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내 마음을, 말로 꺼내놓고야 알 수 있었다. 이제야 혼자 힘으로 해낸 것이 있는데, 그걸 걷어차고 또다른 곳으로 탈주하려는 마음이 스스로도 버거웠던 것이다. 뭔가를 좋아하고 또 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렇게나 무겁구나. 그럴 수도 있구나. 그런 마음이 나를 짓눌러 아침마다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 P40

엄마에게 배운 것은 두 가지다. 두 가지 같지만 실은 한 가지인지도 모르겠다. 하나는 수치심. 나는 엄마가 나를 대하는 방식에서 수치심을 느꼈고 그것을 느끼지 않는 방식으로 살고자 애썼다. 나는 엄마가 창피함이나 수치심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길거리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거나 좋던 분위기도 잡치게 만드는 엄마의 들쑥날쑥한 날카로움이 나는 언제나 부끄러웠다. - P59

엄마가 가르쳐준 두번 째가 말이나 해봐, 하는 말이었다 그 말 역시 나에게는 수치심을 동반했었다. 나는 부탁이나 흥정이 너무 싫고 어려웠고 그런 상황이 오면 받아내야 할 것도 포기하는 성격이었는데 엄마는 그런 내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다. - P60

직업을 바꾸게 되는 때, 그런 때는 살면서 몇 번 없고, 익숙했던 것과 작별하고 새로운 것과 인사하며 다시 살아 있음을 느끼니까. 거기에 그 직업을 좋아하게 된다면, 없던 용기까지 생긴다. 새로워질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 P61

한동안 엄마와 나는 서로에게 잔인했다. 그렇게 구는 법밖에 몰라서 그랬던 것 같다. 나의 비정하고 박정한 면은 모두 엄마에게서 왔다고, 꽤 오래 생각해왔다. - P63

엄마와 나는 화해하는 방식도 이상했다. 모든 엄마와 딸이 조금쯤 이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하다는 말 없이 화해했고 서로에게 죽일 듯 퍼붓던 심한 말을 잊었다. - P63

아무래도 슬픔은 고체다. 내가 제일 많이 떠올리는 형태는 어릴 적 봤던 바이올린 활에 바르는 송진덩어리다. 슬픔은 마음 한구석에 송진 같은 고체 형태로 존재하다가 어떤 녹는점에서 녹아 흐른다. 액체가 되어 온몸으로 퍼지기도 하고 자칫하면 눈물이 되어 쏟아지기도 한다. 슬픔의 녹는점은 누군가의 한마디나 체온, 혹은 해질녘의 버스 정류장이나 혼자 멍하니 보내는 주말의 긴긴 낮일 수도 있다. - P67

나는 과거의 사람들을 만나기가 두려웠다. 다른 언어를 쓰는 것처럼 겉돌까봐. 서로의 현재에는 관심이 없다는 걸 들킬까봐. 순간의 반가움으로 덜컥 약속을 잡았다가 몇 시간을 곤란하게 보낼까봐. 무엇보다 과거의 나를 기억할까봐 두려웠다. 나는 다 잊었는데. 잊으려고 애썼는데 말이다. 그게 뭐가 그렇게 두렵냐고 묻는대도, 두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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