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소설 - 상
미즈무라 미나에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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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소설의 기본 구성은 에밀리 브론테의 역작 폭풍의 언덕과 매우 비슷했다.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소년과 소녀, 그러나 신분의 차이로 엉켜버린 그들의 관계, 오랜 시간 이어지는 그들의 사랑과 덩달아 휘청거리는 주변 인물들. 영국의 거친 황야가 아닌 전후 근대화 되어가는 일본을 배경으로 아즈마 다로와 요코의 이야기가 천천히 그려진다. 그러나 폭풍의 언덕이 그렇듯 이 소설도 단순히 소년 소녀의 성장과 사랑이야기라고 설명할 수 없다. 근대화의 흐름 속에서 변해가는 일본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본격소설 이라는 제목처럼, 소설 속에는 시게미쓰, 사이구사 두 가문의 긴 역사가 마치 두꺼운 흑백 사진첩을 보는 것처럼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독특하게도 책의 도입에는 미국으로 건너간 작가 미나에의 시점으로 그녀가 주인공인 아즈마 다로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사건들, 아즈마 다로가 성공하게 되는 과정들이 <본격소설이 시작되기 전의 길고 긴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꽤 비중 있게 서술된다. 실제 미국에 살고 있다는 작가의 삶과 소설이 이렇게 연결되니 소설이 더 오묘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길고 긴 이야기의 말미에 등장하는 유스케는 소설 속 또 다른 서술자이다. 엄밀히 말하면 후미코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역할이지만 유스케의 존재로 소설은 상상과 실제의 경계를 교묘하게 넘나들지 않았나 싶다.

 

오래 전에 읽은 터라 세세한 부분들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지만 개인적으로 폭풍의 언덕 보다는 이 소설의 분위기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았던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 단순히 사랑이라는 단어만으로도 표현할 수는 없는 관계이고 시간임에 분명하지만-도 강렬했지만, 동양적 정서 때문인지 아니면 히드클리프의 복수가 사라졌기 때문인지 나에게는 맹목적일 정도로 서로를 향해 있는 아즈마와 요코의 애정이 훨씬 흥미롭고 절절하게 느껴졌다.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자석이 들어가 있는 한 쌍의 인형처럼 돌아앉아 있어도 결국 서로를 향해 몸을 틀고 마는 그들의 관계를...

 

이야기의 시작과 끝, 그 이후의 시간에도 그 자리를 지키던 후미코. 그녀의 인생도 소설에서 흥미로운 부분이다. 어쩌면 그녀의 삶이 소설의 주제이고 그 안에서 만나는 이들이 조연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으니. 아니, 조연이니 주연이니 명명하는 것 차 무의미하고 건방진 일일지 모른다. 마음을 먹먹하게 하는 아즈마와 요코의 사랑이 시작되기 전에도, 끝난 후에도 소설에서 이야기 하던 것은 하루에, 나쓰에, 후유에 세 자매의 인생 아니었던가.

 

책을 읽은 지 한 참이 지났음에도 종종 책 속에서 묘사되던 일본의 저택이, 폐허가 된 집터가, 주인공들이 상처받고 도망치던 장면들이 영화를 보는 것처럼 떠올라 멍해진다. 아무래도 좀 더 천천히 한 번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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