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아의 성실함에는 어떤 종류의 충성심 같은 게 포함돼 있었고 사실은 자신이 뭘 원하는지 정확히 모른다는 게 더 근접한 이유였을 것이다. - P91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 P96

친하다고 해서 비슷해질 필요는 없었다.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미소를 보내고 손을 흔들면 되었다. 민영은 그것을 납득시키면서 유지해야 하는 관계들이 피곤했고 적당한 기만으로 덮어두지 못하는 자신 역시 지겨웠다. - P97

"여기서 오래 혼자 살다보면 그냥 친절한 건지 특별한 감정인지 잘 구별 못하게 돼. 자기들끼리 선을 그어놓고 그 바깥에 있는 사람한테 친절하게 보이려는 사람들이 좀 있거든." - P108

"그건 어디 살든 다 마찬가지 같아." 다음 순간 승아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그럴 때면 말야. 왜 얼마 동안 어디에를 생각해봐. 거기에 대답만 잘하면 문을 통과할 수 있어." - P109

솔직히, 인류의 히스토리라는 게 다 멍청한 방향으로 조금씩 왜곡돼 있잖아요. - P118

사실 수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뿐 아니라 자신에게서도 도망치고 싶었는지 모른다. 잘못된 장소로 와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해도 되돌아 나가서 다른 경로를 찾기에는 두려운 나이, 결코 나아질 리 없는데도 그럭저럭 머물게 되는 계약직생활, 그리고 그런 사실들을 불현듯 깨닫게 만들었던 깨어지고 부서져서 결국 사라져버린 관계들. 수진은 이곳으로 떠나오며 그녀를 규정하는 나이와 삶의 이력에서 잠시나마 이탈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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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를 구하는 것은 승아가 열심히 해왔지만 동시에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 P33

그처럼 함께 겪은 일을 입장에 따라 다른 사안으로 분리해서 손익을 따지고 책임 소재를 묻는 것은 대체 어떤 사회적 맥락과 가치 구조에서 비롯된 사고방식일까. 분명 민영이 알고 있는 사고체계는 아니었다. - P49

그동안 내가 마이크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또한 마이크와는 다른 나의 사고 체계 안에서의 자의적인 해석이었을까. - P50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해야 할 때 편하다는 이유로 가까운 사람에게 그것을 전가하는 건 안이하고 옹졸한 태도였다. - P52

친밀하게 지내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관계가 호의라는 몇 개의 나무로 기둥을 세운 가건물이라면 성장기를 함께 보낸 친구와의 관계는 돌과 모래와 물, 거기에 몇 가지 불순물까지 더해서 오래 굳힌 시멘트집일 것이다. - P57

그때 민영과 엄마는 둘 다 자기가 일궈놓은 세계로부터 거부당했고 삶이 임시 거처였고 돌아갈 곳은 없었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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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에는 아름다움이 존재합니다. 기계는 그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직관은 AI가 따라잡기에는 너무 수준이 높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길 수 있을지를 걱정하진 않습니다. 5대 0으로 이길지, 5대 1로 이길지를 걱정할 따름이죠." - P356

"알파고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사람들이 기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유는 분명했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무력감과 공포감을 느꼈던 거다. 인간이란 존재가 너무나도 나약해 보였으니까. 이 승리는 우리가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증거다. 시간이 지나면 AI를 이기기가 훨씬 더 힘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 한 번의 승리・・・・・・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느꼈다. 한 번으로 충분했다." - P390

"알파고가 나보다 반드시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인간은 인공지능을 상대로도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믿습니다. 더 보여줄 수 있었는데 그게 참 아쉽습니다. 바둑은 아마추어이건 프로이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게임입니다. 즐거움이 곧 바둑의 본질이지요. 알파고는 분명 막강하지만, 바둑의 본질은 알지 못합니다. 나의 패배는 인류의 패배가 아닙니다. 이번 대국으로 드러난 것은 나의 약점이지 인류의 약점이 아닙니다." - P398

"일종의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내가 최고라고, 적어도 최고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인공지능이 제대로 결정타를 날렸죠. 어떻게 해도 이길 수가 없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어요.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바둑을 뒀습니다. 그때 바둑은 예의와 매너가 전부였어요. 게임보다 예술을 배우는 것에 가까웠죠. 크고 난 후에야 바둑을 두뇌 게임으로 생각하게 됐지만 배울 때는 예술이었어요. 바둑은 두 사람이 함께 만드는 예술작품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주 달라졌어요. AI가 도래하면서 바둑의 개념 자체가 바뀌어버렸습니다. 굉장한 충격이에요. 알파고는 나를 그냥 이긴 것이 아니라 무너뜨렸습니다. 이후로도 계속 바둑을 뒀지만, 은퇴는 진즉에 결심했어요. AI가 등장한 후로는 내가 최정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게 복귀해서 미친듯이 노력해 최고의 바둑 기사가 되더라도, 최고일 수는 없어요. 세계 최고가 되어도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있으니까요." - P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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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무책임한 낙관과 자기 연민이 불러오는 비관 둘 다를 경계해왔다.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하면서 주어진 조건에 순응해왔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언제까지나 그런 사람만은 아니란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 P21

떠나오기 전 그녀는 주변의 모든 것이 자신을 밀어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들에게서 떠나온 지금은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인 민영에게 또 거부당하는 기분이었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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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핸드폰 액정 속의 환영이라는 단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흔하고 일상적인 말이었지만 그때의 승아에게는 왠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승인과 호의가 담긴 유의미한 단어로 여겨졌다. - P19

눈앞에서 문이 닫히더라도 그게 끝이 아니고 어딘가에 환영이라고 적힌 다른 문이 있다. 그것이 마치 어떤 계시처럼 느껴졌던 승아의 눈에는 그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으로 보였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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