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피안사 비로자나불 앞에 여러번 섰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저 쇳덩이가 나에게 침묵의 언어로 내려주는 낱낱 사항들을 남김없이 받아내기 위하여. 그러면서 한편으로 우리 시대의 불상은 무엇을, 어떤 이미지를 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20세기의 대불(大佛)들, 낙산사의 해수관음은 화려한 의상이 빛난다. 법주사의 청동 미륵상은 혹시 육사 출신이 아닌가 싶으며, 동화사의 통일 약사여래상은 턱과 목이 돈깨나 벌게 생겼다. 불가에 계신 분들이 나를 방자한 놈이라고 한다 해도 할 수 없다. - P256

우리나라의 옛마을에는 서원이 있고, 산속에 절집이 있다. 절집은 아무리 허름해도 온정이 느껴지는데 서원은 아무리 번듯해도 황량감과 황폐감만 감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사실, 사람이 살고 안 살고의 차이다. - P270

고향을 쫓겨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연고도 없는 낯선 동네를 찾아가서 다시 농사짓는 일, 도회로 나아가 막노동 품을 파는 일, 신대천으로 이주하여 가게 하나 내보는 일, 그 이상의 선택은 없다.
오직 한 가지 이유, 운문면 대천리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살았다는 이유 하나로 이들은 졸지에 캄캄한 바다에 던져진 조각배이고, 사막에 떨어진 씨앗 같은 미물이 되고 말았다는 데 아픔과 슬픔이 있는 것이다. - P272

하여 그해 가을 운문국민학교에서 열린 죄잔치로 치러졌다. 그러나 이들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이 진국들은 운동회날 원없이 뜀뛰고 원없이 춤추면서 서러운 인생은 팔자소관으로 돌리고 웃음을 잃지 않은 생의 달관자들이었다.
그들을 보고 있는 내 눈시울만이 공연히 붉어졌을 뿐이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분들은 어쩌면 울고 싶어도 울 눈물마저 말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 P274

하기야 현실을 뛰어넘은 예술은 없다. 그 모두가 현실의 모방일 뿐이며 현실은 항상 예술가, 정치가, 학자를 앞질러 지나갔다. - P274

아리따운 자태로 말하든, 늘씬한 각선미로 말하든, 늠름한 기상으로 말하든, 연륜의 근수로 말하든 운문사 소나무는 가장 아름다운 조선의 소나무이며, 조선의 힘과 자랑을 가장 극명하게 상징한다. 뿐만 아니라 운문사 소나무는 조선의 아픔과 저력, 끈질긴 생명력까지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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