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 일한 첫 달부터 나는 주방일이라는 게 이 세상 그 어떤 일보다 빡세다는 걸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 P18

"나처럼 나이들어 몸은 망가졌지만 정신은 멀쩡한 인간이 되면 말이지." 그가 말했다. "그렇게 되면 혼자일 때 고통을 덜 느껴. 다른 노인네들을 보고 있으면 병들고 망가진 자기 모습이 떠오르니까." - P21

"Pauca meæ, 이건 라틴어야. ‘내게 남은 건 거의 아무것도 없다‘라는 뜻이지. 여기 보이는 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것들 가운데 십분의 일에 지나지 않아. 아, 나머지를 전부 잃고 오로지 이 삼천 권만 선택해야 했을 때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던지!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것에 비견할 만한 고통이었어. 그 고통이 어떤 건지 알겠나?" - P22

타인의 삶을 그렇게 체화해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미래에 직면하게 될 때의 그 불안. 홀든의 두려움은 바로 나의 두려움이 된다. - P36

내가 이 일을 하면서 느끼는 유일한 즐거움은 왔던 방향을 되돌아가면서 거주자 각자에게 잘 다려서 고이 접은, 세제 향기가 폴폴 나는 깨끗한 옷가지들을 돌려주는 것이다. - P42

기력이 없어서 침대 위에 눕거나 안락의자에 앉은 채로 반수상태에 빠져 있는 이들. 나는 그 잠든 행성의 침묵을 지켜보면서 최악의 방식으로 끝을 향해 가는 그들의 생을 바라본다. - P43

아, 생업의 세계여, 얼마나 행복한지! 이 문제를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있을까? 엄마? 그럴 순 없다. 피키에 씨? 이런 일로 그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다. 책 읽기는 신성한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꾹 참는다. 그러면 매번 효과를 보는데, 소리 내어 책을 읽는 동안 나를 옭아매고 있던 모든 매듭들이 조금씩 조금씩 풀린다. 한장 한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 폭군이 나에게 가하는 그 모든 모욕들이 하나하나 지워진다. 낭독이 끝날 때쯤이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화가 모두 사라진다. - P44

다 지나고 나서 보면 선명하게 보이지만, 걷고 있는 당시에는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잘 보이지 않아, 그저 본능이나 직관에 따라 걸어갈 뿐. 하지만 부르디외, 바르트, 푸코, 프로이트, 마르크스 같은 많은 저자들의 책을 읽음으로써 나는 그들에게서 빛을 얻었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 - P51

네가 옳다고 믿고, 확신에 가득찬 무언가를 위해 행동에 나설때 말이다. 타인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야심을 품는 건 문제가 있어. 근본적인 문제가. 손을 놓는 순간, 바로 그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지. - P52

지적 모험을 넘어, 서점 주인이 날마다 접하는 건 바로 인간 존재들이 이루어낸 응축물들이야. 그런 응축물들을 접할수록 독단에서 멀어지게 되지. - P53

책은 우리를 타자에게로 인도하는 길이란다. 그리고 나 자신보다 더 나와 가까운 타자는 없기 때문에, 나 자신과 만나기 위해 책을 읽는 거야. 그러니까 책을 읽는다는 건 하나의 타자인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행위와도 같은 거지. 설령 그저 심심해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책을 읽는다 해도 마찬가지야.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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