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가족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춘미 옮김 / 현대문학 / 199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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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유목처럼 표류하고 있는 한 남자가 이제 막 죽었다. 물망천의 물들이 에워싸듯 흐르는 쿠사바 마을의 대나무숲 속 기울어져가는 오두막에서. 그는 쿠사바 마을의 물을 먹고 25년을 살다가 가자키리 다리를 건너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터무니 없는 대도시로 흘러간다. 4년과 반년 사이에 그를 걸레처럼 만들고 음식 찌꺼기나 가래처럼 뱉어낸 그곳에서 몹쓸병을 얻고 다시 돌아온 곳은 여전히 쿠사바 마을이다.

생전에 그는 쿠사바 마을을 떠나고 싶어서 떠난 것이 아니다. 간악하기만한 근친상간을 저지른 그는 물망천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의 죄는 동네에서 살해당한 변태처럼 한두해면 잊혀질 것이 아니었다. 그의 죄는 어머니의 입을 다물게 하고, 가족들을 치욕에 떨게 만들고 나아가 그 자신이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로 각인되어진, 물망천의 흐르는 물로도 씻기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떠난 것이고, 돌아온 후에도 은둔을 하며 자신의 시체조차 유기되어 쿠사바 마을을 떠도는 영혼이 된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불안과 고독이 작가의 보물임을 밝힌 바 있다.

-물의 가족-의 주인공은 영락없이 불안과 고독을 흡수했다. 이미 몸과 마음은 쿠사바 마을의 물로 균형이 유지되고, 가자키리 다리 저편의 물은 독액처럼 한 방울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어버려 그 물은 한 입 마시기만해도 자기파멸로 직결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깨달은 주인공의 영혼은 쿠사바 마을을 떠돌아 다닌다. 죽어도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가슴에 이고, 가족들을 숨죽여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물망천의 물처럼 청명히 시리다.

죽음과 탄생이 동일시 되는 사회처럼 그의 죽음도 야에코의 아가로 다시 거듭난다. 거북을 세 차례나 돌려 보냈던 그가 죽음을 진정하게 인지할 수 있었던 것도 야에코의 아가 덕분이다. 새로운 생은 검은 외투로 은폐된 조부의 마음에 균열을 일으키고 아버지의 거친 피리를 연주시키고, 형 내외에게 작은 행복을 안겨주며, 닫혔던 어머니의 입을 열게 한다. 그리고 야에코의 행복한 미래로 다가온다. 쿠사바 마을의 물은 물의 가족으로 아가를 받아 들인 것이다.

-물의 가족-은 주인공이 마지막까지 놓지 못했던 물빛 노트의 속내와 같은 소설이다. '나'가 구원받는 순간 아스라히 전해지는 카타르시스를 느낄수 있으리라. 유키오를 인용하자면 '죽음이 완성되는 순간 생이 회복됨을 느낀다' 바로 죽음과 소생에 관한 물빛 장시와 같은 이 소설에게 어울리는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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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노래
토니 모리슨 지음 / 문학세계사 / 198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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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판자촌에 살고 있는 늙은 여인은 손주들을 밖에 세워 두고 사무실안으로 들어간다. 집주인 마콘 데드는 여인을 노려본다. 여인은 탁한 음성으로 집세 얘기를 꺼낸다. 집세는 벌써 두달치가 밀렸지만 여인은 기한을 더 늘리려고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집주인은 차갑게 주말까지 돈을 요구한다. 늙고 초라한 어깨는 축 늘어진 채 밖으로 나온다. 여인은 모습을 모리슨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녀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젊고 물기가 많았더라면 그녀의 눈에서 반짝이는 물기는 그녀의 볼을 듬뿍 적시고 흘려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 나이가 되면 물기는 쉽사리 마르는 법이다.-

구슬픈 흑인의 영가. 솔로몬의 노래는 세상에 존재하는 흑인들의 영속적인 울림이다. 흑인이란 자신의 이름도 아무나가 부르는 대로 받아들이고, 성도 없는 존재다. 어떠한 사회적 지위도 꿈꿔선 안되고, 그저 숨을 쉬는 대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그래서 판자집의 집세를 관리하고 있는 유명한 의사의 딸과 결혼한 마콘 데드 주니어의 이름 역시 글눈 어두운 자신의 아버지가 한때 살았던 마콘과, 한 공무원의 실수로 'dead'란 이름을 가진 아버지도 또 그의 아들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손자 마콘 데드의 탄생서 부터 성년에 이르러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일들이 -솔로몬의 노래-의 주된 줄거리다. 마콘 데드는 우유배달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기타라는 친구가 있다. 아버지가 싫어하는 고모의 집에 어릴적 부터 드나들면서 특이한 향수를 느끼며 성장한다.

-솔로몬의 노래-에서 고모로 나오는 피레이트는 모리슨의 소설 -푸른 눈동자-의 클로디아나 -술라-의 술라, -비러브드-의 세스와 베이비 색스와 같은 인물이다. 그녀는 자유분방하고 지혜롭고, 독보적인 인물이다. -솔로몬의 노래-에도 예의 나무의 상징이 나온다. 모리슨은 거대한 뿌리를 가진 나무가 줄기를 타고 토란토란 만개한 제각각의 이파리에 이야기를 들려준다. 너무나 구슬프고 소박하며 연민스러운 이야기들은 바람에 흔들리며 노래를 부른다. 그것은 전설과도 같이 울리고 있는 솔로몬의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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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내 사랑 - 시그마 북스 022 시그마 북스 22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주영아 옮김 / 시공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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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오는 첫느낌은 순정 만화나 로맨스 소설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후 -안녕 내 사랑-에 비견될 만한 제목은 찾기 힘들 것이다. 정말 딱 이 제목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영미 현대 문학가중 하드보일드 소설의 대가로 알려진 레이먼드 챈들러. 하드보일러 소설은 능동적인 탐정이 논리와 분석력 수수께끼 요량의 추리력보다는 배짱과 주먹 그리고 권총으로 범인을 찾아 내는 형태를 말한다. 그리고 그 정의에 여전한 핵심인 탐정은 필립 말로우라는 인물이다. 이른바 행동문학을 추구했던 챈들러의 작품답게 이 소설의 주인공 필립 말로우 역시 그의 요소들을 따른다. 매 작품마다 나타나는 말로우는 챈들러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다.

-안녕 내 사랑-은 거인 무스 맬로이가 나타나면서 시작한다. 그는 8년전의 애인을 찾기 위해 감방에서 나오자마자 애인 벨마가 일하던 술집으로 찾아가지만 이미 바뀐지 오래다. 게다가 맬로이는 거기서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이 현장에 동참한 인물은 당연히 필립 말로우다. 그날 무스 맬로이를 놓친 말로우는 또다른 의뢰를 받는다. 보석 도둑과 합의를 하는 자리에 신변보호를 부탁받은 의뢰인데, 말로우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의뢰인은 살인을 당한다.

그리고 맬로이 사건과 조금씩 연관성을 지닌 것이 나타나고 그 둘을 우연히 잇고 있던 제시 플로리안이란 여자가 또 살인을 당하면서 사건은 여러갈래로 설킨다. 사건을 파헤치면서 필립 말로우는 위험한 순간을 수시로 맞닥들이지만 때마다 잘 빠져나온다. 그러다 마지막에 엄청난 반전이 나오는데, 연관성이 없어보이던 사건이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였다는 것을 말로우는 깨닫게 되고, 맬로이의 벨마를 향한 순애보적 -안녕 내 사랑-만이 남는다.

솔직히 이 소설은 21세기의 하드보일드소설 치고 더이상 놀랍다거나 새롭다거나 하지 않는다. 차라리 엉겨진 실타래 구조처럼 복잡한 제임스 엘로이의 소설이 더 박진감을 선사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시기이다. -안녕 내 사랑-은 하드보일드소설을 대중화 시킨 챈들러의 작품중의 하나이고, 발표당시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필립 말로우라는 캐릭터는 나름대로 매력있는 인물이다.

생각해 보면 요즘 부지기수로 쏟아지는 이런 류의 소설들은 챈들러의 소설에 담긴 클리쉐를 재탕하는 느낌이다. 음, 챈들러의 작품을 읽게 되어기쁘며, 지금 읽어도 재밌긴 하다. 참 읽다 보면 하루키의 소설에도 나오는 한 소품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것도 오마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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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밤
커트 보네거트 지음 / 동인(이성모)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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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컷의 유머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제 5의 도살장-을 보면 하워드 캠벨 주니어가 카메오처럼 등장한다. 그는 주인공 빌리 필그림이 듣게 되는 논문의 저자이다. 그 논문인즉 미군인들과 그들의 생태 비하로 가득한 내용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캠벨은 미출신 독일 고위 간부이자 유태인 육백만의 학살 주범이었으며 사형선고를 앞두고 목을 메어 자실한 인물로 묘사된다.
이렇게 언급된 인물 하워드 캠벨의 자전 고백처럼 쓰여진 소설 -내 영혼의 밤-은 보니컷의 초기 소설이다.

보니컷은 60년대부터 대두된 부조리 문학가중의 하나이고 독특한 세계관을 가진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이다. 보니컷은 자신의 최고작-제 5의 도살장-을 쓰기 한참 전에 -내 영혼의 밤-을 집필했다. 이 작품 역시 보니컷의 암울한 세계관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후에 발표된 -제 5의 도살장-과 흡사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실제 드레스덴 폭격 경험후 트라우마를 입었다는 작가는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전쟁을 매 배경으로 삼는다. 이 고백소설은 캠벨의 파란만장한 생을 짧막하게 보여준다. 추호도 자신에겐 죄가 없지만 2차 대전을 광견병에 비유할 정도로 경멸하는 캠벨은 운명을 피해가는 사람이다.

이스라엘 하이퍼 감옥에 수감된 캠벨은 재판 이틀 전에 감옥으로 부터 원고를 의뢰받는다. 자신이 여지껏 행한 일을 기록하는 일이다. 해서 캠벨은 나치때 만들어진 나치 친위대를 뜻하는 ss자가 들어있는 타자기를 부여받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 과거의 캠벨로 돌아간다. 그는 -제 5도살장-에서 잠시 언급된 대로 미출신의 독일 고위간부인 동시에 미국의 스파이였다. 괴벨스의 친구이며 독일 방송에서 독일인의 사기를 높이는 연설을 하였고 희곡 작가로도 명성을 얻는다. 그는 미국의 스파이지만 비르티넨이라고 자신이 명명한 푸른 요정만이 사실을 알고 있을 뿐 말년엔 미 스파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줄 증거가 없어 불리한 입장에 놓인다.

어둠자체로 묘사되는 캠벨은 사실 누가 정말 악인인지 모호하게 된다. 분명 그는 악인이다. 그러나 그런 그를 무조건적으로 죽이려는 스스로를 선이라 자청하는 사람이나 친구를 빙자해 팔아먹는 스파이나 이빨만 주저리며 아리안계 게르만인을 제외하곤 인종 멸시를 꿈꾸는 사람이나 보니컷에게 지울 수 없는 충격을 안겨준 연방군이라는 이름을 지닌 드레스덴의 민간인 13만 5천명을 불태운 나라나 어떤 것이 진정한 악일까?

-어디에 악이 있느냐고? 악이란 무조건적으로 미워하려하고, 하느님도 자기편에 서서 미워해 주기를 바라는,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마음의 한 부분이란 말이야. 악이란, 추한것을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의 한 부분이야. 악이란, 처벌하고 중상모략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걸 즐거워 하는 바로 그 저능아적인 마음보란 말이야- 캠벨의 고백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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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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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능선을 본적이 있는가. 발자국을 남기려고 밟고 또 밟아도 한없이 유동하는 모래 덕에 찍어둔 발자국은 힘없이 부스러져 버린다. 모래는 인간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8mm의 모래알들은 인간의 힘을 넘어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능은 자신들의 힘을 넘어선 것에 이끌린다. 해서 총총한 모래 바다를 이룬 사막의 형태는 더없이 매혹적이다. 사막의 형태. 그 물결치듯 이루어진 사구의 능선은 매끈한 여인의 실루엣을 닮았다. 능선의 굴곡마다 드리워진 짙은 음영은 감미로운 에로스를 풍긴다. 그러나 이 에로스는 현실로 돌아오는 왕복표를 가진 자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아베 코보는 안타깝게도 한 남자에게 왕복표가 아니라 편도표를 쥐어줬다. 남자는 사막을 벗어나면 자신의 체험을 직접 적어볼 작정이다. 그 제목은 '사구의 악마' 혹은 '개미지옥의 공포' 쯤으로 생각 중이다. 편도표를 쥐고 있는 남자에게 사막이란 바로 개미지옥 같은 공포이기 때문이다.

자, 한 남자가 사막으로 간다. 남자가 사막으로 가는 이유는 부득불한 정착에서 오는 끔찍한 경쟁뿐인 현실에서 해방되기 위해서고, 희귀한 곤충을 채집해 영구히 자신의 이름을 남길 요양에서이다. 목적이 뚜렷한 이 남자에게 앞서 말한 대로 아베 코보는 편도표만 쥐어 준 것이다.

좀길앞잡이를 찾기 위해 사막에 들어선 남자는 부서져 가는 모래 굴 속같은 집에 감금된다. 마을 사람들에 의해 감금된 남자. 감금된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모래 때문이다. 모래를 하루라도 퍼내지 않으면 무너지고 마는 그 집 때문이다. 잠시 동안 현실 도피를 꿈꾸던 그는 모래 구멍 속으로 홀인원이 되어 버렸다. 자신의 이름을 곤충 도감에 영원히 남기기 위해 왔다가 제자리에 있던 이름 마냥 완전히 지워 버린 꼴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니키 준페이가 아니라 그냥 '남자'인 것이다.

모래의 집엔 다름 아닌 여자가 살고 있다. 여자와 유쾌하지 않은 동거를 하기엔 남자는 부당하다는 생각이 치밀어 올라 탈출 계획을 짠다. 모래 구덩이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남자와는 달리 여자는 기이할 정도로 (모래에)순종적이다. 여자는 이미 모래의 사람이다. 그래서 형태를 갖추고 발버둥치는 남자의 모습이 허망한 것이란 걸 잘 알고 있다. 탈출에 실패한 남자는 모래와 악전고투하며 평생을 지내야 할 것이다. 형태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야말로 힘의 절대적인 표현이란 걸 깨달은 남자는 그래서 반년만에 내려온 새끼줄 사다리를 외면해버린다.

어쩌면 남자는 사막으로 올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 같다. 좀길앞집이는 사막에 종속된 곤충이고 여자 또한 사막에 종속된 인물이다. 그래서 서두 부분에 나오는 좀길앞잡이의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혼을 쪽 빼놓을 만큼 정신없이 날아다닌다. 날아 도망쳐 놓고는 마치 잡아보란 듯 빙 돌아와 기다린다. 옳다 싶어서 다가가면 다시 날아 도망쳤다가 또 돌아와 기다린다. 그렇게 애를 먹여놓고는 마지막에는 숲속으로 유유히 사라져 버린다.-

사막의 무수한 모래는 여자인 동시에 좀길앞잡이자, 어렵사리 왕복표를 쥐고도 안주하는 남자이기도 하다. 남자는 이제 더 이상 사막을 빠져나가지 않을 것이다. 이 곳을 나가봤자 반복적인 현실에 잠식된 나머지 매일 같이 모래를 퍼내야하는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이 얼마나 어두운 실존이란 말인가.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잊혀지지 않는 글귀를 되뇌여 보면,

-모래의 쪽에서 생각하면 형태가 있는 모든 것이 허망하다. 확실한 것은 오로지 모든 형태를 부정하는 모래의 유동뿐이다.-

결국 [모래의 여자]는 아베 코보가 생각해온 실존의 탐구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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