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이 그녀의 한 사람이었다. 실비의 심장이었다. 그가 그녀 안의 모든 분자를 바꾸어놓았다. 실비는 사랑이 해일처럼 강렬하게 다가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 순간을 꿈꾸었고, 그 꿈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사랑이 불가능할 줄은, 막다른 골목일 줄은, 말할 수 없는 것일 줄은 몰랐다. - P296

윌리엄은 아버지가 아이의 인생에 존재하면서도, 그리고 폭력을 휘두르지 않으면서도 아이를 망가뜨릴 수 있음을 알았다. 소리 없이 계곡을 떠내려가는 빙하 같은 부모님의 슬픔이 그를 형성했다. - P303

"하지만 깨달은 게 있어요. 내가 낭만적이라서, 대단한 삶을 살 운명이라서 그런 꿈을 꾸는 거라고 늘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진짜 인생이 두려워서 그런 꿈을 꾸었고, 너무 엄청난 꿈이라서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난 그런 사랑을 직접 본 적이 없었어요. 우리 부모님은 서로 사랑했지만 슬프게도 불행했어요. 우리 동네에 사는 다른 부부들도 다 그랬고요. 당신은 그런 사랑을 정말로 본 적 있어요?" -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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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단어씩 적어갈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이 책을 꼭 완성하고 싶다고, 이것을 쓰는 과정이 무엇인가를 변화시켜줄 것 같다고 느꼈다. 환부에 바를 흰 연고, 거기 덮을 흰거즈 같은 무엇인가가 필요했다고. - P10

어딘가로 숨는다는 건 어차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 P10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 - P11

거리를 걸을 때 내 어깨를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는 거의 모든 말, 스쳐지나가는 표지판들에 적힌 거의 모든 단어를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움직이는 단단한 섬처럼 행인들 사이를 통과해 나아갈 때, 때로 나의 육체가 어떤 감옥처럼 느껴진다. 내가 겪어온 삶의 모든 기억들이, 그 기억들과 분리해낼 수 없는 내 모국어와 함께 고립되고 봉인된 것처럼 느껴진다. 고립이 완고해질수록 뜻밖의 기억들이 생생해진다. 압도하듯 무거워진다. 지난 여름 내가 도망치듯 찾아든 곳이 지구 반대편의 어떤 도시가 아니라, 결국 나의 내부 한가운데였다는 생각이 들 만큼 - P23

서리가 내린 흙을 밟을 때, 반쯤 얼어 있는 땅의 감촉이 운동화 바닥을 통과해 발바닥에 느껴지는 순간을 그녀는 좋아한다. 아무도 밟지 않은 첫서리는 고운 소금 같다. 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부터 태양의 빛은 조금 더 창백해진다. 사람들의 입에서 흰 입김이 흘러나온다. 나무들이 잎을 떨어뜨리며 차츰 가벼워진다. 돌이나 건물 같은 단단한 사물들은 미묘하게 더 무거워 보인다. 외투를 꺼내 입은 남자들과 여자들의 뒷모습에, 무엇인가 견디기 시작한 사람들의 묵묵한 예감이 배어 있다. - P48

엉망으로 넘어졌다가 얼어서 곱은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서던 사람이, 여태 인생을 낭비해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씨팔 그 끔찍하게 고독한 집구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게 뭔가. 대체 이게 뭔가 생각할 때
더럽게도 하얗게 내리는 눈. - P55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 P59

하얗게 웃는다. 라는 표현은 (아마) 그녀의 모국어에만 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
그는 하얗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 (아마) 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 P78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 P81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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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함은 그냥 느낌일 뿐이에요, 윌리엄 느껴지는 대로 느껴도 괜찮아요." - P240

윌리엄이 눈을 감자 어린 여자애가 그의 옆에 앉았다. 그는 그 아이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아이에게 실체를 주었다. 부모님은 견딜 수 없어서 그 아이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여자애를 기억하는 사람이 세 명뿐인데 그중 아무도 소리 내서 말하지 않으면 그 아이는 역사에서 지워진다. - P241

윌리엄이 이 병원에서 지내는 것은 자신의 몸안에, 자신의 역사 안에 살려고 노력하기 위해서였다. 누나는 그 역사의 일부였지만 그녀 자체로 한 사람이기도 했다. - P242

삶은 기회였다. 하나씩 차례차례 열어봐야 하는 서랍장이었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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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는 한 팀이 된다는 것이 그녀가 지금까지 이해했던 것과는 다른 일종의 서약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비도 자매들도 스포츠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ㅡ그 동네 여자애들에게 그런 선택지는 없었다-알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이 남자들 사이의 말이 필요 없는 이해에 감탄했다. - P213

눈을 감은 실비는 윌리엄이 호수로 걸어들어가는 모습을, 숟가락에 담긴 물이 되었는데 숟가락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는기분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를 붙잡는 중력이 사라졌고, 그래서 그는 거대한 물에 녹아들려고 한 것이다. - P226

윌리엄은 이제 이름과 역사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 P227

병원에서 보송보송한 상태로 깨어나 침대 옆 의자에 앉은 실비를 보았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실패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인생 역정-실수들-을 무거운 배낭처럼 어깨에 짊어지고 계속 걸어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사실에 힘이 빠졌지만 너무 지쳐서 거부할 수가 없었다. - P228

누군가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기 안에 없다는 뜻은 아니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 P232

그는 자신을 조건부로 인정하는 아내를 탓하지 않았다. 그를 아예 인정하지 않았던 부모 아래에서 자랐으니까.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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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강해진다는 것은 딸을 품에 안고 혼자 선다는 의미였다. 옳은 것 같긴 했지만 외로운 자리였다. 줄리아는 어른이고 엄마였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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