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악의 유전학
임야비 지음 / 쌤앤파커스 / 2023년 9월
평점 :
러시아에서도 춥기로 소문난 '투루한스크'에 한 기묘한 마을이 세워진다. '홀로드나야'라고 불리는 이 곳은 보통의 마을과는 다르다. 개울을 사이에 두고 똑같이 설계된 건물들이 데칼코마니를 그리듯 형성되어 있고, 그곳에서는 남자아이 250명과 여자아이 250명 만이 살고 있다. 이들을 감독하는 사람은 '리센코' 후작으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라고 불렸고 이제 자신만의 과학적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이 마을을 건립했다.
리센코가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획득 형질의 유전'이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후천적인 능력은 다음 세대에도 유전이 된다는 가설이었다. 예를 들어, 극한의 추위에 노출된 채 살아온 부모에게서는 추위를 쉽게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노력을 해야 해. 노력을! 매 순간에 노력을! 끊임없이!
그래야 그 의지와 노력이 세포에 새겨지고, 그 특징이 알갱이로 응축되어 자식에게 전달되는 거야. 그게 바로 획득 형질의 유전이야.
그런 개인의 특징이 모이면 민족성이 돼. 한랭 내성도 추위를 이기려는 오랜 노력 끝에 결국 한 명 한 명에게 그 알갱이가 장착될 거고, 그게 대물림될 거야. 그렇게 한랭 내성은 러시아의 민족성이 될 거야! 되고야 말고!
《악의 유전학》 p.108
그는 이 가설을 위해 어린아이들을 매일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에 입수 시키며 잔혹한 실험을 시작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잡혀 온 탓에 이곳에서의 기억밖에 없는 아이들은 순순히 그에 따랐고, 실험은 성공적으로 진척되는 것처럼 보였다.
17살이 된 이후, 가장 추위를 오래 견딜 수 있는 아이들은 그곳에서 강제로 결혼을 하게 된다. 당연히 아이를 낳는 것도 강제적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갓난 아이들은 바구니에 담겨 얼음 연못 아래로 넣어졌고 무수히 많은 아기들이 저체온증으로 인해 죽어나갔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죽음을 슬퍼하던 리센코 후작이었지만 황제가 명한 실험 기간의 종료 시점이 다가올수록 그의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성향은 정점을 찍는다. 실험에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아이들은 무참히 살해하고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아이들만을 선택해 계속해서 실험을 강행했다.
그 열악하고 가혹한 환경에서 '케케'는 살아남았고 마침내 홀로드나야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자신의 신랑이었던 '베소'와 재회해 계속해서 삶을 이어나간다.
충격의 연속이었던 이야기였다. 나치의 유대인 포로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주제로 한 홀로코스트 소설은 많이 읽어봤지만 소련에서도 암암리에 이루어졌던 비밀 실험이 있었을 줄이야.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한 실험이었기에 더욱 잔인하고 가혹하게 느껴졌다. 책의 제목에 나오는 '악'의 근원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정말 입이 딱 벌어졌다. 책에 등장하는 사내의 정체가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리센코의 획득 형질의 유전 법칙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가 남긴 흔적은 인간의 악만큼은 유전된다는 사실을 선명히 비추고 있었다. 리센코가 저지른 악행들과 사내가 이후에 벌인 여러 가지 사건들은 일말의 죄책감과 양심이 없었다는 점에서 매우 흡사했던 것이다.
사실 소련의 역사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친절하게도 맨 뒷장에 역사 연보가 수록되어 있어 남겨진 이야기를 상세히 알 수 있었다. 허구의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이 섞인 이야기라 더욱 인상 깊었던 책. 인간 역사의 어두운 뒷면을 보게 되어 마음 한구석이 찝찝하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세상에 더욱더 알려져야 할 사건들이라고 생각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