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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고령화가족이 떴다
속된 말로 가족이 대세다.
고대에도 중세에도 근대에도 있었던 그것, 가족이 지금 대세다.
TV에서는 평균치를 벗어난 예쁘고 잘생긴 남자, 여자들이 나와 친근하게 상품을 팔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더불어 우리 역시 매일같이 일을 하고(물론 학생은 불투명한 미래가 있더라도 공부를 하고), 더불어 쇼핑을 해야 하는 쳇바퀴 속을 하염없이 맴돌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TV에 나오는 누군가와 비슷해지기 위해 혹은 누군가에게 돋보이기 위해 애쓰면서도 꾸미지 않은 내 모습을 인정해주는 누군가가 있기를 바란다.
<고령화가족>의 오인모.
돈도 없고 직업도 없다. 그러니 그럴듯한 모양새의 누굴 흉내낼 여력이 있을 턱이 없다. 나이 사십팔세에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영화감독, 딱 1편의 영화를 찍은 건 10년 전 얘기. 그나마도 그해 최악의 영화로 선정된 쾌거를 이룩하면서 현재는 집세가 3달 밀려 노트북, 카메라, 세탁기 돈 되는 세간이라곤 다 팔아버리고, 아름답고 세련되고 감각도 있는데다 스튜어디스의 직업을 가졌던 아내는 실패의 냄새를 귀신같이 맡을 줄 아는 능력까지 겸비한 덕분에 그와 이혼하고 일찌감치 자유롭게 새 삶을 찾아 떠났다.
그 와중에 “닭죽 먹으러 올래?”라는 전화에 닭죽을 먹으러 간 인모. 간 김에 엄마 집에서 살기로 결심한 전직영화감독, 그에게 그보다 먼저 엄마 집에 먼저 들어온 사람, 바로 형이었다. 방귀를 뿌-웅! 뀌어대는 존재론적 실체가 은모의 눈앞에 있고 사라질 것 같지도 않은데 거기다 부피까지 꽤 된다. 120kg. 아무리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도 120kg의 부피감은 좀처럼 사그러질 줄 모른다. 그런데 자신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여동생이 딸을 데리고 들어와 살겠단다.
사실 우리는 남들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다. 사회도 그러길 바라고.
그런데, 가족은?
모~든 걸 알고 있다. 지난여름에 한 일을 비롯해 어제 뭘 먹었는지, 왜 얼굴이 부었는지 알고 싶지 않은데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치 오함마가 민경의 팬티를 보면서 자위를 한다는 걸 알고 싶지 않은데도 알아버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결국 중요해 보이지 않는 모든 일을 집에서 해결해야만 밖에 나가 일을 할 수 있다.
밥 먹고, 똥 누고, 화장 하고, 씻고.
회사에서 밥은 먹고 오냐, 똥은 누고 오냐, 화장은 반드시 하고 와야 한다. 라는 지침이 없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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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서울 변두리의 공사판을 떠돌며 평생 노가다꾼으로 살았다. 후에 오토바이를 한 대 사서 이런저런 배달일을 하기도 했지만 말년엔 집에서 편히 잠도 못 자고 좁고 추운 아파트경비실에서 새우잠을 자며 쓸쓸한 밤을 보내야했다. 아버지는 결코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버지는 끝내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것이 아버지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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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는 동안, 죽은 소녀에 대해 물밀듯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런 죽음을 너무 쉽게 허용한 이 사회에 대해서 구역질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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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문득 내가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가출한 민경을 찾아 집으로 데려오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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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애의 얼굴엔 ‘죄송하지만 저도 성질 좀 있거든요’라고 쓰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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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피우면 우리엄마한테이른다고 협박해서 돈 뜯어가려고 그러는 거죠?
민경이가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못된 사람이 아냐. 내가 민경이에게 돈을 달라고 한 건 그 애가 용돈을 너무 헤프게 써버리는 것 같아서 따로 모았다가 한꺼번에 주려고 그랬던 거야. 말하자면 적금 같은 거지. 이 돈 보이니?
나는 지갑을 꺼내보였다. 그 돈은 에로영화를 직기로 하고 박사장에게서 계약금조로 받은 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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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 그건 그렇고 너도 한 대 피워. 옛날 인디언들은 친구들 만나면 서로 담배를 나눠피웠단다. 말하자면 우정을 확인하는 의식같은 거라고 할 수 있지.
우정이요? 아저씨하고 나하고요?
...
그래, 난 민경이가 비록 조카이긴 하지만 늘 친구처럼 생각한단다. 그런데 너는 민경이친구잖아. 친구의 친구니까 우리도 친구나 마찬가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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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아저씨가 민경이 팬티 훔쳐갔다면서요? 여자애가 담배를 피우다 문득 생각난듯 물었다.
뭐? 그, 그 얘기는 뭐니?
나는 화들짝 놀라 담배를 떨어뜨릴 뻔 했다.
민경이한테 들었어요.
얘야, 이제 보니 우리 사이에 커다란 오해가 있었구나. 오해는 불신을 낳고 불신은 증오를 낳는 법이란다. 얘기를 하자면 좀 길지만 우리 가족에겐 큰 우환이 있어. 일종의 질병이라고나 할까? 아니 그냥 멧돼지라고 해두자.
(……)
집에서 멧돼지도 키워요?
그렇게 묻는 걸 보니 넌 아직 은유법에 대해서 안 배웠나보구나. 아니면 배웠는데 까먹었거나. 내가 멧돼지라고 한 건 진짜 멧돼지를 말하는 게 아니고 멧돼지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거란다. 여기서 멧돼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그건 직유법이 되는 거고……
아씨발 금방 수업 끝났는데……
여자애가 금세 짜증을 냈다. 공부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는 건 민경과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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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생각해봐. 알아듣지도 못하는 얘기를 몇 시간씩 듣고 있으려면 민경이 입장에선 얼마나 괴로웠겠어. 그것도 몇 년씩이나. 아마 세상에 그보다 더 끔찍한 고문은 없을 거야……아마 나 같으면 가출을 했을 거야. 사람이 그렇게는 못 사는 거거든."“그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야! 난 저인간보다 작은 오빠가 더 짜증나!”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사회적 인간관계,
그래서 모든 짜증의 분출구가 되어버리는 가족사이
하찮다고 여겨지던 것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이 가족은 역동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몹시 희한한 방식으로
하지만 나는 그 애를 위해 뭔가 하고 싶었다.
게다가 그애는 나에게 담배값을 대주지않았던가->POINT!
인모는 그 애를 위해 ‘뭔가’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이미 그 뭔가는 오함마가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함마는 민경을 찾아오느라 제2의 뭔가(바지사장)를 해야 했고. 제 3의 뭔가(돈을 들고 한국도피)를 하느라 조직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약장수가 인모를 흠씬 두들겨 패는 순간 인모는 자신이 뭔가를 하게 된다. 비록 한번도 예상하지 못했었지만 누군가를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뭔가를 했던 순간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국가 원수나 자라나는 새싹도 아닌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방귀쟁이에 전과5범의 형을 위해 말이다. 비록 그 전과중 하나는 자신의 것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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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 얘기해주려고 했거든. 오함마가 어디로 갔는지 누구랑 함께 갔는지 돈을 어디로 송금했는지 신사적으로 다 털어놓으려고 했어. 사실은 나도 그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그런데 내 마음이 변했어.
약장수의 표정에 잠시 당황한 빛이 스쳤다. 그는 모든 상황을 잘 이해하고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영혼은 이미 그가 생각한 상황 바깥으로 빠져나와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자존심이 상했거든. 니들처럼 배운 게 없는 놈들은 잘 모르겠지만 원래 사람은 이렇게 다루면 안 되는 거야. 우린 위대한 문명을 창조한 존재고 우리 스스로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살도록 제도를 발전시켜왔거든. 니들이 무슨 짓을 하면서 살아도 좋지만 절대로 그 사실을 잊어선 안 돼.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서도 언어는 명료했다.
-하지만 니들은 그 사실을 망각하고 나를 짐승처럼 다뤘어. 그게 얼마나 슬프고 끔찍한 일인지 너희들은 모를거야. 그것은 단지 나 개인을 두들겨 팬 게 아니라 인류가 수천년동안 피흘리며 이룩한 위대한 유산을 짓밟은 거야. 남대문에서 약이나 팔던 일개 양아치 새끼들이 말이야. 그래서 난 네놈들에게 단 한마디도 해줄수가 없어.
하지만 그 형이 그토록 하찮은가? 자신의 아내와 바람을 피운 잘생기고 몸이 좋은 헬스트레이너를 흠씬 두들겨패주었고 인모의 폭행까지 고스란히 안고 형이 대신 가막소에 간 덕에 인모는 가막소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으며, 대구에 있긴 하지만 어디 있는지 모를 짱알거리는 목소리로 씨발거리며 눈을 치켜뜰 땐 아무리 조카딸이라도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오씨 삼남매가 모두 죽고난 뒤에 그들를 기억해줄 유일한 다음 세대인 민경을 찾으러 나서려 할 때 그 고단한 여행을 하지 않아도 되게 한 것도 결국은 오함마였다. 그리고 뭔가를 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오함마를 위해 매일같이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밥을 한 것은 70대의 엄마였다.
엄마에게는 아마도 혹독한 세상살이가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끝내는 자식들이 실패한 원인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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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집으로 들어와 살면서 새삼 깨닫게 된 것은 엄마에 대해 내가 아는 바가 별로 없다는 사실이었다. 생각해보면 엄마의 사생활은 물론 엄마의 성격에 대해서도 별반 아는 게 없었다. 그동안 내가 생각한 엄마는 그저 생활력 강하고 약간의 허영심이 있는 보수적인 노인일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엄마는 여러번 나를 놀라게 했다.젊은 시절 외간 남자와 눈이 맞아 자식들을 팽개친 채 야반도주를 하기도 하고, 어두운 진실을 사십년간 감쪽같이 덮어준 채 배다른 자식과 씨다른 자식을 억척스럽게 한 집에서 밥해먹여 키우고 세상사에 실패하고 돌아온 자식들을 거둬주고 뒤늦게 재회한 옛사랑을 불륜의 씨앗인 딸의 결혼식장에 불러들인 엄마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최근에 느낀 것인데 나도 요즘 몰랐던 우리 엄마를 자주 발견하곤 한다.
사실 나의 엄마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딸이었을 엄마인데, 나는 그 누군가의 딸이 나에게 모든 걸 다해주는 존재라고만 생각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점점 엄마는 누군가의 딸, 같다.
안경을 못 찾자 신경질 부리는 것도 꼭 초등학생 수준으로 유치하게 신경질 부리고 -항상 아~씨~아~씨~'를 섞어 안경을 찾는다-
한참 옷을 찾다가 어제 입은 옷 못 봤냐고 물어보면서 내가 까칠하게 대답할까봐 나한테 잘 안 물어봤다는 우리 엄마.
언젠가 내가 다리에 쥐가 내려 길에서 비틀거리자 엄마는 엄마도 모르게 큭 하고 웃어버린 적이 있었다.내가 엄마! 하자 엄마가 표정관리도 못 한 채 미안, 내 딸인 걸 깜빡했어...라는 우리 엄마.
정말 마음 깊은 곳의 표정은 알 수가 없는 것 같다.
물론 세상이 풀려나가는 방식 플러스 천명관의 소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