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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 개정판 ㅣ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4년 6월
평점 :
남자의 자리 - 아니 에르노
최근에야 나는 소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질적 필요에 굴복하는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술적인 것, 무언가 ‘흥미진진한 것‘ 혹은 ‘감동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나는 아버지의 말과 제스처, 취향, 아버지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던 사건들, 나 역시 함께 나누었던 한 존재의 모든 객관적인 표적을 모아보려 한다. 17
책벗뜰 ‘아니 에르노 읽기‘ 마지막 책이다. 처음 독모를 기획했을 때 책 선정에 꽤 고민이 많았다. 출간 순으로 읽어야 하나? 배경 순으로 읽어야 하나? ‘아니 에르노‘ 하면 떠오르는 책들을 위주로 읽어야 하나? 길지 않았지만 꽤 진지하게 고민하고 나서 선정한 책들은 그녀 삶의 ‘의미‘였다.
나 또한 그녀의 작품을 거의 읽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내용을 파악하고 있지는 못했다. 다만, 친절한 사이트 ‘책 소개‘를 정독하며 그녀의 유년, 그녀의 부모, 그녀의 남자, 그녀 자신의 성장기로 가닥을 잡았다. 그렇게 선정한 책들을 독모 회원들과 6개월간 읽었다. 6권의 책을 다 읽은 지금, 가장 처음 만났던 책 <단순한 열정>이 가장 노멀 한 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 <남자의 자리>는 ‘남자‘라는 명사를 빼도 내용을 벗어나지 않지만 남자라는 단어가 붙음으로 해서 그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각각의 ‘자리‘가 있다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알려준다. 옮긴이의 말마따나 작품 속 그녀와 그의 이야기에서 우린 왜 우리를 보고 있나. 이 지점이 그간 아니 에르노 작품을 읽으며 가장 절실히 느낀 점이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그 표적(겉으로 드러난 자취)을 모으겠다는 저자의 글은 꽤 순하다. 독모 참여자 대부분 그간 읽은 책에 비해 가장 읽어내기가 편안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나는 그것이 그녀가 17페이지에서 말한 이 글의 서두, ‘한 존재의 객관적 표적‘에 이유를 둔다. 아니 에르노 작품을 계속 읽다 보니 나도 글이 쓰고 싶어졌다. 이런 글 나도 쓸 수 있어! 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옮긴이가 말한 그것, 그녀의 이야기인데 그 속에서 나의 이야기로 치환되는 과정을 숱하게 겪었다. 보편적 경험이라 말하고 싶은 잊고 지낸 그 일들, 이를테면 악몽 같은 기억, 난데없이 되살아난 트라우마, 미친 듯 달려들던 주체 못 한 욕망... 그런 내밀한 감정들이 바닥으로 떨어뜨린 콜라의 마개가 따진 것처럼 기둥을 세우며 펑 하고 터져 오른다.
최근 글쓰기에 정성을 쏟고 있다. 계기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다음 이유가 없을 정도로 그녀의 소설 덕분이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나의 경험 또한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걸 깊이 느꼈다. 문학을 배운 적이 없지만 혹, 나에게 문학이 무어냐 묻는다면 이런 것이리라. 분명 다른 나라, 다른 배경, 다른 나이, 다른 사람인데 이상하게 그것들을 읽어 내리고 나면 정형되지 않은 내가 보이는 것. 바로 타자 도식이다.
아버지가 없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면 응당 나의 아버지가 생각날 것 같지만 0.1도 아버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발제를 보고, 독모를 하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책을 읽는 동안은 전혀 ‘나의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았다. 다만, 각각의 자리에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인물을, 저자의 서술처럼 주관적 감정이나 짐작을 배제하고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는 장면들에서 나를 둘러싼 각각의 자리들을 떠올렸다.
오래전, 지금은 세상에 없는 큰 외삼촌이 장기를 가르쳐 줬다. 장기를 배울 때 내가 가장 재미있어 했던 건 말 사이의 거리였다. 각 말들이 움직일 수 있는 방식이 정해져 있고, 그것으로 적진을 향해 앞으로 옆으로 머릴 써서 나아가는 게임. 각 말들의 자리, 그러니까 이미 포진된 말의 자리에 따라 내가 설자리가 정해지는, 그것들과 따로 움직여 무조건 나아가고 싶다고 나아가지는 것이 아니라 좁은 판위에서 주변 말의 자리를 끊임없이 주시하며 나의 자리를 찾아가는 장기. 장기판 위의 모든 말들은 그렇게 저마다의 자리와 움직임의 반경이 정해져 있었던 거다.
누군가를 지켜내기 위해 무수히 내버려진 작고 작은 장기 알들. 누군가가 우릴 지켜주었다면 그건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닌 우리의 위치를 먼저 정해둔 뒤 당신의 자리를 조절해가며 끊임없이 움직였을 그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책벗뜰 아니 에르노 읽기는 추가 진행 예정이다. 아무쪼록 꾸준히 읽어오신 분들과 함께 조금 더 머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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