행동을 대화 형식으로 잘 표현한 소설 덕분에 세상이 얼마나 망가지는지를 현실적으로 잘 확인한 것 같다.

나도 가끔 슬픔이라는 감정이 없기를 바란다. 우울해서 눈물이 끊이지 않는 날이면 다채로운 감정의 존재를 원망하곤 한다. 하지만 슬픔 없이 우리는 넘어질 수 없다는 걸, 일어날 수 없다는 걸 이 소설을 통해 알았다. 우리에게 필요 없는 슬픔과 그림자는 없다. 그림자는 나 자신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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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통과하는 빛과 같이 트리플 25
서이제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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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의 서평에서 서이제의 소설이 단단한 단편영화 같다고 한 말을 봤는데, 매우 공감한다.

단편 영화들은 대개 짧은 시간에 하고자 하는 말이나 보여주고 싶은 장면을 담아내야 하기 때문에 창작자의 목소리가 크게 들릴 수 밖에 없다. 서이제의 소설도 정말 손쉽게 현실과 허구를 허물어 그 안에 내용을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첫번째에 수록된 단편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윤 감독의 취지가 '한 인물에 대한 사랑으로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 계속 마음에 남았다. ‘나’가 어느 부분에서 사랑을 느꼈는지는 모르지만, 사랑을 느껴야 한다는 영화의 취지에 의식하여 감정이 생기게 된 건지… 현실과 허구가 쉴새없이 교차되며 결국 온전한 허구란 영화에 존재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 감독이나 작가가 만드는 작품의 인물들은 오로지 신과 같은 창작자에게 창조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창작자는 부모 정도에 그치고 아이와 같은 인물들의 세세한 감정과 움직임을 다 알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성별에 크게 초점 두지 않았다는 것도 좋았다. 이 소설에서는 사랑으로 엮인 현실과 허구라는 커다란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퀴어이든 이성애든 성별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방향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마무리가 영화의 도입부처럼 느껴지는 것도 좋았는데, 완벽히 열린 결말이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오랜만에 만난 세연과 수민은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너무나 먼 화면에서 창문 너머로, 카페 안으로, 천천히 가까워질 둘의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계속 이어나가게 된다. 시공간을 허물고 현실이 된 것 처럼 자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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