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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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어떤 소설들은 내가 사는 삶보다 더 느리게 흐른다. 매일 반복적이고 비슷한 일정으로 돌아가는 삶은 생각보다 빠르게 흐르고, 낯선 장소와 인물과 사건들이 많으면 단 하루라도 상대적으로 길게 느껴지는 또 다른 삶의 시간 때문일 것이다. <펠리시아의 여정>이 내게 그런 시간을 느끼게 해줬다. 감정은 폭풍처럼 몰아치지만, 긴 호흡으로 흘러가는 여정에 나또한 펠리시아가 되어 그녀의 삶의 흐르는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긴 여정을 시작하기 전 펠리시아는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에 사는 순수한 소녀였다. 비록 당장 일자리를 잃었고, 별다른 기술이 없어 재취업도 힘들고, 얼굴도 그다지 예쁘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니, 사실 그녀는 볼품없었다. 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기에 그 사랑에 이끌려 오게 된 낯선 도시에서 아이 아빠를 찾으려는 무모한 시도를 감행할 정도로 똑똑하지도 않았다. 주소도 모른채, 단지 잔디깎이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창고 관리자로 일한다는 말만 듣고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진다는 그 순수한 사고체계에 어이없는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녀가 사랑을 찾으려는 무모한 여정에 오르게 된 이유가 주변에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p92) 아버지는 그런 딸에게 창녀라고 하고 모든 것을 고백하고 도움을 청한 퍼리에게는 꺼지라는 말만 듣는다. 차오르는 눈물에 흐느껴 우는 그녀를 보고 그때부터 그녀의 한심하지만 순수함에 연민을 가지게 됐다.

 


그나마 있는 그녀의 매력인 순수함은 여정 중에 철저하게 그녀를 위험으로 몰아 넣는다. 착하고 선한 것이 곧 약함이 되는 세상에서 그녀는 많은 군상들의 사냥감이 되기에 충분해 보였다. 교활하고 사기꾼 같은 남자에게 잘못 걸려 임신까지 한 펠리시아는 혼자 있는 젊은 여자만 노리는 용의주도하며 망상적 정신이상에 빠진 힐디치의 레이더에 걸리게 된다.


 

처음엔 펠리시아가 걱정되어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빨라지다가 끔찍했던 힐디치의 허망한 결말을 보니 우울함 뒤에 있는 그의 고통이 느껴져 악당의 소멸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나는 소설속 여러 인물들을 보며 선과 악에 대한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도 느꼈다. 싸이코 같은 힐디치도 결국 살아가기 위한 자기방어에서 나온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도 처음엔 펠리시아처럼 순수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삶의 이면에 휘둘려 상처가 치유되지 못하고 곪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남아있는 시간을 살아내기 위해 발버둥친것일뿐...물론 그의 나쁜 영향이 이걸로 정당화 될 수는 없을지라도 악해 보이는 힐디치에게도 연민의 감정을 둘 수 있는걸 보여줬다.


 

여정 끝에 펠리시아는 더 이상 예전의 자신이 아니다. 힐디치와의 사건 이후 계속되는 여정 동안 구걸도 하지 않는다. 순수함은 퇴색되고 그 자리에 피로함과 의외의 편안함이 보인다. 소설 속 그녀의 여정은 계속되지만 결국 밑바닥 인생을 걸어가는 펠리시아를 볼 수 있다. 다만, 다행인 점은 그녀가 더 이상 불안하거나 위태로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위장한 친절함이 아닌, 진실한 선한 손길이 그녀에게 닿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삶의 두가지 면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펠리시아뿐 아니라 힐디치를 포함해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통해 삶의 거칠고 신랄한 이면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은 어떤 삶이 와서 휘몰아치면 그저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그 씁쓸한 무력함이 펠리시아의 여정에 함께하며 처절하게 느껴진다. , 그 폭풍의 한 가운데서 충격과 공포와 무력감을 그저 느끼고 목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삶에 해당된다. 그래서 이야기 속에서 흐르는 거의 대부분의 감정이 독자인 나에게 크게 이입되어 묵직하고 짙은 공감으로 다가온다.


 

두번째는 그 모든게 지나간 후 진실되고 선한 손길이 다가온다. 바로 삶의 따뜻한 면이다. 소외되고 상처 입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손길들이다. 소외되고 상처 입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손길들이다. 작가는 살아가는 것들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빠짐없이 담았다. 삶의 모든 시선과 감정들이 소설을 통해 관통되는 느낌이다. 특히 인물들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 볼 때 더욱 더 내가 살고 있는 삶과도 밀착되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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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시선 - 개정판
이승우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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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승우 작가의 <생의 이면>에서 소설에 담은 그의 종교적 사유를 보고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읽어내려갔던 것 같다. 이 책은 2009년 출간됐던 <한 낮의 시선> 개정판이다. 길지 않은 이 소설은 참 많은 것을 섬세하게 담아 놓았다. 특히 내면의 사유를 아주 예민하게 따라가는 표현이 한 인물에게 참 깊이도 들어간다라는 감탄이 신음처럼 흘러나오게 했다.

시선을 외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내면에 두고 아주 세밀하고 예민하게 투영하고 있다. 때문에 독자인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소설의 풍경이 아니라 주인공인 그의 내부이다.

주인공은 결핵으로 요양을 떠난다. 우연히 마주친 옆집에 노교수가 던진 아버지와 관련된 질문에 스물아홉 해 동안 없이도 충분히 풍족하게 살았던 그의 내면에 파문이 인다. 노교수의 말이 인상적이다.

"어떤 경우에도 부정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아버지야말로 그런 존재지. 죽기 전에는 없어질 수 없다는 뜻이야. 어떤 경우에는 죽어서도, 죽은 채로 있는 게 아버지지."

"그렇다면 그 아버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한 거네, 젊은이의 의식 속에서 말이야, 라는 말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34p

결핍감을 느낄 기회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어머니의 품에서 자란 그는 갑자기 자기 마음 속에서 죽음을 당한지도 몰랐던 아버지의 존재를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다. 사실 그는 자라면서 무의식적으로 의식한 시선이 있었다. 그 낯익은-낯선시선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

노교수가 던진 말과 그 말 이후로 갑자기 아버지를 찾아나선 주인공의 내면을 따라가며 아버지과 아들에 관계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굳이 지금 아버지가 필요한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찾아나서는가. 여기서 노교수의 의미심장한 말을 또 떠올리게 된다.

"때로는 자기가 무얼 찾는지, 왜 추구하는지도 모른 채 찾고 추구하지. 몽유병 환자처럼 말이야. 찾다가 못 찾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추구가 의미 없는 건 아니지."

56p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스스로의 뿌리를 찾는데 집착하는 것 같다. 여기 내가 왜 존재하는지, 무엇을 위해 있는지. 이런 생각을 살다보면 안 할 수가 없는데 그에 대한 답을 찾다보면 뿌리를 확인하려 들 수 밖에 없게 된다. 존재와 영혼의 뿌리. 나의 존재와 가장 가까운 부모를 확인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주인공도 별다른 필요가 없어도 왜 찾고 추구하는지도 모른채 본능적으로 아버지를 찾게 된게 아닌가 싶다.

이제 그는 그전에 아늑했던 것처럼 아늑하지 않다. 모퉁이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했으므로. 하지만 아버지를 찾아 드디어 대면했을때, 그는 아버지로부터 철저하게 부정당한다. 그는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로부터 존재의 뿌리를 찾고 뭔가를 확인하고 싶어하지만 아버지의 완고한 부정으로 인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린다. 아버지는 아들을 부정하기를 원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강요하기까지 했다.

나는 이쯤에서 아들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아예 없는 것보다 폭군이라도 곁에 있는 아버지가 낫단 말인가.

폭군-보호자의 괴롭힘보다 그의 부재가 더 견디기 힘들었을 정황이 어렴풋이 이해되었다. 두렵고 불안한 '있음'보다 두렵지고 않고 불안하지도 않은 '없음'이 더 두렵고 더 불안했을 것이다.

190p

소설 앞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며 [말테의 수기] 첫 문장을 인용한다. "도대체 나는 그곳에 살려고 가는 것일까, 죽으려고 가는 것일까." 책을 덮고 나서 드는 생각은 둘 다 인 것 같다. 아버지의 완고한 부정으로 아들의 존재는 한 번 죽는다. 하지만 마지막에 아버지의 세계였던 인구 3만의 변방도시를 벗어나며 그는 그 모든 것을 통과하여 내면의 찌꺼기들을 비워내 개운해 보인다.

어찌보면 주인공을 통해 의식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본 것 같았다. 작가는 단순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안에서만 소설을 구상한 것은 아닐텐데, 그 이상은 내가 이해하고 그려보기 부족한 것 같다. 다만, 존재와 시선에 대해 깊게 사유해 보게 해줬다.

꼭 부모의 존재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누군가의 시선을 항상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그게 부모일 수도 있고 초월적인 신일 수도 있고, 부러워하는 대상일 수 도 있고, 미워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 시선에 갇혀 평생을 살 수 도 있고, 아니면 그것을 뛰어 넘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시선을 즐길 수도 있고, 그 시선에 괴로워 할 수도 있다. 그럼 나는 어떤 시선을 느끼며 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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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고 더운 우리 집
공선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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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공선옥의 산문집이다. 요즘 관심을 갖고 읽어보고 있는 김신회 작가님의 추천사로 이 책을 알게 됐다.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여러 일과 부딪히며 여기저기 세상을 떠돌며 머물렀던 집들을 얘기한다. 혼자일 땐 나혼자, 식구들이 생겼을 때는 집단으로 떠돌며 작가가 살아온 삶과 그 집에 대해서 말한다.

초가집과 부로꾸집, 식당 방, 기숙사 방, 임대 아파트등 여러 집을 통과해오면서 그녀의 인생도 책에 풀어놨다. 그녀가 거처온 집들은 좋은 집은 아니지만 나중에 그녀만의 집을 짓기 위한 동기가 되 주었고 힘들던 좋던 그녀가 살아온 흔적들을 담아두는 옹기가 됐다.

좋지 않은 집이기에, 불편하기에 작가는 아침부터 일어나 아궁이에 물을 푸며 책을 읽었다. 부끄럽고 불편한 집이었지만 그럼으로 지금의 자신이 만들어진 것이다.


작가의 집과 연결된 인생을 읽고 나자 내가 생각하는 집에 대한 생각도 풀고 싶어진다. 나의 학창시절은 짐싸고 풀고의 반복이었다. 아버지가 은행원으로 해마다 떨어지는 발령 때문에 일년에 한번은 꼭 이사를 다녔다. 때가 안맞아서 3개월이나 5개월 정도만 머물다 떠난 집도 있었다. 그 시기의 집을 떠올리면 수많은 집이 생각나지만 곧 아무것도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게 된다. 잦은 이사로 또래친구는 당연히 만들기 힘들었고 지금도 초등학교랑 중학교 동창들은 기억이 희미하다.

이 때부터 집에 대한 생각이 내 안에 자라게 됐다. 부모님도 힘드셨겠지만 이유도 모른채 뿌리없이 떠도니 이사가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너무 화가 났다. 그래서 대학교를 들어가자마자 용돈이든 알바든 수중에 들어오는 모든 돈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나중에 결혼할 때 남편과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 장만하려고. '결혼하는 순간부터 이제 내 인생에 이사는 없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또 쉽지 않았다. 아파트 매매가는 생각보다 벽이 너무 높았고 부자가 아니었던 우리들은 일단 전세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첫째가 태어나고 다시 이사를 생각해야할때쯤 정신이 갑자기 번쩍들며 미친듯이 땅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게 돈으로 결론이 나버려 낙담을 계속하는 시기가 길어졌다. 그래도 간절함이 어떻게든 형태를 만들어 친정 부모님의 도움으로 함께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때 인건비 아낄려고 남편이랑 둘이 밤새도록 눈물의 단열재 깔고 한 여름에 열심히 인부들 간식 챙기고 그런 아등바등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드디어 입주한날. 그 첫날은 잠도 안자고 처음으로 이사와 기쁨으로 짐을 풀고 정리했다.

그리고 벌써 5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둘째가 태어나고 여러가지 보수공사와 말썽도 있었지만 별탈없이 잘 지내고 있다. 집을 다 지으면 끝인줄 알았는데 살면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추가 공사에 목돈 끌어다 쓰느라 경제적인 압박으로 머리가 아팠다. 괜히 했나 싶어 이년정도는 후회도 가끔했던것 같다. 하지만 작가의 말처럼 손을 볼수록 그 미운정이 고운정이 되어 버렸다. 더이상 내 집은 돈 먹는 집이 아니라 내 삶을 담는 따뜻하고 고마운 집이 됐다.

나 역시 많은 이사를 해보았고 결국 작가처럼 땅을 사고 집을 지어 정말 나 다운 삶을 사는데 조금 더 가까워졌다. 일층과 계단, 이층 그리고 마당까지 공간이 입체적으로 확장됐고 거기에 아이들의 성장과 추억이 시간과 함께 조금씩 묻어가고 나와 남편 친정부모님이 노력해서 사브작 사브작 손길을 주니 고급스러운 저택은 아니지만 나와 내 가족의 뿌리가 땅속 깊이 내리 자람이 한해 한해 느껴진다. '정말 이런게 진짜 집인거지.' 하는 생각. 집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아주 사적인고 내밀한 것으로 이루어져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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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속한 것
가스 그린웰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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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화 되기 쉬운 인간의 감정이 수백 수만가지의 갈래로 뻗어나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소설.' 이라는 박상영 소설가의 추천사를 보고 이 소설이 읽어보고 싶어졌다.

'나에게 속한 것'도 아닌 <너에게 속한 것>은 무엇일까. 감정이 풍부하게 잘 표현된 퀴어 소설이라고 한 문장으로 평가하기에는 아쉬운 작품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사랑이야기인데, 이 소설은 특별하게도 미트코와 서술자인 나의 관계를 통해 부딪히고 흘러가는 이야기속에서 사랑이 가진 모든 감정의 결을 느낄 수 있었다.

불가리아 소피아의 유명한 학교의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는 '나'. 주변 지인과 학교에도 처음부터 자신이 게이라고 밝히고 들어올만큼 자신의 자아와 정체성을 잘 파악하고 있는 듯한 주인공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미트코라는 천진한 소년 같은 남자와 화장실에서 성거래를 한다. 하지만 거래는 미트코의 배신으로 충분히 성사되지 않았고 오히려 '나'는 이 일로 미트코를 더욱 갈망하게 된다.

점점 '나'는 미트코를 찾고 부르고 욕망을 채우고 싶어한다. 그 과정에서 보여지는 미트코의 반응들은 오로지 대가(돈과 선물) 같다. 이 둘의 관계는 미트코를 바라보면 거래였고, '나'를 통해 바라보면 사랑 같았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돈을 주는 사람이고 더 많이 가진듯한 '나'가 관계의 우위에 있어 보이지만 언제나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가 되듯 매번 원하는 걸 얻는 사람은 미트코가 되었다.

소설의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번째는 미트코와의 만남, 두번째는 지금의 '나'가 완성된 유년시절 아버지와의 관계와 친구 K에게서 받은 상처, 세번째는 마치 금기된 사랑을 한 벌로 매독이란 질병에 걸린 미트코와 '나'의 이야기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표현한 부분이다. 친아버지는 아들이 게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그에게 역겹다는 말을 하고, 알았다면 절대 태어나지 못하게 했을거라고 비난한다.그때 아버지가 보인 시선은 '나'를 파고들어 한번도 떠나지 않는다. 이것은 스스로를 바라보는 눈이 되고 기억 아래 뿌리를 내렸으며 자신을 이해하고 예측하는 방식으로 고정되버린다. 가장 이해받고 싶었던 부모와 처음 사랑을 느꼈던 친구 K의 배신으로 받은 유년의 상처들은 그가 최초로 연결한 그 사랑의 감정을 모두 끊어버리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그때 '나'는 자신의 일부를 잃어버린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장의 제목이 '무덤'인 것이 너무나도 잘 어울려 안타깝운 마음이 들었다.

결국 미트코를 통해 '나'는 매독이라는 성병에 걸린다. 매독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진료를 보는 내용이 마지막 부분의 주된 얘기인데, 그 과정에서 세상적인 기준에서 느낄 수 있는 질타와 부정적인 시선이 자주 느껴져 불편해진다. 검사하는 와중에 느낄 수 있는 모든 수치심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스스로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행위들이 이런 수치심과 모욕으로 돌아와야 하는지 나 같으면 분노가 일었을 것이다. 성소수자라고해서, 대상이 가장 밑바닥에서 구원될 수 없는 미트코와 같은 비주류라서 그런 것인지... 이런 수치심과 모욕이라는 감정들은 왠지 '나' 스스로의 존재 자체도 부당하고 세상에서 배제되야할 존재로 낙인 찍히는 것 같았다.

사랑에는 수 많은 결이 있다. 그리고 어떤게 더 아름답고 고귀한 사랑이라고 평가할 수도 없고 그런 기준자체도 옳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미트코와 '나'와 있었던 거래도 사랑의 한 부분이라고도 생각한다. 또 후에 '나'가 미트코에게 연민을 가지는 것도 사랑의 한 부분이라고도 생각한다. 사랑의 폭은 이렇게 넓고 다양한데 혐오스럽고 더럽다는 기울어진 사고로 사랑의 범위에서 그것을 배제하는데 그것은 삶의 한 부분만을 보고 살아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사랑 안에는 그 만큼 많은 사람의 삶이 겹쳐 있고 그 감정의 결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에 함부로 그 사랑의 형태와 정체성을 판단하는건 매우 위험하고 잔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는 소설이었다. 주류집단의 사랑이라고 해서 아름답고, 소수집단이라고 해서 혐오스러운 감정이 드는 것이야 말로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이라는 생각도 함께 든다. 사랑은 너무나 개인적이고도 그 자체만으로도 배려받고 존중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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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의 기쁨과 슬픔 - 너무 열심인 ‘나’를 위한 애쓰기의 기술
올리비에 푸리올 지음, 조윤진 옮김 / 다른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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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쓴 올리비에 푸리올은 철학자이자 소설가고 에세이스트, 강연자다. 또한 단편영화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겸 편집자다. 저자의 얼굴이 참 다양하다. 이렇게 일에 있어서 경계가 없고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람들의 사고는 공통적으로 자유롭고 직관적인 듯하다. 내가 가지기 힘들었던 사고의 유형이라서 이런 사람들의 말이나 글들은 항상 내게 흥미롭고 내 사유를 고무 시킨다.

저자는 노력하기 위해 일부러 애쓰지 말라고 한다. 이상하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노력해도 살아남기 힘든 사회 분위기에 정반대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모든 노력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때로 노력은 비생산적이고 스스로를 더 가두는 무용한 가치 행위' 라고 얘기하고 싶은 것 같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이라는 프레임 안에 자신을 넣고 닦달한 들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몸에 긴장과 힘을 좀 빼고 여유와 느긋함을 곁들여 제대로 된 집중의 기술을 이용해 인생의 중요한 것에 몰두하라고 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정확하게 공감하고 깨달은 점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시작이라는 부담에 대한 위로, 또 하나는 제대로 집중하는 방법.



□ 시작하기

"모든 것은 이미 시작 되었고, 우리는 계속 하기만 하면 된다. 다음 행보가 어떻든 지금 자신의 위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미래를 위한 결단들은 전부 가상의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되 조금씩 나아지기만 하면 된다."

26-27p


항상 무언가를 시작할 때 시작도 전에 결과에 대한 부담을 갖는다. 내가 이것을 이뤄내기 위해 얼만큼의 노력이 필요한지 가늠해 보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절실히 깨닫는다. 이미 태어나서부터 나는 뭔가를 항상 시작하고 있었고 또 계속 하고 있었다. 의식하지 못했을 뿐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이미 시작하고 유지하며 결국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큰 위로를 받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되 조금씩 나아지기만 하면 된다."라는 말에는 희망을 보았다. 육아를 시작한 이후로 아무것도 노력하고 성취하지 않는 나의 나태함에 한심함을 느껴 계속해서 눈에 바로 보여지는 새로운 성취를 찾아 다녔다. 사실 이런 행위보다 이미 시작되고 진행되고 있는 것들을 조금 더 나아지도록 개선하는 게 더 빠른 결과물을 볼 수 도 있는데 사유가 부족했던건지 마음이 조급했던건지 이 글을 읽고 다시 생각을 다 잡게 됐다.




□ 집중의 비법

집중이란, 우리가 반드시 타는 법을 익혀야 하는 파도다.

244p


그렇다면 내면의 평화를 찾고 순간을 음미하는 상태에서 진짜 기회가 왔을 때 어떻게 하면 제대로 집중할 수 있을까. 이 챕터에서 나온 데카르트의 방법을 읽으며 내가 문제를 맞닥드렸을 때 가졌던 가장 큰 오류를 확인했다. 데카르트의 방법은 1.명백함 2.분배 3.정렬 4.열거 네 가지의 길을 따라가는 규칙을 알려준다. 그 중에 문제가 복잡할 수록 한번에 완벽히 숙지하려고 하는 나의 단점을 깨달았다. 이것이 사실 지금까지 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힘든 노력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빠른 정보를 접할 수는 있어도 스스로를 문제에 대한 긴장과 압박으로 몰아넣고 벌을 주고 있었고 실제로 나중으로 갈수록 놓치는 이해들도 많게 됐다. 전체적으로 보면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방법이었고, 무엇보다 금방 지쳐갔다.


데카르트는 문제가 복잡할수록 분배하라고 한다.

복잡성을 결코 단번에 해결하려 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하거나 곧바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생각을 버리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처음에는 너무나 거대하게만 보이는 것을 해체하여 최대한 작은 부분으로 나누어야 한다.

274p


어려움을 잘게 나누어 난이도에 따라 정렬하면, "천천히, 점진적으로 진보하게 된다." 고 말한다. 마치 계단을 오르는 일처럼 문제를 다 쪼개놓고 가장 이해하기 만만한것부터 차근차근 파고들면 어떤 방법보다 정확하고 깊이 있는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방법은 집중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집중의 정의는 뭘까. 진정한 집중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책에서는 진정한 집중력은 노력하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나온다고 한다. 예를 들면 선생님이 '자, 이제 그만 떠들고 집중합시다." 하고 시작하면 진심으로 집중에 몰입하는 학생이 몇이나 될까. 모두가 경험해 봤을 테지만 진정한 집중은 내가 지금 집중하는지 모르는 상태일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지도 옆에 누가 지나갔는지도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몰두. 이게 진정한 집중력인 것이다. 이 부분에서 많은 성공과 성취는 노력에만 달려 있지 않고 순수한 본연의 것, 공기를 마시듯 자연스럽게 그 상황에 몸을 맡기고 문제를 해결하는 직과과 유연성에 더 큰 비중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사실 프랑스 철학자가 프랑스식 수월함을 내세워 빨리빨리와 노력을 강요하는 한국인인 나에게 보편적이면서 적절한 설득을 할 수 있을까 좀 우려했다. 하지만 책 속에서 철학, 스포츠, 음악, 문학, 외줄타기 등의 다양한 인용과 비유를 사용하며 주장하니 자연스럽게 내가 보지 못했던 어떤 신비한 영역과 기술을 발견한듯 했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어디에 귀속되고 특정되지도 않고, 이미 정해진 한계점에서 쓸데없는 노력 같은 것도 하지 말고, 긴장된 몸을 이완시키고 충분한 휴식을 통해 에너지를 길어올리고, 전전긍긍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때가 왔을때 제대로 집중할 수 있는 유연한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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