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 자신을 만들어 내고 자신의 기반을 이루는 서사는 단 하나가 아니다. 애초에 자기라는 것은 다양한 이야기의 집합이다. 세계에는 가벼운 것이나 무거운 것, 단순한 것이나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온갖 서사가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조합하여 ‘하나의‘ 자기라는 것을 만들어 내고 있다. - P60

특히 우리는 이야기를 모아 자기 자신을 만들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모아 세계 자체를 이해하고 있다. 어떤 행위나 장면이 즐거운 술자리인지, 악질 성희롱인지, 우리는 그때마다 정의 내린다. 다양한 이야기와 ‘화법‘을 모아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 P60

그렇게 우리는 일상적으로 갖가지 이야기를 모아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늘 그것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다. 이야기는 살아 있다. 그것은 우리 손을 빠져나가 우리를 배신하고, 우리를 타고 앉아 우리를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돌려세운다. 그것은 살아 있다. - P61

자기 자신이나 세계는 서사를 이야기할 뿐 아니라 서사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한 서사는 갑자기 중단당해 찢겨 나갈 때가 있다. 또 서사는 때로 그 자체가 파탄을 내고, 다른 서사와 갈등하며 모순을 일으킨다. - P63

서사는 ‘절대로 벗을 수 없는 안경‘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서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자기 자신이나 세계를 있는그대로의 모습으로 마주할 수 없다. 그러나 서사가 중단되어 찢겨 나가 모순을 일으킬 때, 서사의 바깥쪽에 있는 ‘무언가‘가 어렴풋이 이쪽을 엿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 P63

있을 곳이 문제로 떠오르는 때는 반드시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든지, 아니면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없을 때든지, 둘 중 하나다. 따라서 있을 곳은 늘 반드시, 부정적인 형식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때라면, 있을 곳이라는 문제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조차 없다. 있을 곳이 문제가 되는 때는 반드시 그것이 ‘없을‘ 때에 한정된다. - P80

생명은 언제나 반드시 ‘길‘을 찾아낸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길,
이곳에서 나가기 위한 문이다. - P81

실제로 어딘가로 이동하지 않더라도 ‘출구‘를 찾아내는 일은 가능하다. 누구에게나 생각지도 못한 곳에 ‘바깥을 향해 열려 있는 ‘창‘이 있다. 내 경우에 그것은 책이었다. - P81

네모진 종이책은 그대로 온전히 바깥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네모난 창이다. 따라서 우리는 책을 읽으면 실제로는 자기 집이나 거리밖에 알지 못하면서도 여기에 없는 어딘가에 ‘바깥‘이 있고, 자유롭게 문을 열고 어디에라도 갈 수 있다는 감각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때가 오면 진정 창과 문을 열어젖히고 자기가 좋아하는 곳으로 풀쩍 뛰어나가는 것이다. - P82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세계에는 얼마 동안 돌아올 수 없는 사람도 있고,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도 적지 않다. 또는 처음부터 어디에도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도 있다. - P85

우리는 우리 인생에 꽉 묶여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처음부터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무언가 아주 불합리하고 복잡한 사정에 의해, 어느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장소에서 태어나, 다양한 ‘불충분함‘을 떠안은 ‘나‘라는 것에 갇혀, 평생을 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인생이란 것은 종종 퍽이나 쓰라리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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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안다. 다양한 소수자들 모두에게 자신의 공적 이미지를 -텔레비전에서, 영화에서, 문학에서 정치에서⋯⋯-가지는 것은 이 이미지가 심지어 자신을 왜곡하고 폄훼할 때조차 상당한 중요성을 띤다는 사실을. - P199

스스로를 보고 동일시할 수 있는 단순한 가능성, 나아가 우리 자신이 되는, 그러니까 그렇게 주조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개인적이고 집합적인 정체성의 구축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 P200

우리는 책들 속에서 자기 자신을 찾는다. 우리의 고유한 현재를 과거와, 역사와, 우리보다 앞서거나 동시대를 함께하는 또 다른 우리와 연결하며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지배받고 낙인찍힌 소수자집단은 모두... 책에, 도서관에, 이미지에, 가용한 재현에 호소한다. - P200

그런데 차별받거나 낙인찍힌, 그때까지 공론장에서 가시성이 없다시피 한 상태를 감수하던 소수자들의 가시성이 증가할 때, 특히나 새로운 재현이 더 이상 열등성의 부여, 고정관념의 유지에 부합하지 않을 때 이는 자신들의 헤게모니가 반격을 입고 불안정해졌다고 느끼는 다수자들, 지배자들 쪽의 적대감 어린 반응을 유발한다. - P203

부르디외는 ‘사회적 폭력 보존의 법칙‘을 기술한 바 있다. 폭력이 있었던 곳에 폭력이 있을 것이다. 폭력의 희생자였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대상으로 폭력을 재생산할 것이다. - P208

한 사람이 다른 사람 곁에 아무 말 없이 함께 있는 건, 가까운 사람들(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맺는 특권적 관계 양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것이 아주 높은 수준의 친밀성, 암묵적 동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 P217

우리는 과거를 지우지 못한다. 과거는 그랬던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는 기껏해야 현재의 상황과 미래로의 자기 투사projection desoi를 통해 과거의 의미를 변형시킬 수 있을 따름이다. - P219

우리는 종종 「희망」에 나오는 앙드레 말로의 문장을 인용한다. "죽음의 비극은 그것이 삶을 운명으로 변화시킨다는 데 있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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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는 『한 여자』 끝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환기한 후 이렇게 쓴다. "여자가 된 지금의 나와 아이였던 과거의 나를 이어주던 것은 바로 어머니, 그녀의 말, 그녀의 손, 그녀의 몸짓, 그녀만의 웃는 방식, 걷는 방식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를 잃어버렸다." - P172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암묵적이든 잠재적이든 어머니를 통해 유지되어온 내 과거와의 연속성이 이제 끊어져버렸다. - P181

계급을 바꾼다는 것, 사회적 환경을 바꾼다는 것은 말하는 법을 다시 배우도록, 이전까지 말하던 방식을 추방하도록 강제한다. - P184

여러 해 동안 내 안에는 가정 환경에서 지배적이었던 프랑스어와교육 환경에서 지배적이었던 프랑스어 사이에 단절이 있었다. - P189

의사소통의 언어학적 상황, 사회적 조건은 모든 교환과 상호작용에서 결정적이다. - P190

분열된 하비투스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가 일단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이동하고 나면 두 가지 언어학적 대역, 두 가지 신체적 에토스를 자기 안에 간직하게 된다. 우리는 어느 지점까지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옮겨 갈 수 있는데, 어느 쪽에서든 편안함을 느끼지는 못한다. 획득된 하비투스가 오래전부터 원초적 하비투스보다 우세했기 때문이고, 시간이 갈수록 후자는 희미해지고 지워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타계는 이 지워짐을 강화하게 된다. 아니, 차라리 법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 P193

계급 폭력은 아주 단순명료하면서도 잔혹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지배 언어에 능통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학교와 대학에서 얼마나 많은 학업적 실패가 비슷한 방식으로, 하지만 때로는 덜 눈에 띄는 방식으로 일어났겠는가? - P195

자기 어머니를 애도하는 것은 "자신의 어린시절"과 "잃어버린 젊음을 애도하는 것"이라고 알베르 코엔은 쓴다.‘ - P195

그는 모두에게 이렇게 훈계한다. "아직 어머니가 살아 계신 아들들이여, 당신의 어머니가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라. 만일 당신들 가운데 한 명이라도 내 죽음의 노래를 읽고 어느 날 저녁 어머니에게 더 부드럽게 대한다면, 나와 내 어머니 때문에 그렇게 한다면, 내 글쓰기는 헛되지 않을 것이다. […] 내가 당신에게 건네는 이 말들은, 아직 어머니가 살아 계신 아들들이여, 내가 나 자신에게 표할 수 있는 유일한 조의다. 아들들이여, 시간이 있는 동안,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시는 동안이다, 서두르시라. [...]하지만 난 당신들을 안다. 그 어떤 것도 어머니가 살아계시는 한 오래도록 당신들의 그 끔찍한 무관심을 없애지 못할 것이다. 어떤 아들도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리라는 것을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 아들들은 모두 어머니에게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며, 이 바보들은 곧 벌을 받는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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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엽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말이다. - P47

우리 남성은 무언가를 무조건 사랑하는 일이 참으로 불가능하다. - P48

실제로 몇몇 데이터를 보면 고독사는 남성의 경우가 훨씬 많다.
고독사를 하고 나서 발견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남성이 훨씬 길다. 우리는 살아서도 고독하고 죽어서도 고독한 것이다. - P49

우리는 무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언제나 겁을 먹고, 불안해하며, 공포를 느낀다. 차별이나 폭력의 대부분은 그런 불안이나 공포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 P50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을 참으로 싫어한다. 우리는 상대의 눈을 보고 싶지도 않고, 남이 자기 눈을 보지 않기를 바란다. - P51

두려움이나 긴장은 침묵에서 생겨난다. - P52

어떤 강렬한 체험을 남에게 전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야기 자체가 된다. 이야기가 우리에게 빙의하여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때 이야기의 매개 또는 그릇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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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아하는 일은 분석할 수 없는 것, 그냥 그곳에 있는 것, 색이바래서 잊혀 사라지는 것이다. - P12

인생은 단편적인 것이 모여 이루어진다. - P17

이러한 단편적인 만남을 통해 이야기를 들은 단편적인 인생의 기록이 그대로 그 사람의 인생이라고 한다거나 그대로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의 운명이라고 일반화하고 전체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 P19

어떤 사람이든 다양한 ‘서사‘를 내면에 담고 있다. - P29

우리가 눈으로 보면서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 P29

존재하는 것은 영원히 사라져 버리지만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남겨진다. - P31

이 세계에는 필시 무수한 헨리 다거가 있다. 그리고 헨리 다거와는 달리 발견되지 못하고 잃어버린, 헨리 다거 못지않게 감정을 뒤흔드는 작품이 무수하게 있을 것이다. 또 한 사람의 헨리 다거가 지금 내가 사는 이 동네에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곁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헨리 다거의 존재를 둘러싸고 가장 가슴이 울컥했던 점은 헨리 다거라는 사람 자체라기보다는, 또 다른 헨리 다거가 늘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 P37

사람들의 단편적인 인생에는 이모티콘을 많이 쓴 단편적인 서사가 있을 뿐이다. 문화적 가치관을 전도시켜 거기에서 예술적 평가를 끌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숨겨 놓지 않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서사는 아름답다.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철저하게 고독하며, 철저하게 방대한 훌륭한 서사는 하나하나의 서사가 무의미함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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