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시간이지만, 그간 살면서 줄곧 느껴온 감정의 실체를 깨달은 순간이었다. 이전에는 단지 그 감정의 실체를 몰랐을 뿐이었다.
나는 누가 들을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씨발. 그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P39

그때는 조금 어른 같아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고, 어른 같아 보이려면 모든 걸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은 나름대로 무섭고 화가 났던 것 같다. 무서운 것을 엄마 아빠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누군가와는 나눠야만 했다. - P41

학교에서도 혼자였고 집에 돌아와서도 혼자였기 때문에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나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인생이 잘못된 건지 찬찬히 돌아보았다. 이름 모를 언니의 침이 묻은 숟가락과 더블비얀코를 신성한 연못에 던진 게 잘못이었을까. 미정이 아빠의 죽음을 목격한 게 잘못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잘못은 없었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뺏겼고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했을 뿐인데.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답답한 심경으로 아몬드를 들고 학교뒷산에 갔다. 루를 보기 위해서. - P55

미정이가 나의 엄마를 죽여주겠다고 선심 쓰듯 말한 이후로, 나는 허투루 말을 뱉지 않았다. 원인으로 말미암아 일어날 결과를 천천히 생각해보고 상황을 구성하는 사람이 되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제일 강렬하게 나를 매혹했던 주제는 그것이었다. 죽음과 은총. 완전히 생을 망각하고 사라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강한 이끌림. - P57

어른들 따위는 어느 시점부터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무언가를 너무도 쉽게 잊은 채로, 마치 그저 주어진 것인 양 생을 살아간다. 다 망가져가는 것과 다름없는 생을. 나는 그것이 세계가 나를 ‘외부인‘으로 만드는 교묘한 방식이라는 걸 깨우쳤다. - P72

이따금 속이 뒤집힐 때면 내가 만들었던 또하나의 작은 봉분을 떠올린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지독한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을 미정이에게 묻는다. 이게 바로 네가 내린 은총이냐고.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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