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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거인 (15만 부 기념 스페셜 에디션)
프랑수아 플라스 글 그림, 윤정임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24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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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우연히 거인의 이를 사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지리학자인 ‘나’는 이 뿌리 안쪽 미세하게 그려진 지도를 발견하게 되고, 방안을 그득 채운 책들을 샅샅이 뒤져 그 지도가 가리키는 곳을 알아냅니다. ‘검은강’의 원천에 있는 ‘거인족의 나라’, 곧바로 스무명의 건장한 남자들과 함께 그 곳으로 향합니다.
어렵사리 계곡과 협곡, 절벽 사이를 지나 보름 가까이 노를 저어가던 중 외진 마을에서 잠시 쉬어가게 됩니다. 지리학자인 ‘나’는 탐험기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싶지만 험난한 지역적 특성상 실제적인 측정이 불가능 하지요. 수채화로 수첩에 자잘한 기록들을 채워가며 거인이 있는 곳으로 향해갑니다. 와족을 만나 일행들이 처참히 죽고 혼자만 살아남은 ‘나’는 되돌아가지도 못하고,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을 때쯤 한줄기 빛이 비쳐든 곳에서 거대한 발자국을 발견합니다. 곧이어 거인들의 묘지를 발견하고 계곡의 지형도를 만들고 묻혀진 해골 수를 세고… 기력이 다해 잠이 든 ‘나’는 자신을 둘러 싼 4명의 거인을 마주하게 됩니다.
거인들과의 생활은 굳이 얘기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그들의 몸 전체에 그려진 그림들, 그 문신들은 누군가가 그려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피부는 대기의 미세한 변화에 반응하듯 몸으로 자연과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나’는 오히려 가여운 존재가 되지요. 대지의 음성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으니까요.
다시 원래 사는 곳으로 돌아온 ‘나’는 그들의 존재를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책은 새로운 관점에 불을 지핍니다. ‘나’는 왜 그들을 이야기 하고 싶어하나이지요. 책을 읽다가 많은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이후 무수한 종족들의 존폐가 동그마니 떠올랐고, 마지막 최재천 박사님의 서평에서도 나오듯 새로운 생명체나 현상에 대한 사람들의 과도한 관심이 결국 그것들을 멸절시킬 수도, 번성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들어찼습니다.
거인의 존재 유무에 세계의 관심이 쏠리자 ‘나’는 각 지역을 돌며 순회강연을 하기에 이르고 한 날 도착한 해안가에서 예전 자신을 돌봐주었던 거인의 얼굴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에 염세를 느끼며 자신의 입을 봉인하지요. 그때 그 얼굴, 지그시 감은 눈이 무력하게 담겨진 그 얼굴이 ‘나’에게 묻습니다.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
‘나’ 루스모어는 모든 것들(서재의 책들과 쓰던 글들)을 다 내버려두고 고기잡이 배의 선원이 됩니다. 그리고 하늘과 바다만 바라보며 남은 세월을 풍류합니다. 내리는 항구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들으며 몸에 새기지만 자신의 이야기, 바로 거인의 이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며 마음 속에 강한 전율이 일었습니다. 루스모어가 원했던 것은 결코 거인들의 죽음이 아닐 지언데, 오히려 미개한 인간이 당장 눈앞의 것들에만 현혹되어 정말 중요한 것을 잊고 만다는 사실과 마지막 남은 거인 9명은 단순히 거인이 아닌 지난 세월 이 지구에 존재했을 무수한 생명들을 떠올리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루스모어라는 인물에 대해 마음을 들여 고민하고 곱씹었습니다. 그의 진심은 본의 아니게 왜곡되었지만 그가 진심으로 원했던 것을 무엇이었나. 나 또한 남들은 알지 못하는 무언가에 대해 알았을 때 선의의 방향으로 그 사실들을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았을까? 얼마 전 보았던 영화 ‘오펜하이머’까지 떠오르며 결국 인간은 스스로를 전멸시키는 것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언제고 이 모든 것들은 아스라이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말도 안되게 좋은 글을 읽은 느낌입니다. 친정엄마와 나이가 꼭 같은 저자 프랑수아 플라스는 20년 전 이 책을 만들며 (자그마치 22년이 지난 책이다) 지금 우리가, 이 사회가 이 책의 내용처럼 스스로를 멸절시켜나가는 세상을 감히 상상했던 걸까요?
표지 속 그림을 다시금 봅니다. 먼 산 굽이친 협곡들 사이를 말없이 응시하는 거인의 뒷모습이 못내 측은해집니다. 자연의 일부인 그들은 자연을 거스르는 인간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을까요. 책은 거인들이 ‘나‘, 즉 루스모어를 발견하고 보였던 모습들에서 길고 긴 감동을 보여줍니다. 길고 긴 잠에서 잠시 깨어 세상을 마주했을 그들에게 영원히 긴 잠을 준 인간으로서 참회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