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말할 때의 어조는 일반적으로, 거의 예외 없이 두 사람 간에 이미 아주오래 전부터 정초된 적대적 거리(특히 아버지에 대해 어머니가 가진)를 표현했다. 그 거리는 그들의 관계적 일상, 그들의 생활양식이 되었다. 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머니는 평생 불행했노라고. - P52
이것이 바로 안셀름 스트라우스와 바니 글레이저가 상호 가식mu tual pretense의 ‘의례적 드라마‘라고 부른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 코드화된 역할을 맡는 일종의 연극 속에서 ‘가장한다.‘ 상호작용은 이 ‘가장‘에 의해 형성된다. 이들은 각자 타인의 게임을 믿는 것처럼, 진실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가장한다. 더욱이 이 상호 ‘가장‘은 그런 상황에서 너무나 필요한 나머지, 우리는 각자 기어코 그것을 조금은 믿어보려 애쓰며, 혹은 적어도 이 환상들을 잠정적 진실로 간주하도록 -반은-스스로를 납득시킨다. 하지만 현실은 바깥에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모를 수 없다. - P58
요양원 입소는 거의 언제나 한 개인의 삶에서 근본적인 단절을 표상한다. - P59
그것은 단순한 이사나 주거지, 생활 장소, 환경의 변화 문제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로부터의 뿌리 뽑힘이자, 벗어나기도 어렵고 원래 상태로 돌아가기도 어려운 감정적 ‘쇼크‘를 야기하는 총체적 격변의 문제인 것이다. - P60
죽음은 확실하나 시간은 불확실하다. - P60
그녀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면서 강제로 함께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과 갇힌 채 내버려진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전에 어머니는 ‘내 집‘에 있을 때 그녀의 것이었던 세계와 단절되었고, 그것을 채 애도하지도 못했다. 비록 그 세계가 지난 몇 년 동안, 특히 지난 몇 달 동안 정말 소수의 것들 -또 소수의 관계와 만남들-로 축소되었을망정 말이다. - P71
요양원에 정착하는 일은 단지 아주 많이 나이 든 사람들, 대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쇠락하고 허약해진 사람들이 가득한 세계로의 입장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강제된 사회성, 여간해서는 스스로 빠져나갈 수 없는 사회성으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 P71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산업사회에서 개인들은 "나이 들고 허약해짐에 따라 사회로부터, 나아가 자신들의 가족과 친지로부터 더욱 격리되었다. 서로 모르는 노인들끼리 모여서 함께 사는 기관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높은 수준으로 개인화 과정이 진척되었는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퇴직 전까지 가족 범위를 넘어선 이러저러한 모임의 친구들, 친지들과 감정적 유대를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대개는 늙어가는 과정 자체가 가족 범위를 넘어선 이러한 관계들을 점차 약화시키는 과정을 동반한다." - P73
엘리아스는 계속해서 말한다. "해로하는 노부부를 제외하면, 요양원에 들어가는 것은 오랜 감정적 유대가 최종적으로 끊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그 개인이 어떤 긍정적·정서적 관계도 맺은 적 없는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 또한 의미한다. 건강을 돌봐주는의사와 간호사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노인들은 정상적인 삶으로부터 격리되고 낯선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한다. 그것은 개인에게는 외로운 일이다. 내가 여기서 걱정하는 점은, 아주 고령이 될 때까지도 매우 활발하게 지속되는 성적 욕구의 문제뿐 아니라 함께 있는 것을 즐기고 같이 있으면서 정서적 만족을 느끼는 인지상정의 문제다. 요양원에 들어가게 되면서 이런 종류의 인간관계 역시 줄어들고 거기에서는 대체물을 찾기 어렵다." - P74
"그래서 많은 요양원이 외로운 사막과 같은 것이다." - P74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그토록 유려하게 보여준 ‘시선‘의 드라마는 바로 상호성이다. 우리만이 유일하게 타인들을 응시하고 그로써 판단하고 구성하며 그들의 존재,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할 힘을 지닌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들을 응시하는 만큼이나 그들도 우리를 응시한다. 우리가 우리의 진실과 그들의 진실을 결정할 힘을 우리가 독점하길 바라는 만큼이나 그들도 우리의 진실을 결정할 힘을 가진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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