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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세상에 홀리다 - 신화, 종교, 과학에 얽힌 시각적 경이로움의 역사
줄리언 스팰딩 지음, 김병화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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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가 느끼는 예술이라는 개념은 서구가 최근에 만들어낸 발명품이다. 과거 사람들은 예술이라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고대 예술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들은 대체로 인간의 감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원래 신들에게만 보이려던 것이었다. 투탕카멘의 황금가면을 제작한 장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물건이 대중에게 전시되고 있음을 안다면 놀라서 기절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성모독이니 말이다. 예술이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최근에 생긴 서구적 발상이다, 

 

눈은 그저 렌즈에 불과하다. 이제 우리는 두뇌로 본다. 두뇌가 어떤 방식으로 보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신비스럽다. 예를 들면 극히 최근에야 과학자들은 뭔가를 보는데 1초의 몇 분의 일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므로 우리 두뇌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가진채 술수를 부리는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뭔가를 보는 것과 동시에 행동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디즈니 테마파크가 성공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놀라움이 없는 시대에 놀라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놀라움은 돈을 낸 오락의 웃음이며 진정한 놀라움을 발생시키는 신비적인 요소는 결여되어 있다. 

 이 책은 경이감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경이가 어떻게 하여 종교적 신앙, 예술, 과학, 수많은 사회 구조들을 발생시켰는가 하는 것을 설명한다. 이 책은 인류가 어떻게 하여 점차 그런 경이감을 잃게 되었는지 기술하며, 힘들더라도 이 감각을 다시 발견하려는 노력을 시작하고 있는지 묻는 것으로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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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세계로의 초대 - 모성과 카오스, 에로스의 판타지
시미즈 마사시 지음, 이은주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책 한권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집 근처에 태종대가 있어 슬슬 걸어가 보기로 했다. 어제 먹은 저녁이 소화가 덜 된 것 같기도 하고 집 앞 벚꽃이 예뻐서 좀 걷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슬슬 걷자고 한 것이 1시간 정도 걸렸다;_ '  

태종대에는 소풍 나온 중학생들이 꽤 많았다. 벤치에 앉아 책 읽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몇 명이 지나가면서 쳐다보았는데 뭔 얘기들을 하는지 까르르 까르르 웃는 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ㅎㅎ 

한동안 책에 집중할 수 없었지만 어쨋든.

이 책-미야자키 하야오 세계로의 초대-은 대학교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읽으려고 했던 책 중에 하나였다. 어떤 학과에 가야할지 모르겠던 고3 때 친구들이랑 우르르 몰려다니면 남포동에서 영화보고 밥 먹는 게 일상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을 때 이 애니메이션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그야말로 미야자키 하야오에 푹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도 애니메이션과가 있는 학교를 지원하게 만들 정도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매혹적이었다. 거부하기 힘든 소품들과 공간들. 그리고 오래된 것 같으면서도 거슬리지 않게 공간을 지어내는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도 그런 창작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라 믿으며 꽤 열심히 학교를 다녔던 것 같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가 많은데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만화영화-정도로 치부될 수만은 없는 이유를 알려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구나 아이였던 적이 있으니까 또 언제든 아이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어른들도 많이 있으니까 
 

모두 가슴을 열고 말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아이를 한 조각씩 품고 사는 것 같다. 

그래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가오나시 캐릭터가 가장 안쓰럽고 마냥 미워하기 힘들었다.

청개구리를 삼킨 가오나시가 유야(신의 온천목욕탕)에서 금조각을 미끼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치히로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 그러했다는 것 , 애정에 목마른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하지만 손 내밀면 약해 보일까 봐.. 아... 아... 소리 밖에 내지 못하는 가오나시. 한번도 자신의 목소리로 뭔가를 말하지 않던 하얀 가면.

 

p134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는 색다른 캐릭터가 많이 나온다. 그 중에 보.
갓난아기지만 몸은 치히로의 세배, 네배 크기인데다 뚱뚱하다.   

이 '보'라는 캐릭터는 일본에서 성인남자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 영화를 보고 갓난아기 말투를 흉내내는 남자가 많았던 것을 보면 말이다.

언제부턴가 4,50세가 넘는 아저씨를 '귀엽다'고 하는 젊은 여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일본에서 메이지, 다이쇼 시대에 태어난 남자라면 그런 말을 들으면 창피해서 밖을 걸어다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남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귀엽다는 말을 듣는 일이 많아졌다.

일본에서는 아버지가 사라져버렸다. 지진, 벼락, 화재와 함께 두려움의 상징이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예 사라진 것이다.

사회적으로 충분히 어른으로 인지되고 어른으로 행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는 유아성을 탈피하지 못한 어른이 많아졌다.


이것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국가로서 자립하지 못했다는 것과 크게 관계가 있다. 미국의 우산 아래에서 태평스럽게 자라온 것이다.

유바바의 비호하에 몸만 커다랗게 성장한 보처럼 일본의 남자는 경제적 발전 속에서 정신적으로는 줄곧 자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웃집 토토로 이야기

 

57-58
사츠키와 메이가 꽤 분방한 감정(기쁨이나 슬픔)을 드러내고 있는 데 비해 아버지는 이상하게 냉정하다. 그 억양 없는 목소리에 냉정한 태도는 뭔가 중대한 비밀을 감추고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미야자와 겐지가 쏙독새의 별에서 쏙독새의 죽음을 그리지 않은 것처럼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이웃집의 토토로에서 그려서는 안 되는 것을 엄격하게 지킨 셈이다.

토토로나 고양이 버스를 작품세계에 출현시키는 작가는 어떤 일이 있어도 현실의 죽음을 그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반대로 생각하면 납득이 간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일류샤 소년의 죽음을 그렸다. 아버지 스네리교프 대위의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절망을 그려냈다. 이제

막 열 살이 되어 불치의 병으로 죽어야만 하는 사랑스런 소년의 죽음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걸로도 안 돼, 여기까지인가, 아니 여기까지 만큼이랄 정도로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이웃집 토토로』라는 애니메이션에 숨겨진 현실은 너무나도 슬픈 현실이다. 결핵병원에 입원 중인 엄마는 병사하고 메이는 엄마를 좇아 익사, 그리고 어쩌면 언니 사츠키조차 생명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이미 자전거나 전철, 비행기로는 갈 수 없는 장소로 떠나버린 것이다.

 

 엄마가 있는 곳에는 이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고양이 버스를 타고 갈 수밖에 없다. 고양이 버스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왕래할 수 있는 탈 것이다. 그러나 엄마가 있는 곳에 가기 위해서는 (고양이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ㅅ츠키도 메이도 이 세계에서 죽지 않으면 안 된다. 아빠는 아내만이아니라 귀여운 두 딸도 잃어버린 것이다. 이토록 비참한 현실은 없다(이런 비참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이웃집 토토로』의 관객은 없을 것이다). 이 비참한 구원 없는 '현실'을 체험한 아버지. 오직 혼자서 이쪽(현실세계)에 남겨져 버린 아버지가 이 『이웃집 토토로』를 만든 것이다.

 이 아버지는 토토로의 존재도, 고양이 버스의 존재도 믿고 있다. 아내가 살아 있다는 것도, 사츠키와 메이도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도 믿고 있다. 이 아버지의 간절한 믿음이 『이웃집 토토로』를 훌륭한 작품으로 완성시키고 있다. 이 아버지가 관객의 눈에서 비참한 현실을 완전히 감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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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사유의 기호 - 승효상이 만난 20세기 불멸의 건축들
승효상 지음 / 돌베개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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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짓는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누군가가 거기에서 삶을 잉태할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요즘 우리는 집, 하면 아파트를 떠올린다. 이게 정상일까? 모든 것이 세계화되고 있는데  

건축만은 아직 한국은 아파트가 답인 것처럼 보인다. 마치 왜 봄이 되면 꽃이 필까요?라는 문제가 꽃이 세상 무서운 걸 몰라서요, 아름다움을 보여주려구요 따위의 창의적인 답 대신 정해진 답을 써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계속 집=아파트라는 공식을 강요받은 기분이었다. 건축가들에게 건축은 무었이었을까? 


 

그 당시는 국내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으로 오로지 건축만이 나에게 희망이었으니 나에게 닥친 그 건축의 한계는 내 삶의 한계와 다름이 아니어서 하루가 멀다했던 통음의 습관이 겨우 그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였다.


“나는 건축이 우리의 삶을 바꾼다고 믿는 자이다. 부부가 같이 오래 살면 서로 닮는다는 것도 한 공간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까닭에 그들의 삶이 그 공간의 지배를 받아 같이 바뀐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수도하는 이가 작고 검박한 공간을 찾아 떠나는 것도 그 공간의 지배를 받기 원함이라고 여긴다. 윈스턴 처칠 경도 1960년 『타임』지와 회견을 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We shape our Building; thereafter they shape us."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그 건축이 다시 우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좋은 건축은 좋은 삶을 만들지만 나쁜 건축은 나쁜 삶을 만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좋고 나쁨이 화려함과 초라함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화려한 건축 속에서는 삶의 진실이 가려져 허황되고 거짓스러운 삶이 만들어지기 십상이며 초라한 건축에서 바르고 올곧은 심성이 길러지기가 더 쉽다. 비록 그 건축의 효과가 즉각적이지 않다 우리가 느끼기에 더딜 뿐이지 건축은 우리의 인격체를 완성하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 그래서 건축은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건축이란 어떤 것이며 건축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일본인이 만든 ‘건축(建築)’이라는 단어는 건축을 설명하는 데 적합한 말이 아니다. 세우고 올린다는 물리적 운동만을 뜻하는 이 단어로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되는 건축의 오묘함을 설명하지 못한다. 영어의 ‘architecture’가 ‘건축(建築)’이라는 뜻보다는 조금 났다. 으뜸 혹은 크다는 뜻의 ‘arch’와 기술 혹은 학문이라는 뜻의 ‘tect’라는 라틴어에 어원을 둔 이 영어 단어를 직역하면 ‘원학(元學)’이나 ‘큰 기술’이 된다. 얼마나 건축이 중요하고 크면 그리 불렀겠는가. 심지어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가 건축이라는 단어에 정관사를 붙인 “The Architect”로 영어 성경에 기재될 정도이니 대단한 직업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단어 역시, 건축의 중요성을 강변하는 데는 적합할지 모르나 건축을 본질적으로 설명하는 데 좋은 단어는 아니다.

우리에게는 건축이라는 말 대신 참 좋은 단어가 있었다. 한자말이긴 하지만 ‘영조 [營造]’가 그것이다. 밥을 짓고 농사를 짓고 시를 짓듯이 집은 지어서 만드는 것이다. 짓는다는 뜻은 무엇인가. 어떤 재료를 가지고 생각과 뜻과 마음을 통하여 전혀 다른 결과로 변화시켜 나타내는 것이다. 단순한 물리적 운동의 결과와는 그 방법과 과정이 다르며 근본적으로 사상이 다르다.



흔히들 건축을 공학으로 분류하거나 예술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는 것이 나는 못마땅하다. 이는 건축이 가진 작은 속성을 오해한 결과라고 여긴다. 물론 건축에서 기술은 중요한 부분이다. 사실 20세기 들어 전개된 기술의 시대에서는 기술에 대한 표현이 건축의 중요한 목표인 적도 있었으며, 눈부실 기술 개발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개혁된 바도 크다. 이 기술의 속성은 항상 진보와 발전을 목표로 한다. 문제는 이 진보된 기술의 건축 속에서 우리는 더욱 행복한가 하는 데에 이르면 심사가 복잡해진다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노동자들을 위한 집합주택과 초고속 통신으로 모든 설비를 조정할 수 있게 된 현대의 원룸 아파트 주거의 평면 구조를 비견하면 그다지 달라진 게없다는 데 놀라움을 표하게 될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가 살았던 집의 평면을 잘만 모사하면 우리의 현대 생활을 더욱 윤택하게 하는 놀라운 현대주택을 가지게 될 것임을 결단코 의심치 않는다. 이는 바로 기술의 진보가 우리의 삶을 그 비례대로 진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스트리아 빈에 훈더르트 바서라는 미술작가가 아파트를 지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완성된 지 십수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관광객까지 모으는 그 건물이 과연 건축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 건물은 예술일지는 몰라도 건축으로서의 가치는 별무이다. 이 건물은 그 공동주택의 거주민을 위한 특별한 제안을 하지도 않고 있으며 주택의 내부 구조 또한 건축가로서의 새로운 삶의 조직을 만들어놓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옆 아파트의 주거 형식과 차이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외벽을 어지러운 색채와 장식으로 칠하고 덧댐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고 있을 뿐이다. 그 장식과 색채가 그 속의 삶의 시스템과는 아무 연관을 맺지 못한 채 그 벽면들은 하나의 도시적 스케일의 그림이 되어 칙칙한 빈의 거리를 화려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은 건축이 아니다.

아직도 건축은 많이 다가서기 힘든 구조들이다. 그러면서도 가장 많이 접하게 되고 어딜 가든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게 되는 것도 건축이다. 우린 좀더 건축에 다가서야 하고 좀더 많이 이해해야 한다. 무엇보다 건축은 그저 짓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담는 것이다. 그걸 알고 나서야 우리는 건축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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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아라크네 - 정여울이 만난 방송, 드라마, 책, 사람들
정여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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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이의 재능이나 외모를 부러워해본 적이 없다. 심지어 부유한 이를 부러워해본 적도.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아니면 그에 버금가는 재능이나 외모, 혹은 무언가를 가졌겠지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런 것도 아니다. 몸이 한창 살이 쪘을 때조차, 나는 몸이 마르고 얼굴이 고운 아이를 부러워한다거나 혹은 330명 정도 되는 석차 중에서 240등 정도 할 때도 전교 1등을 부러워해본 적이 없었다. 미스코리아가 하버드를 갈 때도, 로또를 맞은 사람도 부러워해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나는 부러워하는 능력이 부족한 아이였다. 이 부족함은 공부를 못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내가 자각한 적은 별로 없지만 말이다.

다른 이의 재능을 부러워한 적도, 외모를 부러워한 적도, 좋은 물건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한 적도, 많은 돈을 부러워한 적도 없는데 나는 내가 엄청난 질투를 하는 것을 느꼈던 적이 있다.

그것은 내가 모르는 좋은 것을 누군가가 먼저 알고 있을때 발휘되곤 했다.

그것은 누군가 “영화 뭐뭐 재밌더라”, “혹은 소설 뭔가 재밌더라” 할 때였다.  

미디어 아라크네를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역시 질투였다. 내가 알지 못한 많은 멋진 것들을 알고 있다는 데 나는 질투를 느끼면서 책을 읽었다. 


 

p80

줄 수 있다는 것은 단지 재화뿐 아니라 재능이나 사랑처럼 무형의 선물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인류에게 영원한 감동을 선물한 아티스트라든지, 탄생한 그 자체만으로도 축복인 갓난아기들을 보면, 그들은 타인에게 희망을 안겨줌으로써 그들 스스로 완전한 존재라는 생각에 부러움이 샘솟는다.

달라이 라마의 설법을 듣기 위해 앞을 보지 못하는 젊은이가 티베트에서 히말라야를 넘고 네팔을 거쳐 인도까지 왔다. 젊은이의 건강이 염려되어 달라이 라마가 자신의 주치의에게 그를 진찰하게 했을 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살아 있는 사람의 안구 기증이 흔하지 않았는데도 남인도에서 온 한 젊은 수도승이 앞으로 보지 못하는 젊은이에게 안구 기증 의사를 밝혔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앞을 보지 못하는 젊은이는 젊은 수도승의 안구 기증을 거부했다. 그가 장님으로서 받았던 고통을 다른 사람이 또다시 반복해야 된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주고받는’ 경제관념에 대한 근대인의 사고를 전복시키는 힘이 있다. 이 네 명 사이에는 금전을 포함하여 그 어떤 ‘물질’도 오가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오간 것이나 다름없다. 앞을 보지 못하는 젊은이는 타인의 무한한 호의를 받았으며, 젊은 수도승은 아직 겪지도 안은 고통을 걱정해주는 우정을 받았다. 주치의는 어떤 치료도 하지 않았지만 의사로서 감동적인 체험을 했으며, 달라이 라마는 이 모든 아름다운 ‘기브 앤드 테이크’를 가능하게 한 지혜로운 매파였다. 이토록 아름다운 ‘공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힘겨운 삶의 전투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우리를 88만원 세대라고 이름붙인 세대가 짜증난다. 우리-그러니까 내주변의 우리-는 한번도 우리가 루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돈을 많이 못 번다는 이유로. 다양하게 많은 우리가 있을 텐데 이름 붙인 이가 그들 주변의 20대를 88만원세대라고 묶어 확장시켜버린 기분이다. 토익책을 던지고 짱돌을 들라는데 난 토익책을 제대로 쥐어본 적도 없어서 짱돌을 들 필요도 없는 것 같다.  

p90

한편 88만 원 세대의 소외된 계급성을 가장 명징하게 드러내는 작가는 김애란이다. 그녀는 《달려라, 아비》에서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10만 원으로 버티는 백수 청년의 삶(<종이물고기>)을 그리고, 편의점만이 이 도시의 라이프ㅡ타일에 편입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믿는 20대 여성의 삶(<나는 편의점에 간다>)을 그린다.<노크하지 않는 집>에서는 저마다 똑같은 방문 안에 갇혀 서로의 얼굴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원룸 세대의 고독과 공포를 그려내며, <성탄특선>에서는 다들 흥청망청 소비의 축제로 탕진하는 크리스마스가 오히려 가혹한 재앙으로 느껴지는 가난한 오누이의 삶을 짚어낸다.

김중혁은 <유리방패>에서 백수 청년들의 요절복통 취업 실패기를 그려냄으로써 그 어떤 탈출구도 찾을 수 없는 88만 원 세대의 비애를 한 편의 슬랩스틱 코미디로 빚어낸다. 시종일관 무지하게 웃기고 막판에 독자를 울리는, 이렇게 슬픈 김중혁식 코미디는 근래 보기 드문 채플린식 감수성의 탄생이다. 이제 ‘이태백/이구백’ 세대들에게 실업은 ‘상황’이나 ‘환경’을 넘어 ‘세포’나 ‘무의식’처럼 너무 깊이 각인되어버린 존재의 토양이 되었다. 김중혁의 소설 제목처럼 우리 사회의 가난하고 볼품없는 존재들은 ‘무용지물 박물관’의 전시품이 되어 그 고통마저 상품으로 전시되고 있다.

호연지기와 객기를 아무리 부려도 모자랄 세대들, 인생에서 가장 팔팔한 원기를 자랑해야 할 세대들. 그들을 ‘88만원 세대‘라는 초라한 별명으로 가둬두는 이 사회야말로 진정 만천하에 ’소환‘되어 심문받아야 마땅한 존재가 아닌가.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에 대한 에피소드 하나, 

아버지는 한달에 3-4일 집에 들어오신다. 배를 타시기 때문이다. 

얼마전 집에 오셨는데 스포츠채널이 나오는 케이블TV를 달자고 했는데 가족 구성원 모두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한달에 3-4일 있으실 건데 굳이 달아야겠느냐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 대부분은 정규방송과 엠넷 정도면 충분하다고 반대했다.아버지는 삐졌다. 

그리고 결국 그 다음날 아버지는 지역케이블TV를 달았다. 

그리고 그날저녁 가족에게 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해서 우리에게 한우를 사주시며 

정말 이런 저런 얘기를 해주셨다.  나와 동생은 열심히 한우를 먹으며 아버지의 말에 종종 으응, 그런 거였구나 정도의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다엿던 것 같다. 아버지는 이야기를 하느라 고기를 거의 못 드셨는데도 오히려 우리보다 기분이 좋아보이셨다. 이야기하고 들어주는 이가 있고 이해받는다는 것은 먹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 배불리 먹은 사람은 우리였는데 오히려 그 돈을 다 내고 먹을 건 못 먹고도 기분 좋아보이는 건 아버지였다.  

물론 다른 이야기지만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 그로 인해 주목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예전부터 존재했던 것 같다. 신분이 높은 이들일수록 더욱.

p96 속독은 가능한가, 비독서의 쾌락은 가능한가

로마에 이셀이라는 큰 부자가 있었다. 그는 대궐 같은 저택에 학자를 비롯한 유명인 300명을 초대하여 식사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 수많은 책에 관한 이야기꽃을 피우는 그들의 저녁식사는 행복한 지식의 성찬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초대한 이셀은 지식이없어 대화에 동참할 수 없었다. 그는 하인들에게 각자 책을 한 권씩 암기하도록 시킨 후, 손님들이 모였을 때 하인을 불러 책의 내용을 읊도록 했다. 이셀의 ‘살아있는 도서관’은 로마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어느 날 이 성대한 지식의 성찬에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이야기가 나왔다. 이셀은 <일리아스>를 암기한 하인을 불렀으나 어쩐 일인지 그가보이지 않았다. 또 다른 하인이 말했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일리아스가 복통을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연쇠장은 폭소의 도가니가 되었다. 하인들은 주인을 ‘대신하여’ 책을 읽었지만, 그로 인한 망신은 온전히 ‘주인’의 것이었다.

이 에피소드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한 불안’과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고 싶은 욕망’의 갈등이 인류의 오랜 딜레마였음을 보여준다.

아직 《유쾌한 하녀 마리사》는 읽어보지 못했다. 정작 작가 본인은 영화 쪽에서 성공하지 못한 천명관은 대신 영화인들 사이에서 은근 인기다.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장진 감독이 고래를 영화화하고 싶긴 한데 원작의 느낌을 반도 못 살리겠다고 하면서 서사의 힘을 추천했고 문근영 양이 언젠가 TV에 나와 《유쾌한 하녀 마리사》를 재미있게 읽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흐흠... 한번 읽어볼까..

p134

신파의 본질은 자기의 서사를 향한 연민이다. 신파는 타인의 삶을 매개로 자신의 삶을 애도하는 의식이다. 신파의 효용은 현재의 고통을 회피하는 데 있다. 언뜻 신파는 관객(독자)이 타인(주인공)의 고통을 대신 아파해줌으로써 슬픔을 투명하게 표출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정작 신파는 고통의 형식을 과장하되 고통의 내용을 은폐하는 행위다. 우리는 고통이 할퀴고 간 존재의 폐허를 드러내는 데는 너그러운 한편, 고통의 기원을 더듬거나 고통의 심연을 응시하는 데는 인색하다. 고통의 중핵과 맨얼굴로 독대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용기나 순수한 절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파는 고통을 연기(演技)함으로써 고통의 기원을 감추는 대중의 자기 기만술이다. 신파로 인해 우리는 정직하게 슬퍼하는 법을 망각하는 것이 아닐까. 감정이입이라는 아름다운 자기 기만술은 고통을 제대로 앓는 용기, 철저히 고립되어야 얻을 수 있는 자유를 앗아가는 것은 아닐까.


자기개발, 또 하나의 자폐증


천명관의 《유쾌한 하녀 마리사》의 인물들은 고통의 소통 불가능성을 소름끼치도록 투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들은 신파가 고통을 숙주로 하여 고통의 내용을 타자화시키는 무의식의 전략임을 ‘몸으로’ 안다. 신파는 고통의 이미지를 현시하면서 고통의 기원을 회피한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편집된 타인의 고통을 향해 한바탕 시원하게 울고 나면 순간적으로 영혼이 정화되는 듯한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 착시다. 타인의 고통을 관음하며 감정이입의 눈물을 흘리더라도 우리 자신의 고통을 분석하는 눈은 전혀 깊어지지 않는다. 신파는 나보다 더 아픈 자의 눈물을 보며 느끼는 소시민적 안도감과 쉽게 연대한다.

천명관의 소설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소시민적 영웅상, 즉 UCC나 블로거 뉴스의 미담을 통해 현장 캡쳐되는 휴머니즘의 이미지와 절연한다. 그는 가장 순수해 보이는 존재에게서 가장 세속적인 욕망과 충동을 끌어내며, 가장 세속적으로 보이는 존재에게서 영혼의 턱없는 순수를 끌어낸다. 무엇보다도 천명관은 인물을 꼼꼼히 ‘읽지’ 않고 인물을 철저히 방목한다. 다만 소설 속 인물을 자신이 만든 텍스트 공간 속에서 ‘놀게’ 한다. 그는 관념 속에서 인물의 행동반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텍스트 속에 옴짝달싹할 수 없는 한계 상황을 만들어놓고 인물들을 그 낭떠러지로 슬쩍 밀어 끝내 추락하게 내버려둔다. 그들은 애면글면 절망을 견대내지 않고 위대하게 몰락하고 표독스럽게 고통을 떠벌린다. 그는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낭만적 신파나 계몽적 이념이 아니라 처절한 리비도 그 자체일 뿐임을 신명나게 긍정한다. 그리하여 그의 안티-신파는 안티-이념을 향해 질주한다.

그는 언어적 관습이 서사를 매너리즘에 빠뜨리기 전에 날것의 욕망이 제멋대로 서사를 휘두르도록 내버려둔다. 그에게 언어보다 선험적인 것은 이미지이며, 이미지를 움직이는 힘은 육체 안에 갇힌 욕망이다.

“우린 필요도 없는 고급차나 비싼 옷을 사겠다고 개처럼 일한다.”“우린 목적을 상실한 역사의 고아다. 제2차 세계대전도 공황도 겪지 않았지만, 대신 정신적 공황에 고통받고 있다. TV를 통해 우리는 누구나 백만장자나 스타가 될 수 있다고 착각했다.그게 환상임을 깨달았을 때 우린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자기 개발은 자위행위에 불과하다. 어쩌면 자기 파괴만이 삶의 해답일지 모르겠다.” (영화 <파이트 클럽>중에서)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독자는 물을 것이다. 천명관의 에너지는 “답은 이거야”라고 말하지 않는 것, 독자로 하여금 낭만적 감정이입이 아닌 투명한 상황으로의 몰입을 충동질하는 것이다. 그는 독자가 자신의 고통을 길들여 가장 ‘닮아 보이는’ 타인의 고통에 자신의 고통을 끼워 맞추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한 신파적 감정은 타인의 고통을 매개로 자아의 고통을 희석시키는 정신의 마취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공포에 사로잡히지만 않으면 된다. 그가 보여주는 세계, 신파의 단맛과 이념의 짠맛이 철저히 배제된 날고기의 ‘피맛’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다만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세계의 자극에 온전히 노출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천명관의 안티- 신파와 안티- 이념이 다다른 안티-서사의 세계는, 그리하여 저자가 차마 공들여 완성할 필요가 없는 정지된 화면이다. <델마와 루이스>에서 자동차가 허공에 멈춘 채로 충분했듯이, 천명관의 소설은 소설이 끝난 순간 비로소 독자의 마음속에서 시작되는 또 하나의 소설을 낳는다. 거의 소설을 읽는 행위는 타인의 지옥이 나의 지옥으로 전염되어 비로소 내가 나일 수 있는 세계의 또 다른 시작이다. 《유쾌한 하녀 마리사》를 통해 우리는 책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또 하나의 섬뜩하고 날선 이야기 앞에 알몸으로 서 있다.


그러니까 인디언에게 고통스러운 일들이 콜럼버스에게는 치적으로 둔갑되어버리는 등의 일이 아직도 지구촌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다. 가난한 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실적을 올리는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 승리자의 시선을 담은 성공담을 내어 새로운 착취자의 꿈을 심는 그런 요즘의 작태를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보여줄 것도 같다. 

 

p143

기억의 유통방식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기억의 본질이다. 어쩌면 현대인이 내리는 그 모든 역사적 해석들은 과거인들이 보기에 얼토당토않은 침소봉대이거나 못 말리는 연목구어일지도 모른다.

존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

그는 제국의 일보지만 제국의 야만 외부에 존재하고 싶다. 어느날 그는 제국인의 고문으로 시력을 잃은 채 구걸하고 있는 야만인 여자 한명을 발견한다. 그는 기묘한 인력에 이끌려 그녀를 자신의 거처로 데려오고 이해할 수 없는 욕망에 이끌려 그녀의 발을 씻겨준다. 참혹한 고문을 당해 원래의 온전한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그녀의 발은 제국의 야만이 훑고 간 폭력의 자리이며, 그의 잃어버린 기억과 그녀가 잃어버리고 싶은 기억이 만나는 제의적 공간이다.

“우리는 백년도 넘게 이곳에 있었소. 우리는 사막으로부터 농토를 보호하고 관개시설을 만들고 들에 곡물을 심었으며., 탄탄한 집을 짓고 도시 주변에 벽을 쌓았소.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우리를 이곳에 일시적으로 체류하는 방문객으로 생각하고 있소. 아직 살아 있는 노인네들 중에는 그들의부모가 이 오아시스가 전에 어떠한 형태의 것이었는지 그들에게 얘기해줬던 걸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오.” 제국인들은 야만인들에게 새로운 ‘문명의 기억’을 주입하려 하지만, 야만인들은 그들만의 오아이스에서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을 결코 순순히 지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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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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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가족이 떴다



속된 말로 가족이 대세다.

고대에도 중세에도 근대에도 있었던 그것, 가족이 지금 대세다.

TV에서는 평균치를 벗어난 예쁘고 잘생긴 남자, 여자들이 나와 친근하게 상품을 팔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더불어 우리 역시 매일같이 일을 하고(물론 학생은 불투명한 미래가 있더라도 공부를 하고), 더불어 쇼핑을 해야 하는 쳇바퀴 속을 하염없이 맴돌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TV에 나오는 누군가와 비슷해지기 위해 혹은 누군가에게 돋보이기 위해 애쓰면서도 꾸미지 않은 내 모습을 인정해주는 누군가가 있기를 바란다.



<고령화가족>의 오인모.


돈도 없고 직업도 없다. 그러니 그럴듯한 모양새의 누굴 흉내낼 여력이 있을 턱이 없다. 나이 사십팔세에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영화감독, 딱 1편의 영화를 찍은 건 10년 전 얘기. 그나마도 그해 최악의 영화로 선정된 쾌거를 이룩하면서 현재는 집세가 3달 밀려 노트북, 카메라, 세탁기 돈 되는 세간이라곤 다 팔아버리고, 아름답고 세련되고 감각도 있는데다 스튜어디스의 직업을 가졌던 아내는 실패의 냄새를 귀신같이 맡을 줄 아는 능력까지 겸비한 덕분에 그와 이혼하고 일찌감치 자유롭게 새 삶을 찾아 떠났다.

그 와중에 “닭죽 먹으러 올래?”라는 전화에 닭죽을 먹으러 간 인모. 간 김에 엄마 집에서 살기로 결심한 전직영화감독, 그에게 그보다 먼저 엄마 집에 먼저 들어온 사람, 바로 형이었다. 방귀를 뿌-웅! 뀌어대는 존재론적 실체가 은모의 눈앞에 있고 사라질 것 같지도 않은데 거기다 부피까지 꽤 된다. 120kg. 아무리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도 120kg의 부피감은 좀처럼 사그러질 줄 모른다. 그런데 자신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여동생이 딸을 데리고 들어와 살겠단다.




사실 우리는 남들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다. 사회도 그러길 바라고.

그런데, 가족은?

모~든 걸 알고 있다. 지난여름에 한 일을 비롯해 어제 뭘 먹었는지, 왜 얼굴이 부었는지 알고 싶지 않은데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치 오함마가 민경의 팬티를 보면서 자위를 한다는 걸 알고 싶지 않은데도 알아버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결국 중요해 보이지 않는 모든 일을 집에서 해결해야만 밖에 나가 일을 할 수 있다.

밥 먹고, 똥 누고, 화장 하고, 씻고.

회사에서 밥은 먹고 오냐, 똥은 누고 오냐, 화장은 반드시 하고 와야 한다. 라는 지침이 없어도 말이다.


 

173

아버지는 서울 변두리의 공사판을 떠돌며 평생 노가다꾼으로 살았다. 후에 오토바이를 한 대 사서 이런저런 배달일을 하기도 했지만 말년엔 집에서 편히 잠도 못 자고 좁고 추운 아파트경비실에서 새우잠을 자며 쓸쓸한 밤을 보내야했다. 아버지는 결코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버지는 끝내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것이 아버지의 삶이었다.

165

술을 마시는 동안, 죽은 소녀에 대해 물밀듯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런 죽음을 너무 쉽게 허용한 이 사회에 대해서 구역질이 났다.


165

그러다 문득 내가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가출한 민경을 찾아 집으로 데려오는 일이었다.


165

여자애의 얼굴엔 ‘죄송하지만 저도 성질 좀 있거든요’라고 쓰여있었다.

166-168

이거피우면 우리엄마한테이른다고 협박해서 돈 뜯어가려고 그러는 거죠?

민경이가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못된 사람이 아냐. 내가 민경이에게 돈을 달라고 한 건 그 애가 용돈을 너무 헤프게 써버리는 것 같아서 따로 모았다가 한꺼번에 주려고 그랬던 거야. 말하자면 적금 같은 거지. 이 돈 보이니?

나는 지갑을 꺼내보였다. 그 돈은 에로영화를 직기로 하고 박사장에게서 계약금조로 받은 돈이었다.


168

그렇구나. 그건 그렇고 너도 한 대 피워. 옛날 인디언들은 친구들 만나면 서로 담배를 나눠피웠단다. 말하자면 우정을 확인하는 의식같은 거라고 할 수 있지.

우정이요? 아저씨하고 나하고요?

...

그래, 난 민경이가 비록 조카이긴 하지만 늘 친구처럼 생각한단다. 그런데 너는 민경이친구잖아. 친구의 친구니까 우리도 친구나 마찬가지지

168

근데 아저씨가 민경이 팬티 훔쳐갔다면서요? 여자애가 담배를 피우다 문득 생각난듯 물었다.

뭐? 그, 그 얘기는 뭐니?

나는 화들짝 놀라 담배를 떨어뜨릴 뻔 했다.

민경이한테 들었어요.

얘야, 이제 보니 우리 사이에 커다란 오해가 있었구나. 오해는 불신을 낳고 불신은 증오를 낳는 법이란다. 얘기를 하자면 좀 길지만 우리 가족에겐 큰 우환이 있어. 일종의 질병이라고나 할까? 아니 그냥 멧돼지라고 해두자.

(……)

집에서 멧돼지도 키워요?

그렇게 묻는 걸 보니 넌 아직 은유법에 대해서 안 배웠나보구나. 아니면 배웠는데 까먹었거나. 내가 멧돼지라고 한 건 진짜 멧돼지를 말하는 게 아니고 멧돼지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거란다. 여기서 멧돼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그건 직유법이 되는 거고……

아씨발 금방 수업 끝났는데……

여자애가 금세 짜증을 냈다. 공부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는 건 민경과 똑같았다.

 

126 

"그러니 생각해봐. 알아듣지도 못하는 얘기를 몇 시간씩 듣고 있으려면 민경이 입장에선 얼마나 괴로웠겠어. 그것도 몇 년씩이나. 아마 세상에 그보다 더 끔찍한 고문은 없을 거야……아마 나 같으면 가출을 했을 거야. 사람이 그렇게는 못 사는 거거든."“그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야! 난 저인간보다 작은 오빠가 더 짜증나!”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사회적 인간관계,  

그래서 모든 짜증의 분출구가 되어버리는 가족사이 

하찮다고 여겨지던 것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이 가족은 역동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몹시 희한한 방식으로

하지만 나는 그 애를 위해 뭔가 하고 싶었다.

게다가 그애는 나에게 담배값을 대주지않았던가->POINT!

인모는 그 애를 위해 ‘뭔가’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이미 그 뭔가는 오함마가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함마는 민경을 찾아오느라 제2의 뭔가(바지사장)를 해야 했고. 제 3의 뭔가(돈을 들고 한국도피)를 하느라 조직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약장수가 인모를 흠씬 두들겨 패는 순간 인모는 자신이 뭔가를 하게 된다. 비록 한번도 예상하지 못했었지만 누군가를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뭔가를 했던 순간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국가 원수나 자라나는 새싹도 아닌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방귀쟁이에 전과5범의 형을 위해 말이다. 비록 그 전과중 하나는 자신의 것이긴 하지만. 

251

내가 다 얘기해주려고 했거든. 오함마가 어디로 갔는지 누구랑 함께 갔는지 돈을 어디로 송금했는지 신사적으로 다 털어놓으려고 했어. 사실은 나도 그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그런데 내 마음이 변했어.

약장수의 표정에 잠시 당황한 빛이 스쳤다. 그는 모든 상황을 잘 이해하고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영혼은 이미 그가 생각한 상황 바깥으로 빠져나와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자존심이 상했거든. 니들처럼 배운 게 없는 놈들은 잘 모르겠지만 원래 사람은 이렇게 다루면 안 되는 거야. 우린 위대한 문명을 창조한 존재고 우리 스스로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살도록 제도를 발전시켜왔거든. 니들이 무슨 짓을 하면서 살아도 좋지만 절대로 그 사실을 잊어선 안 돼.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서도 언어는 명료했다.  

-하지만 니들은 그 사실을 망각하고 나를 짐승처럼 다뤘어. 그게 얼마나 슬프고 끔찍한 일인지 너희들은 모를거야. 그것은 단지 나 개인을 두들겨 팬 게 아니라 인류가 수천년동안 피흘리며 이룩한 위대한 유산을 짓밟은 거야. 남대문에서 약이나 팔던 일개 양아치 새끼들이 말이야. 그래서 난 네놈들에게 단 한마디도 해줄수가 없어.


하지만 그 형이 그토록 하찮은가? 자신의 아내와 바람을 피운 잘생기고 몸이 좋은 헬스트레이너를 흠씬 두들겨패주었고 인모의 폭행까지 고스란히 안고 형이 대신 가막소에 간 덕에 인모는 가막소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으며, 대구에 있긴 하지만 어디 있는지 모를 짱알거리는 목소리로 씨발거리며 눈을 치켜뜰 땐 아무리 조카딸이라도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오씨 삼남매가 모두 죽고난 뒤에 그들를 기억해줄 유일한 다음 세대인 민경을 찾으러 나서려 할 때 그 고단한 여행을 하지 않아도 되게 한 것도 결국은 오함마였다. 그리고 뭔가를 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오함마를 위해 매일같이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밥을 한 것은 70대의 엄마였다.

엄마에게는 아마도 혹독한 세상살이가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끝내는 자식들이 실패한 원인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210

엄마 집으로 들어와 살면서 새삼 깨닫게 된 것은 엄마에 대해 내가 아는 바가 별로 없다는 사실이었다. 생각해보면 엄마의 사생활은 물론 엄마의 성격에 대해서도 별반 아는 게 없었다. 그동안 내가 생각한 엄마는 그저 생활력 강하고 약간의 허영심이 있는 보수적인 노인일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엄마는 여러번 나를 놀라게 했다.젊은 시절 외간 남자와 눈이 맞아 자식들을 팽개친 채 야반도주를 하기도 하고, 어두운 진실을 사십년간 감쪽같이 덮어준 채 배다른 자식과 씨다른 자식을 억척스럽게 한 집에서 밥해먹여 키우고 세상사에 실패하고 돌아온 자식들을 거둬주고 뒤늦게 재회한 옛사랑을 불륜의 씨앗인 딸의 결혼식장에 불러들인 엄마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최근에 느낀 것인데 나도 요즘 몰랐던 우리 엄마를 자주 발견하곤 한다.

사실 나의 엄마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딸이었을 엄마인데, 나는 그 누군가의 딸이 나에게 모든 걸 다해주는 존재라고만 생각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점점 엄마는 누군가의 딸, 같다. 

안경을 못 찾자 신경질 부리는 것도 꼭 초등학생 수준으로 유치하게 신경질 부리고 -항상 아~씨~아~씨~'를 섞어 안경을 찾는다- 

한참 옷을 찾다가 어제 입은 옷 못 봤냐고 물어보면서 내가 까칠하게 대답할까봐 나한테 잘 안 물어봤다는 우리 엄마. 

언젠가 내가 다리에 쥐가 내려 길에서 비틀거리자 엄마는 엄마도 모르게 큭 하고 웃어버린 적이 있었다.내가 엄마! 하자 엄마가 표정관리도 못 한 채 미안, 내 딸인 걸 깜빡했어...라는 우리 엄마. 

정말 마음 깊은 곳의 표정은 알 수가 없는 것 같다.  

물론 세상이 풀려나가는 방식 플러스 천명관의 소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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