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사생아들 : 레프 톨스토이 x 오귀스트 르누아르 ㅣ 세계문화전집 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외 지음, 홍선기 엮음 / 모티브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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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 푹 빠진 요즘입니다. 

고전 큐레이션 북이 여느 때보다 눈에 많이 띄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이번에 읽은 모티브 출판사의 거장의 사생아들은 레프 톨스토이의 <주인과 일꾼>, <악마>, <크로체르 소나타>와 르누아르의 그림을 한꺼번에 볼 수 있어 더욱 매력적인 책이었습니다. 

책도 양장본이라 너무 이뻤는데요.  화사한 르누아르 그림까지 더해지니 책의 가치가 더욱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은 사생아 아들을 철저히 외면했고,

한 사람은 사생아 딸을 끝까지 책임졌다.

157p

무슨 이야기일까요?

바로 이 큐레이션의 두 주인공 톨스토이와 르누아르의 이야기입니다. 

톨스토이는 평생 내면을 들여다보고 정직함을 신조로 삼았던 문학의 거장입니다. 그런데 그는 결혼 전 농민 여인 아크시냐와의 사이에서 티모페이라는 아들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평생 그를 챙겨본 적 없으며 티모페이는 톨스토이의 아들들 집에서 마부와 하인 노릇을 하며 평생을 살다 죽었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철저히 외면받고 완벽히 버려진 자식이었지요. 

​

반면 르누아르는 달랐습니다. 르누아르는 연인이자 모델이었던 리즈와의 사이에서 딸 잔이 태어났지만 당시 경제적 어려움으로 위탁가정으로 보냈습니다. 결혼 후 그는 딸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평생 경제적 서포트를 하였고 딸이 결혼할 때에도 지참금을 보내고 빵집이 달린 집을 사주고 죽기 직전에는 연금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사생아 딸을 책임졌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인데요. 

​

이번 큐레이션의 작가인 홍선기 님은 이를 그리 단순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톨스토이의 문학작품에서 그의 인간적인 후회와 연민을 찾아내었는데요. 그 작품이 바로 자신과 티모페이를 모델로 한 주인과 일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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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과 일꾼 

주인과 일꾼은 어느 겨울날, 성공한 삶을 살아왔던 주인인 바실리가 오랫동안 흥정했던 숲을 사기 위해 옆 마을로 마부 니키타와 함께 떠나며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속물의 최고봉인 바실리는 니키타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인간이었습니다. 

​

"자기처럼 대단하고 영리한 사람과 이야기 나누는 일이 니키타에게 영광스럽기 짝이 없을 거라 굳게 믿었고, 자기 농담에 어찌나 흡족해했는지, 애초 이 대화가 니키타에게 거북할 수 있다는 생각은 머리에 떠올려 보지도 않았다."_62p

​

"자기 삶의 유일한 목표이자 의미이자 기쁨이자 그것- 그동안 자기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고 또 얼마나 벌 수 있는지, 자기가 아는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벌었고 또 얼마를 지니고 있는지, 그들이 어떻게 돈을 벌어 왔고 또 벌고 있는지, 그래서 자기도 그들처럼 어떻게 하면 아주 많은 돈을 더 벌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이었다."_108p

​

바실리의 욕심으로 눈보라가 치던 날 밤 그들은 길을 잃고 산속에서 밤을 지새우게 됩니다. 

하지만 바실리는 마지막에 달라집니다.

눈 속에서 죽어가던 마부 니키타를 발견하고 그를 자신의 온기로 데우고 대신 자신이 죽어갑니다. 

마지막 죽어가면서 그는 생각하죠. 

​

"그는 이것이 죽음임을 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조금도 슬퍼지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밑에 니키타가 누워 있음을, 그가 따뜻해졌으며 살아 있음을 떠올린다. 그리고 자기가-니키타라는 생각이, 니키타가-자기라는 생각이, 자기 목숨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니키타 안에 있다는 생각이 그에게 떠오른다. 

'니키타가 살았으면, 그러면, 나도 살아 있는 것이지.'

​

여러분도 톨스토이의 후회와 연민이 느껴지시나요? 

​

반면 <악마>는 완벽한 아내를 두고도 농지의 여성에게 끌렸던 자신의 젊은 날의 모습을 주인공인 에브게니에게 투영시킨 소설입니다. 악마는 두 갈래의 결말이 그려졌는데요. 

하나는 에브게니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것, 또 하나는 유혹의 대상이었던 농노 여성인 스테파니다를 살해하는 것이었다 합니다. 

​

"에브게니 이르테네프가 정신병자였다면,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정신병자다. 가장 심한 정신병자란, 자기 안에 있는 건 못 보면서 남에게만 광기의 징후를 보는 자들임이 분명하다."_271p

​

실제 톨스토이의 부인이었던 소피아는 평생 그를 위해 삶을 희생했고, 악필이었던 톨스토이를 대신해  전쟁과 평화를 일곱 번이나 써주었던 내조의 여왕이었습니다. 

말년에 톨스토이가 자신의 재산과 모든 지적 재산권을 농민과 사회에 내놓으려 하자 소피아와 갈등이 깊어졌고,  결국 집을 떠나 수녀원으로 떠나던 중 폐렴에 걸려 간이역에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

인간적으로 아쉬운 부분이지요. 

평생을 희생하고 살았던 부인은 외면하고, 사생아였던 티모페이는 평생을 외면했던 톨스토이를 과연 인류의 고귀한 문학가로 지칭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작가가 찾아낸 희망을 들여다본다면 그에게 약간의 면죄부를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톨스토이의 마음은 알 수 없겠지만 농민에게 모든 재산과 지적 재산권을 남기고자 했던 건 아마도 아들들의 마부로 전전했던 첫 아들인 티모페이를 향한 미안함에서 비롯되었던 건 아닐까 하는 거죠.

실제 톨스토이는 영지에서 농민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고 하니까요. 

​

두 거장의 숨은 이야기로 흥미를 끌어올리고, 이와 연계되는 톨스토이의 그늘 3부작을 읽으며 르누아르의 그림까지 볼 수 있었던 일석이조의 거장의 사생아들이었습니다. 

그림과 고전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

#거장의사생아들 #모티브출판사 #톨스토이단편 #주인과일꾼 #톨스토이 #르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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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읽는 오디세이 -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 <오디세이> 원작
호메로스 지음, 은상 엮음 / 빚은책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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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영화 오디세이를 보기 전 짧게 볼 수 있는 <한눈에 읽는 오디세이>를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사심가득 벽돌책 독서모임에서는 한 달에 한 권씩 벽돌책을 읽고 있는데, 마침 다음 달 도서가 바로 오뒷세이아 입니다. 작년에 일리아스와 이윤기의 그리스로마신화를 읽었던 터라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영화가 먼저 개봉을 해 버렸더라고요. 

700여 페이지의 원작을 읽기 전 가볍게 줄거리 정도 읽어보는 느낌으로 잡았던 책이 <한눈에 읽는 오디세이>였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날 저녁에 잡았는데 다행히 영화 시간 12시 30분 전까지 완독할 수 있었습니다. 

285 페이지 정도이지만 줄거리가 흥미진진해서 빠르게 넘어가기 때문에 하룻밤 독서로 추천 드리고 싶어요. 

​

기원전 음유시인이었던 호메르스는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라는 걸출한 작품들을 만들어냈고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일리아스>가 신들의 이야기에 좀 더 몰입되어 있다면 <오뒷세이아>는 오디세우스의  고국으로 돌아가는 20년간의 여정을 통해 인간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귀환은 곧 자신을 찾기 위한 과정인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둘 중 오디세이아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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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작의 내용은 아들, 표류, 모험, 귀환, 갈등, 복수의 여정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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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아들

"오디세이가 사라진 20년. 이타카 왕궁에서는 페넬로페에게 청혼하는 남자들이 떼 지어 들어앉아 재산을 축내고 있다. 소년 텔레마코스는 아버지 오디세우스를 알지 못한 채 무력하게 자랐지만, 아테나의 격려를 받아 처음으로 아버지를 찾겠다고 결단합니다. 

그는 배를 타고 그리스 각지를 돌며 늙은 영웅 네스토르와 메넬라오스를 찾아가 아버지의 행방을 묻는다. 텔레마코스는 소년에서 청년으로 한 걸음 더 성장해 이타카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_9p

​

이야기는 아들 텔레마코스에게서 시작합니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를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죠. 

이는 아버지 오디세우스와 다르지만 같은 여정이 됩니다. 즉 자신을 찾는 자기 정체성 확립의 과정이 되는 것이지요. 

2부 표류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신들이 그런 인간도 신경 쓰나요? 내가 그를 구해주고, 사랑해서 영원히 살게 해주겠다고 했는데, 그게 뭐가 잘못됐나요?"_57p


"한낱 인간인 내 아내를 여신인 당신과 비교할 수 없지요. 하지만 인간에게는 인간의 삶이 있고, 신에게는 신의 삶이 있습니다. 전 인간의 삶을 포기하고는 행복할 수 없을 겁니다. 전 수많은 고난을 겪어 왔어요. 앞으로도 고난을 잘 헤쳐 나갈 겁니다."_5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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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 칼립소에게 7년을 붙잡혀 살았지만 오디세우스는 매일 눈물을 흘리며 고국과 가정을 그리워합니다. 

칼립소는 그에게 불멸의 삶을 제안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인간의 유한한 삶을 선택하죠. 

오디세우스에게 귀환은 자신을 찾는 과정이고 결국 칼립소의 섬에서 살게 되는 불멸의 삶은 더 이상 오디세우스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는 모험과 고난을 기꺼이 마주해야 합니다. 

​

3부 모험

이 파트에서는 파이아키아 왕국 연회에서 오디세우스가 직접 털어놓는 10년의 표류 이야기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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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우스는 지혜와 책략의 대가입니다. 영화 오디세이에서는 그의 전사로서의 모습이 두드러졌지만 원작에서는 그는 전술로 승리를 이끄는 지략가이죠. 

인간의 지혜와 책략은 항상 겸손함을 전제해야 한다는 걸 키클롭스와의 전투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괴물을 처단했다는 승리감에 도취된 그는 "아무도 아닌 자(nobody)라고 속였던 걸 잊고 "나는 오디세우스"라고 외칩니다. 

​

대장에게만 몰래 준 보물이라고 오해한 부하들은 질투와 탐욕으로 은실 매듭을 풀어 바람을 놓치게 되고, 마지막 남은 부하들은 태양신의 소떼를 잡아먹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요.  

바람 주머니는 정확한 정보를 모른 채 탐욕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할지라도 태양신의 소떼는 인간이 얼마나 욕망의 노예인가를 보여줍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지금의 욕구 충족을 위해 그릇된 선택을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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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귀환


"20년 동안 수많은 곳을 떠돌면서 여신의 보호도 받고 왕의 환대도 받았지만 이 투박한 오두막에서 돼지치기가 건넨 외투 한 장이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아마도 그것은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종류의 행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디세우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화려한 궁이 아니라 의심을 지워줄 따뜻함이었다."_18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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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을 떠나 있었던 그를 반기는 건 믿었던 가신들이 아니었습니다. 돼지 치기, 목동, 그 시절 키우던 개가 그를 애타게 그리는 이들이었죠.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포인트였던 것 같습니다. 

5부 갈등

"원래 구혼이라는 것은 신부의 집안에 소와 양을 몰고 와서 잔치를 베풀고, 훌륭한 선물을 바치는 법이지요. 남의 재산을 다 퍼먹고도 선물 한 점 없는 것, 그것은 구혼이 아니라 약탈입니다."_215p

​

페넬로페는 타락한 여성들이 끊이지 않는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드물게 지혜로운 여성으로 손꼽힙니다. 낮에는 수의를 짜고 밤에는 푸는 전략을 통해 3년을 버티는데요. 

영화에서는 이런 페넬로페의 강인한 모습을 잘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페넬로페와 시녀들 이야기는 마거릿 애트우트의 <페넬로피아>에서 재해석한 걸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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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복수

"우리의 침대는 내가 직접 만들었소. 침실 한쪽에 거대한 올리브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지... 침대는 움직일 수 없게 그가 설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랑은 견고하고 영원하며 흔들릴 수 없는 것이니까."_277p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가 돌아왔지만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서로만 아는 비밀을 통해 그의 정체를 확인합니다. 페넬로페의 독립적 판단력을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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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한 번의 칼질로는 지켜지지 않는다. 정의는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지키는 것이다."_286p

오디세우스의 복수가 끝난 뒤 복수를 위해 구혼자들의 가족들과 부족민들이 공격을 합니다. 또 다른 전쟁이 시작하는 순간이었는데 이때 아테나가 개입해서 전쟁을 멈춥니다. 

과연 정의로운 복수가 있을까요? 타인에게는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이 아니었을까요? 신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돌고도는 폭력의 악순환으로 빠지게 되는 결말이 오고야 만다는 암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

쉽게 스토리 위주로 300페이지 안되게 요약정리되어 있는 한눈에 읽는 오디세이는 영화 오디세이를 보기 전 읽기 좋은 짧은 고전으로 추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오디세이 #오디세이아 #한눈에읽는오디세이 #빚은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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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 아이
실비 제르맹 지음, 이창실 옮김 / THE CIRCLE PRESS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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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하면서도 엄숙한 비극을 읽다가 전율 속에서 밤을 새웠다" 구병모 소설가의 추천사를 읽고 대체 어떤 글일까 궁금했다. 

"색채와 음향으로 가득한 산문", "시각적 이미지가 넘쳐나는 회화적인 소설로 페이지마다 빛과 색채로 가득하다"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비 제르맹의 소설은 시각, 후각, 청각, 촉각까지 만족시키는 공감각적인 소설이었다. 


실비 제르맹

최근 신유진 작가님의 나를 균열 내기를 보고 프랑스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졌는데 실비 제르맹도 프랑스 문단에서 알려진 작가였다. 1954년생 출생이니 이미 칠순이 훌쩍 넘은 나이다. 

실비 제르맹의 소설은 처음이었는데 글의 사유의 깊이가 남다르고 아름다움이 뛰어났다. 

철학을 전공했고 석,박사 논문의 주제가 심지어 기독교 신비주의에서의 고행, 인간의 얼굴 및 악과 고통에 대한 성찰이었다고 하니 이 부분도 영향을 주었을 것 같다. 

메두사 아이에서도 신비주의, 인간 본성, 악과 구원을 탐구하는 소설이다. 


작가의 작의와 작품에 평소 익숙지 않았던 이들이 만약 이 소설을 읽는다면, 2부가 시작하기 전부터 서서히 감지된 충격과 고통으로 인해 끝내 책을 덮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내를 가지고서 이 불행하고도 잔인하며 불길한 언어-신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를 감행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아주 오랜 세월에 걸친 회복의 서사임을 알게 될 것이다. 

구병모 소설가

소설의 내용은 스포가 되기 때문에 말할 수 없지만 구병모 소설가의 추천사를 올려본다. 

참혹한 이야기를 그렸지만 결국은 회복으로 이어지는 서사시인 이 소설은 묘하게 환상적이며, 슬프다. 

끔찍한 이야기를 너무도 담담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하니 그 슬픔이 극대화되는 효과가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메두사 아이의 문장

"달이 흐물흐물한 광환의 해 위를 굴러간다. 작열하는 기다란 깃털을 가득 곤두세운 해가 방패 같은 달 주위로 흰 문어의 구불구불한 팔을 뻗는다. 거대한 그림자가 땅을 덮쳐 집어삼킨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시간이다. 흘러가는 시간과 영원, 경이와 공포 사이의 아슬아슬한 접점이다. 모습을 드러낸 건 벌거벗은 세상의 심장이다 광휘에 둘러짜인 어두운 심장."-15P


"인간의 진짜 마음. 상이 덮지 거나 절망의 그림자가 맴돌거나 냉기가 사로잡은 사람들의 마음은 구멍이 파이고, 속이 뚫리고, 깊은 공허감으로 무거워지기 마련이다. 그 마음은 눈물로 부풀어 오르고, 청동의 색과 음향을 지니게 된다. 그 안에선 부재가 울려 나온다. _32P


"세 여자의 목소리가 가르릉 대는 고양이 울음소리와 뒤섞이며 방 안 가득 흘러넘치는 햇빛 속에 녹아든다.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단어가 가벼운 깃털처럼 공중에서 팔랑거리거나 때론 뤼시의 목과 이마에 내려앉은 곤충처럼 찌르륵댄다. 그 이상한 곤충이 스치고 간 자리는 그 당장엔 아무렇지 않아도 결국 물린 자국을 남기고야 만다."_54P


"고통과 증오, 추악함과 아름다움이 결합된 이 마녀 아이의 커다란 눈에서 헤어날 순 없으리라는걸, 공포에 사로잡혀 감지한다. 메두사의 시선이다."_173P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문지방에 꼼짝 않고 서서 이 모두를 멀리서 바라본다. 시선이 이 가구에서 저 가구로, 이 물건에서 저 물건으로 옮겨가며 사방에 가 부딪힌다. 원하는 걸 찾지 못한 시선은 사물들의 냉혹함에 놀라고, 모든 걸 퇴색시키는 백악 같은 빛에 놀란다. 무엇보다 방 안에 군림하는 공허에 놀란다."_246P


"고통은 숙고할 줄 모른다. 생각의 가시덤불로 침입해, 의식의 표면으로 한순간 다시 떠오르려는 각각의 추억을 처량한 소금 기둥으로 만들어 버린다. 고통은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다. 이성을 조롱하고, 그 어떤 위대한 지성도 짓밟아 버리는 폭군이다."_249P


"자신의 걸음에 달라붙은 과거의 그림자를 향해 화를 내며 불쑥 돌아서면 그 그림자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될 뿐임을. 그 경우 그림자는 더 단단해지고 완강해지며, 한층 무겁고 적대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_333P

​

소재가 무겁지만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하고 다시 빛으로 나아가는지 주인공 뤼시를 통해 보여준 소설이었다. 뤼시는 라틴어로 룩스 즉, 빛이라고 하는 것도 아마 저자가 의도한 바였을 것 같다. 

일식에서 시작한 강렬한 이미지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소설이다. 

특유의 문장력과 감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언어의 마술사 같은 실비 제르맹의 다음 소설을 기대해 봐야겠다. 


#소설추천, #실비제르맹, #프랑스소설추천, #메두사아이, #구병모추천, #이달의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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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새에게 사로잡히지 않도록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이지수 옮김 / 디플롯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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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흥미로운 SF 소설을 읽었다. 

가와카미 히로미라는 작가는 처음이었는데 이미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손꼽힌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소설의 약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느낌이 난다고 생각했는데  작가의 데뷔작이 <신>이었고 23년 프랑스에서 문예공로훈장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오히려 베르나르보다 더 섬세한 무엇이 있는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전혀 다른 14편의 이야기는 돌고 돌아 퍼즐처럼 하나의 큰 그림을 완성한다. 

최근 읽었던 연작 소설 중 프랑스의 <한낮의 불운>이 좋았었는데 이 작품도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인류가 황혼에 접어든 아득한 미래.

돌고래와 쥐와 말의 세포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어머니'라 불리는 존재들의 보살핌 속에 살아간다. 

인류라는 종의 마지막을 억겁의 시간에 걸쳐 그린 열네 편의 퍼즐과 같은 이야기,

그 끝에서 묻는다.

우리는 무엇이었고, 무엇이 될 수 있었는가?

표지 중, 

​

큰 새에게 사로잡히지 않도록 문장

내가 이상한 기술을 발명한 게 아니라, 인간이 이상한 것만 생각해 내는 생물인 거야.

121p

정말이지 인간이라는 생물은 왜 이다지도 다양한가? 놀라운 일이다. 

171p

내게는 관찰자 자격이 없었다. 관찰자는 중대한 결단 같은 건 내려서는 안 된다. 그저 관찰하고, 지극히 미세한 조정만 수행한다. 그것이 관찰자의 사명이자 운명이다.

188p

그들은 살아 있음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므로 설령 그들이 나의 예상과는 달리 결국은 진화의 흐름 속에서 덧없이 사라져 갈 운명이었다 해도, 지금의 우리 현생 인류처럼 추악하게 발버둥 치지 않고 인류의 후예로서 아름답게 소멸했을 텐데.

190p

신은 인간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일이 있을 때 나타난다고 어머니들이 가르쳐 줬어요.

241p

인간의 마음에는 바닥이 없다. 바닥으로 보이던 것이 전혀 바닥이 아니고, 한 번 뚫고 내려간 바닥 아래로 또다시 무한한 회랑 같은 어둠이 펼쳐지며, 그 어둠을 통과하면 또 새로운 빛이 비친다. 그 빛 건너편은 나도 스캐닝 할 수 없다. 그곳은 무의식이라고 불리는 영역이다.

300p

너는 정말로 인간다운 인간이야. 넌 뭔가를 만들어내거든. 그리고 만들어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파괴하지.

317p

당신들은 당신들의 가치관을 여러 가지 가능성 속에서 구축해왔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들의 한정적인 가치관은 처음부터 제한된 특정 방향을 향해서만 구축되었을 뿐입니다. 

324p

당신들의 생존 시스템은 불안정합니다. 그것은 당신들뿐 아니라 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의 숙명이기도 합니다. 

331po

인간들은 마지막까지 서로 사랑하고 미워했어?

응. 인간들은 감탄스러울 정도로 마지막까지 똑같았어. 

379p


 공장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동물 유래 인간들이 강가에서 목욕을 하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동물 유래 인간들이라니? 이게 뭐지 하는 순간 이야기는 끝나고 다수의 나와 관찰자가 존재하는 인간 세계로 무대는 옮겨간다. 

장면은 빠르게 움직인다. 이곳은 남자가 부족한 곳이다. 리엔이라는 여성의 출산과 죽음을 통해 그들의 삶을 잠시 지켜본다. 

​

신기한 이야기들이 전혀 아귀가 맞지 않게 주르륵 펼쳐진다. 과연 어디서 이 이야기는 이어질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는 순간 공통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머니, 관찰자... 이들은 과연 누구인건가? 소설은 집중력을 요한다. 

지금이라도 있을 것 같은 현시대의 모습이다가 급진적 상상의 세계로 이어진다.

​

신기하게도 하나도 맞지 않을 것 같던 그 이야기들이 점차 아귀가 맞아 들어간다. 작가가 진짜 천재인 것 같다고 느꼈다. 

단순히 스토리만이 아니다. 그 안에 깔린 철학까지.

첫 작품이 <신>이어서 그럴까? 전반적으로 소설의 기저에 깔린 인간 본성에 통찰, 종교 등 사회에 대한 깊이와 밀도가 상당히 높다. 

​

동물 유래 인간만 해도 그렇다. 우리가 뻔하게 상상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라 플러스 알파의 그 무엇이 존재하는 소설이다. 

그래서 부커상 최종까지 갔던 것이겠지? 일단 재미있고, 흥미롭고 나름 반전까지 있다. 

인간은 무엇이며,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만든 책, <큰 새에게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작가의 생각 흐름을 쫓아가며 사고하는 걸 좋아하는 분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다.   


#부커상후보작, #가와카미히로미, #큰새에게사로잡히지않도록, #신간소설추천, #SF소설추천, #디플롯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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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이야기 ㅣ 이야기의 낮과 밤 1
알베르 카뮈 외 지음, 이재경 외 옮김 / 유선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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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너무 이쁘지 않나요?

유선사에서 나온 이번 고전 단편 시리즈 중 하나인 정원 이야기는 익숙한 유명 작가들의 정원과 관련된 짧은 글들을 모은 큐레이션 집입니다.


저는 정원 이야기와 고독 이야기를 함께 받았는데요. 각각 나름의 매력이 있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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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이야기에서는 총 16인의 작가들의 작품이 실려있습니다.

알베르 카뮈, 버지니아 울프, 헤르만 헤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마르셀 프루스트, D. H. 로런스, 나쓰메 소시키, 캐서린 맨스필드, 오 헨리, 카렐 차페크, 라이너 마리아 릴케, 토머스 하디, 사키, 에밀리 디킨스, 콜레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작가들이지요.


1부. 정원은 빛으로 열린다

2부 계절을 지나온 자리

3부 나의 정원으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글을 편집하였습니다.

작품들이 많은 관계로 제가 좋았던 작품 몇 개를 소개해 볼까 합니다.


가든파티

캐서린 맨스필드

부유한 가정의 가든 파티를 통해 빈부격차, 상류층의 위선을 보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

더없이 맑은 날 상류층의 자제 로라는 엄마를 도와 가든 파티를 준비합니다.

가든 파티에서 쓸 꽃 종류, 샌드위치에 꽂을 안내표, 극단 위치가 일생의 중요한 일처럼 와닿던 그날, 로라는 집안의 요리사를 통해 저택 앞에 거리에 살고 있는 코티지에서 짐마차 마부가 오늘 아침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가족들에게 가든 파티를 중단하자고 합니다.

딸의 말에 가족들은 콧방귀를 뀌고 엄마는 이렇게 말하죠.

"너 정말 어이없게 구는구나, 로라." 부인이 차갑게 말했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에게 희생을 기대하지 않아. 그리고 지금 너처럼 모두의 즐거움을 망치는 것도 인정 없는 행동이야."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

결국 파티는 성대하게 마무리되고 어머니는 파티에서 남은 꽃과 음식들을 그 집에 가져다주라고 로라에게 말합니다. 죽음과 가난을 직접적으로 맞닥뜨린 로라는 최초로 인생의 가혹함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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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계략 그리고 로맨스

오 헨리

짧은 단편이었지만 역시 오 헨리구나 하고 느꼈던 작품입니다.

여행가이자 예술가이자 시인인 자뻑에 빠진 래버넬의 착각을 유쾌하게 관찰할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래버넬은 주식 중개사인 새미를 속물, 자기보다 낮게 보며 무시합니다.

매사에 냉소적이던 그는 맞은편 집에 나타난 '클레마티스 꽃 줄기처럼 우아하고 싱그러운 그녀'에게 단번에 사랑에 빠지고, 그는 그녀를 생각하며 장미 네 송이라는 시를 지어 신문에 싣습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앞집 그녀는 창밖에 장미 네 송이를 내놓고 제라늄까지 내놓았습니다.

제라늄을 꽃말을 잽싸게 찾아보니 바로 '만남을 기대해요.'라네요.

승리에 도취된 레버넬, 과연 그것은 그를 위한 신호였을까요?


정원 이야기 문장들

충분히 보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산, 하늘, 바다는 얼굴과 같아서 바라보려 애쓰지 않고 그저 보기만 해서는 그 메마름이나 찬란함을 발견하지 못한다.

알베르 카뮈 티파사에서의 결혼,

자신을 머금는 것이란,

저 바깥의 세계, 바람, 비, 봄의 인내,

잘못, 불안, 가면을 쓴 운명,

저녁 대지의 어둠,

구름의 변화, 흐름, 접근까지,

저 멀리 있는 별들의 영향까지,

한 줌의 내면으로 변화하는 것이라면?

라이너 마리아 릴케, 장미 그릇

정원에는 절대 끝이란 게 없다. 이런 점에서 정원은 인간 세계, 그리고 인간의 모든 활동과 꼭 닮았다.

카렐 차페크, 정원사의 12달 중에서 10월의 정원사

죽음은 없다. 잠조차 없다. 다만 한 시기에서 다른 시기로 자라나갈 뿐이다.

삶은 영원하니, 그것을 참고 견뎌야 한다.

카렐 차페크, 정원사의 12달 중에서 11월의 정원사

헤르만 헤세의 '정원에서'는 짧은 글이지만 헤세의 성찰 가득한 문장을 살펴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생명의 긴밀한 순환을 이토록 가까이에서, 명확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지켜볼 수 있는 곳은 정원밖에 없다.

헤르만 헤세의 '정원에서'

모든 여름은 지난해의 죽음에서 자라난다.

흙이 식물이 되었듯, 모든 식물은 조용하고 확실하게 흙으로 돌아간다.

헤르만 헤세의 '정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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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부터 헤세까지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을 골고루 볼 수 있어 좋았고 몰랐던 고전 단편들을 발견할 수 있어 재미있었던 책이었습니다.

고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리고 싶어요.


#유선사 #정원이야기 #고전단편소설 #정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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