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엄마가 자신이 하는 비천한 일에 대해 알기를 원치 않았다. 간호사가 되려는 목적 중 하나는 부모로부터의 독립이었다. 그러므로 부모님, 특히 엄마는 그녀가 하는 일을 가능한 한 몰라야 했다. - P389

가족과 집, 친구 등 그녀가 알고 있던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된 지금, 글쓰기만이 이전과 지금의 삶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 P392

아무리 힘들고 비천한 일을 해도, 그 일을 잘 해내도, 또 형편없이 해도, 수업시간에 아무리 무시를 당해도, 아니 간호사 되기를 포기하고 대학 교정에서 평생을 학문에 매달려 지낸다 해도 그녀가 저지른 범죄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 P399

로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세실리아와 로비가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면...... 그녀만의 비밀스런 고통과 전쟁이라는 사회적 격변은 항상 서로 다른 세계의 일처럼 보였는데, 전쟁이 그녀의 범죄를 얼마나 더 무겁게 만들 수 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과거를 되돌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가 돌아오지못한다면...브리오니는 다른 누군가의 과거를 갖고 싶었고, 다른 누군가가 되기를 간절히 열망했다. - P404

브리오니에게 주어진 삶은 도망갈 문이 없는 방 안에 갇혀 사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 P4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삼 년 육 개월 동안 이런 밤을 견뎌냈다.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며, 사라진 자신의 소년기와 한때는 자신의 것이었던 사라진 삶을 생각하며, 새벽과 쓰레기같은 음식, 헛되이 보낼 또 하루를 기다리며 삼년 육개월의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 P286

기다릴게. 돌아와. 여기에는 아무리 희박하다 해도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편지와 새 주소가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생존해야 할 이유였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독수리처럼 맴돌며 먹이를 기다리는 스투카가 있는 주요 도로를 벗어나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 P286

일상 속에는 그만이 감상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 P288

모든 어린애가 거짓말로 한 남자를 감옥에 보내지는 않는다. 모든 어린애가 그렇게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태도로, 시간이 지나도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회의를 갖지 않을 만큼 지독할 수는 없다. - P323

마을 끝의 집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 앞에 펼쳐진 들판에 한 남자와 콜리 종의 개가 말이 끄는 쟁기를 따라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구두 가게에서 본 여자들처럼 이 농부도 퇴각 행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삶은 계속되며, 전쟁은 전쟁광들의 취미일 뿐 심각할건 없었다. 사냥개를 풀어 미친 듯이 사냥감을 쫓는 동안, 울타리 저 너머로 지나가는 자동차 뒷좌석에 앉은 여자는 뜨개질에 여념이 없었고, 새로 지은 집의 휑한 정원에서는 한 남자가 아들에게 공차기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렇다. 쟁기질은 계속될 것이고, 누군가는 그 농작물을 거둬들여 빻을 것이며, 또 누군가는 그것을 먹고...... 모두 다 죽지는 않을 것이다.⋯⋯⋯⋯⋯ - P332

오래 전, 전쟁이 터지기 전과 감옥에 가기 전에는 잭 탈리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기는 했어도 스스로 진로를 선택하고 또 바꿀 수 있다는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만이 만들어낸 망상이었다. 뿌리가 부실하면 나무는 자라지 못한다. 그는 아버지를 원했고, 바로 그 때문에 아버지가 되기를 원했다. 지천에 깔린 죽음을 목격하면서 아이를 바라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스러운, 그래서 인간적인 이런 바람이 무엇보다 간절해졌다. - P341

부상자들이 고통으로 절규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평화로운 곳에 작은 집을 짓고 가족을 이루어 살기를 꿈꾼다. - P341

기다림. 상대방이 다가올 때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기다림이란 너무나 힘겨운 말이었다. - P368

인간은 오만에서 나오는 자기 비난의 감정에 휩싸이면 너무 많은 책임을 떠안으려 하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 P37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녀는 나지막한 소리로 어린아이가 발음 연습을 하듯 또박또박 로비라고 불렀다. 뒤이어 그가 그녀의 이름을 속삭였을 때, 그녀의 이름은 완전히 새롭게 느껴졌다. 철자는 달라진 게 없었지만, 그 의미가 완전히 새롭게 변해버렸다. 마침내 그는 어떤 저속한 문학작품이나 인간의 위선으로도 깎아내릴 수 없는 세 단어를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녀는 자신이 먼저 이 말을 하는 것처럼 둘째 단어에 강세를 넣어 같은 말을그에게 속삭였다. 그는 종교가 없었지만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가 증인으로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해준 그 말은 보이지 않는 계약서에 남긴 서명 같았다. - P198

가슴이 오그라들 것 같은 그 순간, 그는 지금까지 누군가를 진심으로 증오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증오는 사랑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감정이었지만, 사랑과는 달리 얼음처럼 냉정하고 이성적인 감정이었다. - P200

언젠가 손님들을 초대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무슨 분야인진 몰라도 과학을 가르친다는 어느 교수가 분위기를 바꿔볼 요량으로 큰 장식촛대들 위를 날아다니는 벌레 몇 마리를 가리키며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이 벌레들을 빛 속으로 유혹하는 것은 빛 너머에 있는 더 깊은 어둠이라고 했다. 벌레들은 잡아먹히는 한이 있더라도 빛의 가장자리에 있는 가장 어두운 곳을 찾아가려는 본능에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곤충들 눈에 보이는 빛 속의 어둠은 착시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그의 이런 설명은 궤변처럼, 단지 설명을 위한 설명처럼 들렸다. 어느 누가 곤충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세상 모든 것에 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데도 그것들을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세상사를 그르치는 일이며 쓸데없는 짓일 뿐 아니라 화를 부를 수도 있다. 어떤 일들은 정말로 그렇다. - P215

다른사람들이 심심풀이로 읽는 책들을 전공으로 읽어놓고도 어떻게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 P219

그의 증오가 두렵기는 했지만, 어른에게서 증오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어른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아이들도 남을 증오할 수는 있지만 변덕이 너무 심하다. 어린애의 증오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어른의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엄숙한 의식과도 같았다.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올라섰다는 의미였다. - P226

원래 진리란 이렇게 낯설고 사람을 미혹에 빠뜨리곤 하며, 일상의 흐름을 거슬러가며 애써 찾아야 하는 것이니까. - P227

자신이 본 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순진한 브리오니가 롤라가 해야 할 일까지 다 떠맡아줄 것이다. 롤라는 그저 진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 그 진실을 빨리, 그리고 완전히 잊어버리고, 자신이 브리오니와는 다른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확신이 없는 거라고만 믿으면 되었다. 그의 손이 눈을 가리고 있어서 그를 보지 못했고, 공포에 떨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고 자신을 설득하기만 하면 되었다. - P2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온의 인생에는, 아니 자신의 인생에 대한 그의 이야기 속에는 비열한 사람도 없었고, 음모를 꾸미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배신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적어도 한 가지씩은 좋은 면을 가지고 있다는 레온의 말을 듣고 있으면 마치 그것이 모든 인간이 존재한다는 경이로운 사실의 이유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는 친구들이 했던 재미있는 농담을 기억해내어 들려주곤 했다. 레온이 하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나약함에 대해서 너그러워지곤 했다. - P155

어느 한 친구가 속을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거나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 느껴지면 레온은 시간을 두고 그 친구를 지켜보며 오래 생각한 끝에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마땅한 이유를 찾아내곤 했다. - P155

그가 아무 욕심 없이 그저 무사태평하게 사는 것처럼 비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과 천성의 합작품이었다. 세실리아는 결코 상상할 수도, 따라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 P158

성장한다는 것은 참으로 쓸쓸한 일이다. - P167

결국엔 다른사람들과 비교해서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 밖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무심코 하는 말과 행동이 우리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가르쳐주기도 한다. - P17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녀는 대학에서 여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 기껏해야 여자 조정 경기에 참가하거나 출세를 보장받은 남자 동급생들이 말쑥하게 차려입고 엄숙한 표정으로 서 있을 때 그 옆에 인형처럼 서 있는 것 같은 유치하고 순진한 역할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여학생들에게는 학위조차 주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 P99

감미로운 공상 뒤에는 현실 복귀라는 쓰라린 대가가 기다리고 있다. 공상을 통해 피해왔던 현실을, 더 악화되어버린 듯 느껴지는 현실을 다시 받아들이는 그 순간. 세부 하나하나까지 그럴듯하게 보이던 공상의 순간들은 구체적인 현실 앞에서는 한순간의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현실로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어려웠다. - P113

공상의 논리 앞에서는 누구나 무력하다는 착각이 그것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 P114

진실은 그보다 더 단순한 것이었다. - P1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