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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시아의 여정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평점 :
가끔 어떤 소설들은 내가 사는 삶보다 더 느리게 흐른다. 매일 반복적이고 비슷한 일정으로 돌아가는 삶은 생각보다 빠르게 흐르고, 낯선 장소와 인물과 사건들이 많으면 단 하루라도 상대적으로 길게 느껴지는 또 다른 삶의 시간 때문일 것이다. <펠리시아의 여정>이 내게 그런 시간을 느끼게 해줬다. 감정은 폭풍처럼 몰아치지만, 긴 호흡으로 흘러가는 여정에 나또한 펠리시아가 되어 그녀의 삶의 흐르는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긴 여정을 시작하기 전 펠리시아는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에 사는 순수한 소녀였다. 비록 당장 일자리를 잃었고, 별다른 기술이 없어 재취업도 힘들고, 얼굴도 그다지 예쁘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니, 사실 그녀는 볼품없었다. 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기에 그 사랑에 이끌려 오게 된 낯선 도시에서 아이 아빠를 찾으려는 무모한 시도를 감행할 정도로 똑똑하지도 않았다. 주소도 모른채, 단지 잔디깎이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창고 관리자로 일한다는 말만 듣고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진다는 그 순수한 사고체계에 어이없는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녀가 사랑을 찾으려는 무모한 여정에 오르게 된 이유가 주변에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p92) 아버지는 그런 딸에게 창녀라고 하고 모든 것을 고백하고 도움을 청한 퍼리에게는 꺼지라는 말만 듣는다. 차오르는 눈물에 흐느껴 우는 그녀를 보고 그때부터 그녀의 한심하지만 순수함에 연민을 가지게 됐다.
그나마 있는 그녀의 매력인 순수함은 여정 중에 철저하게 그녀를 위험으로 몰아 넣는다. 착하고 선한 것이 곧 약함이 되는 세상에서 그녀는 많은 군상들의 사냥감이 되기에 충분해 보였다. 교활하고 사기꾼 같은 남자에게 잘못 걸려 임신까지 한 펠리시아는 혼자 있는 젊은 여자만 노리는 용의주도하며 망상적 정신이상에 빠진 힐디치의 레이더에 걸리게 된다.
처음엔 펠리시아가 걱정되어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빨라지다가 끔찍했던 힐디치의 허망한 결말을 보니 우울함 뒤에 있는 그의 고통이 느껴져 악당의 소멸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나는 소설속 여러 인물들을 보며 선과 악에 대한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도 느꼈다. 싸이코 같은 힐디치도 결국 살아가기 위한 자기방어에서 나온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도 처음엔 펠리시아처럼 순수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삶의 이면에 휘둘려 상처가 치유되지 못하고 곪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남아있는 시간을 살아내기 위해 발버둥친것일뿐...물론 그의 나쁜 영향이 이걸로 정당화 될 수는 없을지라도 악해 보이는 힐디치에게도 연민의 감정을 둘 수 있는걸 보여줬다.
여정 끝에 펠리시아는 더 이상 예전의 자신이 아니다. 힐디치와의 사건 이후 계속되는 여정 동안 구걸도 하지 않는다. 순수함은 퇴색되고 그 자리에 피로함과 의외의 편안함이 보인다. 소설 속 그녀의 여정은 계속되지만 결국 밑바닥 인생을 걸어가는 펠리시아를 볼 수 있다. 다만, 다행인 점은 그녀가 더 이상 불안하거나 위태로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위장한 친절함이 아닌, 진실한 선한 손길이 그녀에게 닿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삶의 두가지 면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펠리시아뿐 아니라 힐디치를 포함해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통해 삶의 거칠고 신랄한 이면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은 어떤 삶이 와서 휘몰아치면 그저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그 씁쓸한 무력함이 펠리시아의 여정에 함께하며 처절하게 느껴진다. 즉, 그 폭풍의 한 가운데서 충격과 공포와 무력감을 그저 느끼고 목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삶에 해당된다. 그래서 이야기 속에서 흐르는 거의 대부분의 감정이 독자인 나에게 크게 이입되어 묵직하고 짙은 공감으로 다가온다.
두번째는 그 모든게 지나간 후 진실되고 선한 손길이 다가온다. 바로 삶의 따뜻한 면이다. 소외되고 상처 입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손길들이다. 소외되고 상처 입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손길들이다. 작가는 살아가는 것들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빠짐없이 담았다. 삶의 모든 시선과 감정들이 소설을 통해 관통되는 느낌이다. 특히 인물들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 볼 때 더욱 더 내가 살고 있는 삶과도 밀착되는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