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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의 거울 (리에디션)
정무 지음 / 메트릭 / 2023년 10월
평점 :
품절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가진 거울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제목이 흥미로워 선택한 책이다. 알고 보니 《맹인의 거울》은 이미 올해 5월에 출판된 책이고, 이번에 리에디션으로 재출판되었다고 한다.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 'P사'에 취직한 '영백'의 삶은 생각보다 행복하지 않았다. 이만하면 됐지, 라고 만족하기엔 자신의 삶이 너무나 부족해보였다. 자신보다 좋지 않은 대학을 졸업한 친구 녀석 '동주'가 'M사'에서 개발자로 잘나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더욱 배가 아팠다.
그를 더 주눅 들게 만드는 것은 바로 회사원들이 익명으로 소통할 수 있는 커뮤니티 사이트 '스크린'이었다. 소속된 회사만 밝힌 채 철저히 익명으로 운영되는 그곳에는 고스펙 회원들이 판을 쳤다. 스크린의 회원들이 원하는 기준은 매우 높았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집이 없는 사람은 모두가 패배자였다.
현실의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영백의 회사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몸은 사무실에 있지만 그들의 정신은 오로지 파란색과 빨간색이 요동치는 주식 창에 가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이 회사를 탈출해 경제적 자유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 기세에 떠밀리듯이 주식을 시작한 영백이었지만 85층 펜트하우스 주민이 된 이후로는 용기와 의욕을 잃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애 전선에도 문제가 생겼다. 모든 걸 다 줄 수도 있을 만큼 사랑했던 약혼자 '정윤'은 능력 있고 미래가 밝은 여성이었다. 그런 그녀가 느닷없이 이별을 고한 것이다. 그녀가 내뱉은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네가 나랑 같은 급이라고 생각해?
이 한 마디는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는 걸까? 영백은 고뇌와 실의에 빠지고 만다.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능력주의와 물질주의에 물들어 있는 우리네 현실이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제 월급쟁이는 더 이상 알아주지 않는다. 대기업에 취업하는 게 끝이 아니라는 소리다. 다달이 받는 근로소득보다는 주식, 부동산을 통해 얻는 금융 소득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부단이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기준이 한 단계 높아짐으로써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청년들이 많이 늘어났다. 일부는 의욕을 상실하기까지 한다. 등장인물인 영백도 이 정도의 직장이면 괜찮은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스크린' 회원들의 질타와 여자 친구의 이별 선언에 좌절하고 만다. 자신이 살아온 삶과 가정 환경, 능력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느끼고 괴로워한다.
사실 내 삶의 가치를 남들이 원하는 기준에 맞춰 재단하면 실망만을 얻을 뿐이다.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향 평준화된 기준에 나를 끼워 넣는 것은 고통스럽고 힘든 것은 둘째치고 그 성패마저 장담할 수 없다. 결국,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는 나 자신이 답을 내려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요구되는 세상의 기준에 맞춰 스스로에게 고통을 줄 것인가, 아니면 지금의 내 상황에 최대한 만족하고 합리적인 발전을 도모할 것인가. 이 질문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끊임없이 따라다니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