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그런 행동에 쉽게 화가 났다. 서로의 사이에 부려놓아진 것이 몹시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른 척하는 사람들 특유의 행동. 그러니까 우리는 최대한 여러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도, 끊을 수도, 이어갈 수도 있는데 꼭 자신에게 주어진 방식은 하나뿐인 것처럼 구는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 왜냐하면, 그 상황에서 가장 배제되고 소외되는 존재는 나 자신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에.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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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은 지금 이대로의 세계를 파괴하고 싶은 게 아니야. 지금 이대로의 세계에서 마땅히 차지해야 할 자기 자리를 찾고 싶은 거지. 다만 지금은 머릿속이 유혈로 가득 차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뿐이야‘ - P15

남자는 천성적으로 두뇌를 중시하지만 여자의 천성은 다르다는 관념 따윈 다수의 믿음에 불과하다. 단연코 태생적 사실이 아니다. 라는 생각 관념은 문화에 봉사하며 우리 모두의 삶이 취하는 형태에 핵심적으로 간여한다. 드디어 나는 깨달았다. 일하는 인간이라는 자아 관념을 일차적으로 떠올리지 못하는 무능력, 이제 보니 그것이 바로 여자라는 존재의 핵심적 딜레마였다. - P20

제대로 살지 못한 여자들의 삶은 가히 역사적인 규모로 저질러진 중범죄였고, ‘성차별주의‘라는 말을 비추기만 하면 그 즉시 현란하게 생동하는 심리 드라마였다. - P20

성차별주의, 그 한 단어가 이제 내 하루하루를 송두리째 좌우했다. 어딜 보나 성차별주의가 있었다. 날것의 잔혹한, 범상하고도 내밀한, 고대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건재해온 성차별주의가 눈에 보였다. 길거리에서도 보이고 영화를 봐도 보였다. 은행에서도 식료품점에서도 뉴스 헤드라인을 읽을 때도, 지하철을 탈 때도, 성차별주의는 친절하게 닫히는 문을 붙잡고 나를 기다려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학에서도 그것이 보인다는 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성장기를 함께한 책들을 펼쳐 들고, 그제야 처음으로 보았다. 그 책들에 나오는 대다수 여자가 피도살도 없는 뻣뻣한 막대기이고, 오로지 주인공의 운명에 좌절을 안기거나 행운을 선사하기 위해 등장할 뿐이라는걸. 그때 비로소 깨달은 바, 주인공은 거의 언제나 남자였다. 그들이 헤치고 나아가는 삶의 행보는 내가 언감생심 꿈꿀 수 있는 삶과는 결정적인 단절이 있거니와 어느 한구석 닮은 데도 없는데, 독자로 살아온 일평생 나는 그남자들과 나를 동일시해왔던 것이다. - P21

성찰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통찰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똑똑히 깨달았다. 그러나 이 깨달음을 곱씹어 흡수하고 받아들이는 데 다시 몇 년이 걸렸다. 최대한 통합된 자아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는 게 내 평생의 과업이 되었다. 위대한 안톤체호프가 우리 기억에 또렷이 새겨둔 표현을 빌리자면, "타인이 나를 노예로 만들었을지 모른다 해도, 나 자신을 쥐어짜서 내 안의 노예근성을 한 방울 한 방울 뽑아내야 할 당사자는 바로 나"였다. - P25

위대한 문학은 통합된 실존이라는 업적이 아니라, 그 위업을 향해발버둥 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각인된 분투의 기록이다. - P26

나는 여전히 대문자 L로 적힌 Life, 삶의 압력을느끼려고 읽는다. 여전히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기운들에 얽매이고 휘둘리는 주인공을 보려고 읽는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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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이지만, 그간 살면서 줄곧 느껴온 감정의 실체를 깨달은 순간이었다. 이전에는 단지 그 감정의 실체를 몰랐을 뿐이었다.
나는 누가 들을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씨발. 그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P39

그때는 조금 어른 같아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고, 어른 같아 보이려면 모든 걸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은 나름대로 무섭고 화가 났던 것 같다. 무서운 것을 엄마 아빠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누군가와는 나눠야만 했다. - P41

학교에서도 혼자였고 집에 돌아와서도 혼자였기 때문에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나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인생이 잘못된 건지 찬찬히 돌아보았다. 이름 모를 언니의 침이 묻은 숟가락과 더블비얀코를 신성한 연못에 던진 게 잘못이었을까. 미정이 아빠의 죽음을 목격한 게 잘못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잘못은 없었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뺏겼고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했을 뿐인데.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답답한 심경으로 아몬드를 들고 학교뒷산에 갔다. 루를 보기 위해서. - P55

미정이가 나의 엄마를 죽여주겠다고 선심 쓰듯 말한 이후로, 나는 허투루 말을 뱉지 않았다. 원인으로 말미암아 일어날 결과를 천천히 생각해보고 상황을 구성하는 사람이 되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제일 강렬하게 나를 매혹했던 주제는 그것이었다. 죽음과 은총. 완전히 생을 망각하고 사라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강한 이끌림. - P57

어른들 따위는 어느 시점부터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무언가를 너무도 쉽게 잊은 채로, 마치 그저 주어진 것인 양 생을 살아간다. 다 망가져가는 것과 다름없는 생을. 나는 그것이 세계가 나를 ‘외부인‘으로 만드는 교묘한 방식이라는 걸 깨우쳤다. - P72

이따금 속이 뒤집힐 때면 내가 만들었던 또하나의 작은 봉분을 떠올린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지독한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을 미정이에게 묻는다. 이게 바로 네가 내린 은총이냐고.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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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제일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또다른 못 견딜 마음으로 돌려 막고 있었다. 나는 살기 위해 내 삶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 P25

도배지는 도배지이다. 하지만 도배지를 벽에 붙이면 그건 벽지가 된다. 벽지를 구태여 도배지라고 부르지 않으니까. 그러면 그 벽지를 뜯어내면 그때부터 그것을 도배지라고 불러야 할까 벽지라고 불러야 할까. 나는 상황이 바뀔 때마다 내가 바뀐다고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돌이켜봤을 때 지금은 아주 다른 내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쪽으로. - P26

나를 돌보려면 나를 돌아보아야 하는데, 나는 나를 돌아보는 데 미숙했다. 일은 졸렬하게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손쓸 수 없을 만큼 좋아했다. 사랑에 있어서는 늘 나를 함부로 대하고 선을 넘어버렸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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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에는 일관성을 갈구하는 열망과 어설프고 미숙한 것들에 형태를 부여하려는 비상한 시도가 각인되어 있어, 우리는 거기서 평화와 흥분, 안온과 위로를 얻는다. - P10

무엇보다 독서는 머릿속 가득한 혼돈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며 순수하고 온전한 안식을 허한다. 이따금, 책 읽기만이 내게 살아갈 용기를 준다는 생각이 든다. - P11

나를 저 멀리 다른 세계로 훌쩍 데리고 가는 이야기의 쾌감만으로도 마냥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헤쳐나가고 있는 이 삶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어떤 의미를 끌어내야 할지 알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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