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코넬 울리치 지음, 이은경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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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당신은 3주 안에, 정확히 자정에,
그것도 사자의 아가리 아래에서 죽을 것이다”


 

코넬 울리치의 작품을 처음 접했다. 1940년대의 소설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섬세한 표현과 치밀한 구성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예언, 그것도 죽음에 관한 예언이라면 사람들은 누구나 초조와 불안 그리고 공포를 갖게될 것이다.

그것이 누가 되었든 말이다.

 

사업차 비행기로 출장을 가게된 레이드는 사정상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데 비행기는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딸로 부터 비행기의 추락과 자신의 생존이 모두 예언 되었음을 알게되고 그 예언을 한 톰킨스를 찾아가게되는데 그때부터 레이드와 진의 생활은 걷잡을 수 없이 예언에 빠져들고 만다. 그러던 어느날 톰킨스는 레이드에게 구체적인 죽음의 예언을 한다.

예언을 들은후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인 레이드와 그의 딸 진은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고 말았고, 진은 어둡고 차가운 도시의 밤에 자살을 택하지만 우연히 지나가던 경찰 숀에 의해 구조된다.

 진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숀은 죽음의 예언을 들은 레이드의 자포자기한 공포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경찰을 동원해 죽음의 예언에서 부터 예언자와 예언을 둘러싼 인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죽음의 운명을 피하게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게된다.

 

결국 레이드는 죽음을 맞이해야 이야기가 끝이 날 것임을 짐작했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을 예언했더라도 그것이 불길한 일이라면 예언을 들은 사람은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다.

예언된 죽음의 시간으로 다가갈 수록 레이드의 불안과 공포는 더욱 심해지기만 하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진과 숀 역시 불안과 초조함에 시달리게 된다.

 

섬세하고 세세한 묘사는 등장인물 한사람 한사람의 심리상태와 시각적으로 그려지는 모습을 형상화 하는데 퍽이나 선명함을 더해 주었다.

어린시절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을 했다는 울리치의 작품답게  '밤은 천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의 전반에 걸친 분위기는 시시각각 숨통을 죄어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죽음의 당사자인 레이드뿐만 아니라 진과 숀의 모습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게 한다.

살아보지 않으면, 딱 그 시각을 지나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일것이다.

물론 어떤 일이 벌어질 수 밖에 없게끔 상황을 만들어 버린 경우도 있겠지만 앞일에대한 지나친 걱정과 두려움이 죽음의 예언을 들은 레이드의 경우처럼  공포와 자포자기를 외려 이끌어내는 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읽으며 레이드의 공포와 두려움을 함께 느껴보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게 닥친 죽음의 예언이 아니었기에 어쩌면 그저 바라보는 제 삼자의 심정으로 안타까운 눈으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언 속으로 뛰어들어간 숀의 이야기가 좀 더 다루어졌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 역시 에언 속으로 스스로 들어갔으나 바라보는 제 삼자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레이드의 삶과 예언 그리고 죽음을 만나며, 죽음과 예언 그리고 숨쉬는 현재를 좀 더 깊이 생각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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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
김성민 글, 이태진.조동성 글 / IWELL(아이웰)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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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참 작고 귀한 책이다.

매체를 통해서 안중근 서거 100년이 되는 해라 어느때보다 그에 대한 관심을 많이 볼 수 있던 한 해가 아니었던가 생각을 해본다.

티비에서 혼혈의 그의 손자를 비춰줄때는 의아한 마음과 그것보다  크게 마음 한켠으로 자리잡던 것이 먼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조국 땅도 아닌 먼 이국땅에서 뿌리 내리려 애를 썼어야 했을 그들의 보이지 않는 참담함 때문이 마음이 저렸다.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안중근을 독립군의병의 참모중장- 장군으로서가 아닌 개인적으로 의로운 일을 한 의사라는 단어와 더 연결 지어왔음을 책을 읽으며 반성하고 또 생각했다.

 

안중근이 의사가 아닌 독립군 장군으로서 거사를 치렀고 스스로 법정에서 수차례 주장을 밝혔으나 일제에 의해 묵살 되었으며 그들이 바란 대로 백년을 지나는 동안에 아직까지도 의사로만 한정된 안중근 장군을 생각하며 비통함이 없지 않았다.

또한 그가 한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한국만의 영웅이 아닌 동양 전체의 안녕과 평화를 위하여 거사를 결행한 우리가 생각하는것보다, 우리가 듣고 배운것 보다 더 큰 영웅이었음을 이제서야 백년이 지나고 자라오면서 알았던것을 이제야 바로잡음이 통탄스러웠다.

사형 집행전 수감된 동안 동양의 평화를 위한 책을 집필 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형 집행을 자행했던 그들의 만행 또한 통탄스럽기 그지 없다.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이 이토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사죄하고 머리 조아린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본문에서 보듯이 준생 그가 견뎌내어야 했을 영웅의 아들로서의 삶이- 감히 엄두도 나지 않고 상상조차 쉽지 않지만- 너무도 버거웠을듯 하여 마음이 시린다.

"아버지는 나라의 영웅이었지만 가족에겐 재앙이었죠.

나는 나라의 재앙이지만 내 가족에겐 영웅입니다."

조국에서 보호받지 못한 영웅의 아들, 많은 사람들은 영웅의 아들이니 당연히 영웅의 아들답게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말 대로 영웅의 아들이니 온갖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자랑스럽게 죽어야했을까. 호부견자라는 말을 들으며 까지 삶을 이어가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분노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당시에 한 사람이었더라면 어쩌면 같이 욕을 했을만한 인간인지도 모른다.

준생의 개인의 삶과 가족의 삶을 영웅과 연관시켜 나는 그러지 못하지만 당신들은 그러해야한다는 억지스럽고 고집스런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거의 그러했을지도 모르겠다.

 

작은 책을 읽으며 영웅과 준생과 나를 포함한 많은 이름없고 얼굴없는 어쩌면 이기적일 지도 모르는 민중이 민족이 내내 마음을 휘저었다.

안중근의 유해가 중국땅 어디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발굴 작업을 펼쳤으나 결국에는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독립된지 반세기가 넘었는데 아직도 안중근에 대한 제대로 된 조사의 결실을 찾을 수 없는 듯 하여 마음은 헛헛하기만 하다.

 

이토히로부미의 아들, 안중근의 아들을 쏘다.

대한 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의 하얼빈 대첩이 그의 개인과 가족에게 남긴 역사와 아직까지 바로잡아지지 못하는 민족에게 남은 이야기가 한참 동안이나 마음을 쓸고 다닐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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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 브로드 1
팻 콘로이 지음, 안진환 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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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얼마전 지구촌 뉴스를 보던 중에 찰스턴에 허리케인 주의보가 내려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창 빠져있는 팻 콘로이의 '사우스 브로드'가 생각남은 물론이거니와 찰스턴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조가비 속에 몸을 숨긴 연약한 연체동물처럼 느낀다는 레오와 그의 친구들을 떠올린것은 두말할 것도 없겠다.

후의 소식을 들은 바 없으나 허리케인 속에서도 찰스턴이 무사하기를 내심 바랐다.

 

결코 적지 않은( 두권 분량이 천페이지 정도이니) 콘로이의 '사우스 브로드'는 미국의 남부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찰스턴을 배경으로 레오폴드 블룸 킹과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검은 뿔테의 알이 두꺼운 안경을 낀 '두꺼비' 레오.

1969년 6월 16일, 관련없는 일련의 사건들로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되는 친구들과의 인종과 게층, 사회적 가족구성 따위를 뛰어넘는 그들의 얽히고 설킨 인생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18살인 69년과 20년이 지난 89년을 오고가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체인 레오의 시점은 2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몰입이나 이해가 떨어지지 않는 것은 문장마다의 넘치는 재치와 숨바꼭질 하듯 숨겨진 유머를 찾아내며 읽기의 속도가 줄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적인 공간이 변화함에도 그들의 이야기가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시간을 넘어 많은 인물들과 다양한 사건과 이야기임에도 날줄과 씨줄로 엮은 듯이 촘촘한 짜임을 보인 콘로이의 능력때문이리라.

 

나일즈와 스탈라, 트레버와 시바. 베티와 아이크, 채드와 몰리, 프레이져, 레오와 그의 부모님, 맥스 주교 등 펼쳐놓은 인생의 수 만큼이나 다양하고 다채로운 삶들은 레오의 눈과 귀와 입, 레오의 피부로 느끼는 감촉과 느낌을 통해 그대로 전해진다.

그들의 인생에는 끔찍한 사건, 기쁨과 즐거움, 분노와 노염의 순간들이 머물기도 하고 찰스턴에도 허리케인이라는 물리적인 위협이 닥치기도 한다.

레오를 방황케  하고 침전하게 만들었던 형의 자살과 트레버와 시바의 정신이상적 미치광이(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음이...)

아버지의 존재, 후에 밝혀지는 형의 자살의 원인 등을 레오는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분노와 노여움과 절망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정신없이 빠져들어 있는 중에 펼쳐놓은 페이지에서 인쇄된 글자들 사이로 레오와 친구들이 문장을 헤치과 지면을 뚫고 그들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사우스 브로드'의 레오와 그의 친구들이. 찰스턴의 그들이 문장을 헤집고 만화 영화의 한 장면 처럼 책을 뚫고 걸어나와 책장마다 전해지던 레오와 친구들의 모습 하나하나와 레오의 눈으로 보고 느낀 그들의 마음이 책을 넘어 전해진 것이다.

 

1960년대와 80년대, 미국의 보수적인 남부 찰스턴의 모습과 당시의 인종 차별과 사회의 모순들을 축약 또는 축소한 듯 보여주는 레오와 친구들은 풍랑과 거친 파도를 만난 작은 배처럼 쓰러지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며 분노와 노염으로 포기하는 순간들이 있기도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서로를 건져올린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과 슬픔에 눌린 상황에서도 반어적인 유머와 서로를 의지하며 견뎌내는 힘으로 그들은 서로를 일으켜 세운다.

 

이쯤되니 섬세하고 사려깊은 서사적 표현으로 배경이 되는 찰스턴과 레오의 친구를 만나는 기쁨을 준 팻 콘로이에게 쏟아지던 출판사의 홍보전략일 수 도 있는 찬사들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다소 지루해질 수도 있는 서사적 틀을 띠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500페이지 두권 분량의 '사우스 브로드' 의 서사적 서술에는 특별함이 가득하다.

한장 한장 마다 담긴 삶의 서사 또는 인생의 서사는 거침없이 쏟아지는 절벽의 폭포수 처럼 시원하고 수면으로 떨어져 맻히는 물방울의 소리 또한 경쾌하기만하다.

인생에 대해, 어떤 일이고 일어날 수 있는 인생을 레오와 친구들, 주변의 인물들을 통해 그려지는 그들 모두를 책에서만이 아닌 살아 숨쉬게 만든 그들과 그들의 인생을 사우스 브로드에서 만날 수 있었다.

 

책을 읽을 때면 시각적인 상상이 가능하다는 것이 큰 즐거움을 주곤 하는데 사우스 브로드는 시각적 상상을 넘어 배경과 인물들이 몽땅 책 속에서 걸어나와 그들의 모든 일들을 함께 경험하는 듯 생생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작품에 대한 생각을 상투적이고 모호하고 두루뭉술한, 저급하고 질 떨어지는 표현력으로 늘어놓을 수 밖에 없지만 팻 콘로이의 사우스 브로드에서 만난 그들의 서사시에 완전히 압도되어 매료되고 말았다.

 

대수롭지 않는듯 그저 담담히 기록하는 듯한 그의 문장과 문장이 두둥실 떠올라서 내 앞에 펼쳐지고 있었고 시간 가는줄 몰랐다 하는

아니해도 되는 말들만 몇번이고 되풀이 할 수 밖에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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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비 Young Author Series 2
크리스 클리브 지음, 오수원 옮김 / 에이지21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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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고 여린 날개로 끊임없이 바삐 비상하는 꿀벌, 리틀비

노란 꿀벌의 색을 닮은 작은 책 한권을 잡고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오가는지, 깊고도 막막한  그 속에서 생각은 헛돌기만 했다.

책에서는 난민이 된 나이지리아 소녀 리틀비와 영국의 부족함이라곤 없을 것 같은 잡지사 편집장 새라의 운명적인 만남과 비극 그리고 이해를 담고 있다.

슬프도록 처연하고 가슴 먹먹한 삶을 절제된 감정으로 이야기하는 리틀비와 그런 리틀비가 운명 속으로 들어오면서 혼란을 통해 성찰과 반성 그리고 진정한 이해를 찾게되는 다소 격앙되고 감정적인 새라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나이지리아의 석유전쟁으로 가족의 죽음과 풍전등화 같기만 한 자신의 목숨을 위협받는 리틀비가 나이지리아 해변에서 새라와 엔드루의 비극적이고도 운명적인 만남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리틀비를 위해 그들의 요구에 따라 손가락을 자른 새라와 그렇지 못한 엔드루는 2년이 지나 난민수용소에서 극적으로 나오게 된 리틀비가 그들 앞에 나타나게 됨으로 다시 한번 혼란을 겪는다.

엔드류의 선택으로 리틀비의 언니는 잔인하게 목숨을 잃게 되었고 엔드류는 죄책감과 책임감, 두려움과 자기합리화를 오고 가며 괴로워하다가 결국 목을 매어 자살을 하고 만다. 엔드류의 장례식날 새라 앞에 나타난 리틀비와의 만남은 새라를 또다른 운명의 삶으로 이끈다.

 

새라와 엔드류는 리틀비라는 상처와의 대면을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고자 노력했어야했다.

건드리지 않고 곪도록 오래 놔둔 상처는 사소한 실수로 스치기만 하여도 걷잡을 수 없이 터져버리고 만다.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잊은듯, 모르는 듯, 아닌 듯, 알고싶지 않은 듯 제쳐두었기에 엔드류는 자살을 선택하고 다시 운명의 연결고리는 새라를 혼란속으로 내던져지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리틀비의 이야기가 웃음으로 슬픔을 이야기하는 희극 배우의 얼굴을 하고 있는 듯 해서 읽는 내내 웃음 짓는 눈에 눈물이 고인다.

나이지리아에서 탈출하는 리틀비, 난민 수용소에서의 리틀비, 엔드류를 찾아나서는 리틀비의 힘없고 두렵기만 했을 모습이 눈에 그려져서 나이지리아 해변에서의 새라와 엔드류가 마주쳤던 리틀비를 새라와 엔드류와 나도 함께 만난듯 했다.

결국 리틀비를 읽으면서 큰 딜레마에 빠지고야 말았는데 새라와 엔드류가 처한 그 상황에서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끊임없이 내 속에서 메아리쳤다.

 

하루동안 만나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리틀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당신의 선택은 어떤 것인가 하고 질문을 해댔다. 더러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한다고 힐난 하는 이도 있었고 더러는 나와 상관 없는 사람을 위해 희생을 치를 이유가 없다는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질문하는 너는 어찌하겠느냐 되물어 와 질문하는 나를 주춤하게 만든이들도 있었다.

한결같이 대답이 쉽지 않은 것을 보며 그럴 수 밖에 없겠구나 하는 결론이 내려져 잠시 슬프고 잠시 분노했다.

희생을 강요할 수도 없고 희생하지 말라 선동할 수도 없는 이 우울한 질문이 그저 내 앞에는 그런 선택의 상황이 주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비겁한 마음들을 만들어내는지도 모르겠다.

엔드루의 자살후 삶으로 다시 들어온 리틀비에게 새라는 리틀비의 삶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간다.

새라앞에 펼쳐질 삶의 회오리가 몸으로 느껴져오지만 이미 나 스스로는 해변에서 리틀비를 구하지 못했기에 부끄러운 눈물이 마음을 가르고 흐르기만 한다.

2001년 영국으로 건너와 4년 동안 난민 보호소를 요청하다 예고 없이 이민국으로 송환되어 결국 계단에서 목을 매 자살하고 만 앙골라인의 실제 이야기가 모티브가 된 작품이라 리틀비를 만나는 것이 어쩌면 더욱 가슴 저리도록 실감이 나는지도 모르겠다.

 

삶과 생을 향해 스스로 작은 날개짓으로 날아오르는 리틀비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내 안에 머물며 나를 힘겹게 할지라도 다만 부끄러운 눈물은 흘리고 싶지 않다는 두려운 소망을 소망할뿐.
 

흉터가 아름다운 이유는 죽어가는 자에게는 생기지 않는 것이 흉터이기 때문이다. 흉터의 의미는 생존이다.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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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땅을 찾아서 우리문고 20
스콧 오델 지음, 정미영 옮김 / 우리교육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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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어린시절에는 만화 영화나 동화책으로 읽었던 무지개 너머엔 금은보화.보물이 가득하다는 말을 정말로 믿었었다.

아직은 추위가 남아있는 늦봄, 비가 내리고 집앞 작은 개울을 건너면 깊은 산으로 이어지던 능성이에 무지개가 걸리고 일곱살쯤 되던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무지개 끝을 찾아가보기로 결심했다.

개울을 건너고 내린 비에 적셔진 풀들이 발목을 감아왔지만 저 끝에 보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꼭 가야겠다는 결심만이 머릿속을 가득채웠다.

능성이를 지나 산 초입을 지났지만  걸려있던 무지개는 보이지도 않고 이미 해는 지고 있었다.  어둠이 빨리 찾아오는 숲에서 일곱살의 나는 추위와 어둠에 두려웠고 무지개끝에 정말 보물이 있을까 하는 의심이 일어 결국은 산을 내려오고야 말았다.

그때 나이의 세갑절은 더 먹은 지금에서도 그때의 기억이 또렷한것을 보면 보물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컸었는지 한편으론 씁쓰레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끝까지 가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있기도 하다.

어찌 알겠는가 그 길로 무지개끝을 따라갔다면 집잃은 천사가 되었거나 들짐승에게 해를 입지 않았을거라 장담하지 못하니 말이다.

 

스콧오델의 황금의 땅을 찾아서는 기억의 어느 자락에서 먼지 쓴채 감춰져 있던 옛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일곱살의그 웃긴  해프닝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혼자만의 비밀이었는데 황금의 땅을 찾아 떠난 16세기 정복자 스페인 군대는 어떠했을까 작은 짐작이 가기도 한다.

 

16세기 스페인 군대를 따라 항해하던 지도제작자 소년 에스데반이 군대안 반란을 꿈꾼 멘도사 대위와 한편으로 몰려 본대에서 떨어져 황금을 찾는 원정대의 일행이 된다. 황금을 찾는 길에서 인디언들에겐 그저 쓸모없는 돌덩이나 다름없는 그것을 위해 멘도사와 그의 일행은 폭력적이고 파괴적이며 단지 황금에 대한 무지막지하고 무모한 집착을 하게 된다.

황금의 땅이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 생각할 이유도 없이 멘도사의 일행은 원래 그 땅의 주인인 인디언들을 향한 잔인한 살육을 저지르기도 하고 에스데반 역시 그 길에서 그들의 황금에대한 욕망과 집착을 고스란히 닮아가고 있었다.

결국에 찾게된 황금의 땅에서 황금을 앞에두고 멘도사 대위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은 에스데반을 더욱 황금에 집착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는 황금의 무게에 마음마져 짓눌리게되고 말았다.

황금을 향한 무한한 욕망은 그 욕망만으로도  인디언들과 동료 또한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결국 마지막 까지 남은 에스데반이 황금을 내려놓음으로써 황금으로 부터 진정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었다.

 

황금을 숨겼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게된  에스데반의 회상으로 그들의 모든 여정이 에스데반의 손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작품은 인디언들에게는 가치 없는 황금을 위해 얼마나 많은 그들을 살육하고 황금에 대한 탐욕으로 스스로를 잃게 만들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어릴적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고 무지개 끝을 찾아 걸었던 작은 탐욕의 나 자신이 생각나면서 잠시 쓴 웃음이 나기도 했고 황금을 내려 놓음으로써 진정한 황금을 찾은 에스데반의 깨달음을 통해 과연 가치란 것은 어디에 두어야 되는것인가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무지개 너머를 찾아가고자 했던 내 기억과  황금의 땅을 찾아 떠난 그들의 여정을 함께하며 수풀과 사막을 지나는 에스데반을 따라다니는 동안 잔인하고 가혹하지만 즐거운 모험이 되었음을 고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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