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은 지금 이대로의 세계를 파괴하고 싶은 게 아니야. 지금 이대로의 세계에서 마땅히 차지해야 할 자기 자리를 찾고 싶은 거지. 다만 지금은 머릿속이 유혈로 가득 차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뿐이야‘ - P15

남자는 천성적으로 두뇌를 중시하지만 여자의 천성은 다르다는 관념 따윈 다수의 믿음에 불과하다. 단연코 태생적 사실이 아니다. 라는 생각 관념은 문화에 봉사하며 우리 모두의 삶이 취하는 형태에 핵심적으로 간여한다. 드디어 나는 깨달았다. 일하는 인간이라는 자아 관념을 일차적으로 떠올리지 못하는 무능력, 이제 보니 그것이 바로 여자라는 존재의 핵심적 딜레마였다. - P20

제대로 살지 못한 여자들의 삶은 가히 역사적인 규모로 저질러진 중범죄였고, ‘성차별주의‘라는 말을 비추기만 하면 그 즉시 현란하게 생동하는 심리 드라마였다. - P20

성차별주의, 그 한 단어가 이제 내 하루하루를 송두리째 좌우했다. 어딜 보나 성차별주의가 있었다. 날것의 잔혹한, 범상하고도 내밀한, 고대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건재해온 성차별주의가 눈에 보였다. 길거리에서도 보이고 영화를 봐도 보였다. 은행에서도 식료품점에서도 뉴스 헤드라인을 읽을 때도, 지하철을 탈 때도, 성차별주의는 친절하게 닫히는 문을 붙잡고 나를 기다려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학에서도 그것이 보인다는 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성장기를 함께한 책들을 펼쳐 들고, 그제야 처음으로 보았다. 그 책들에 나오는 대다수 여자가 피도살도 없는 뻣뻣한 막대기이고, 오로지 주인공의 운명에 좌절을 안기거나 행운을 선사하기 위해 등장할 뿐이라는걸. 그때 비로소 깨달은 바, 주인공은 거의 언제나 남자였다. 그들이 헤치고 나아가는 삶의 행보는 내가 언감생심 꿈꿀 수 있는 삶과는 결정적인 단절이 있거니와 어느 한구석 닮은 데도 없는데, 독자로 살아온 일평생 나는 그남자들과 나를 동일시해왔던 것이다. - P21

성찰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통찰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똑똑히 깨달았다. 그러나 이 깨달음을 곱씹어 흡수하고 받아들이는 데 다시 몇 년이 걸렸다. 최대한 통합된 자아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는 게 내 평생의 과업이 되었다. 위대한 안톤체호프가 우리 기억에 또렷이 새겨둔 표현을 빌리자면, "타인이 나를 노예로 만들었을지 모른다 해도, 나 자신을 쥐어짜서 내 안의 노예근성을 한 방울 한 방울 뽑아내야 할 당사자는 바로 나"였다. - P25

위대한 문학은 통합된 실존이라는 업적이 아니라, 그 위업을 향해발버둥 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각인된 분투의 기록이다. - P26

나는 여전히 대문자 L로 적힌 Life, 삶의 압력을느끼려고 읽는다. 여전히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기운들에 얽매이고 휘둘리는 주인공을 보려고 읽는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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