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세계로의 초대 - 모성과 카오스, 에로스의 판타지
시미즈 마사시 지음, 이은주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책 한권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집 근처에 태종대가 있어 슬슬 걸어가 보기로 했다. 어제 먹은 저녁이 소화가 덜 된 것 같기도 하고 집 앞 벚꽃이 예뻐서 좀 걷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슬슬 걷자고 한 것이 1시간 정도 걸렸다;_ '  

태종대에는 소풍 나온 중학생들이 꽤 많았다. 벤치에 앉아 책 읽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몇 명이 지나가면서 쳐다보았는데 뭔 얘기들을 하는지 까르르 까르르 웃는 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ㅎㅎ 

한동안 책에 집중할 수 없었지만 어쨋든.

이 책-미야자키 하야오 세계로의 초대-은 대학교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읽으려고 했던 책 중에 하나였다. 어떤 학과에 가야할지 모르겠던 고3 때 친구들이랑 우르르 몰려다니면 남포동에서 영화보고 밥 먹는 게 일상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을 때 이 애니메이션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그야말로 미야자키 하야오에 푹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도 애니메이션과가 있는 학교를 지원하게 만들 정도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매혹적이었다. 거부하기 힘든 소품들과 공간들. 그리고 오래된 것 같으면서도 거슬리지 않게 공간을 지어내는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도 그런 창작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라 믿으며 꽤 열심히 학교를 다녔던 것 같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가 많은데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만화영화-정도로 치부될 수만은 없는 이유를 알려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구나 아이였던 적이 있으니까 또 언제든 아이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어른들도 많이 있으니까 
 

모두 가슴을 열고 말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아이를 한 조각씩 품고 사는 것 같다. 

그래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가오나시 캐릭터가 가장 안쓰럽고 마냥 미워하기 힘들었다.

청개구리를 삼킨 가오나시가 유야(신의 온천목욕탕)에서 금조각을 미끼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치히로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 그러했다는 것 , 애정에 목마른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하지만 손 내밀면 약해 보일까 봐.. 아... 아... 소리 밖에 내지 못하는 가오나시. 한번도 자신의 목소리로 뭔가를 말하지 않던 하얀 가면.

 

p134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는 색다른 캐릭터가 많이 나온다. 그 중에 보.
갓난아기지만 몸은 치히로의 세배, 네배 크기인데다 뚱뚱하다.   

이 '보'라는 캐릭터는 일본에서 성인남자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 영화를 보고 갓난아기 말투를 흉내내는 남자가 많았던 것을 보면 말이다.

언제부턴가 4,50세가 넘는 아저씨를 '귀엽다'고 하는 젊은 여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일본에서 메이지, 다이쇼 시대에 태어난 남자라면 그런 말을 들으면 창피해서 밖을 걸어다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남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귀엽다는 말을 듣는 일이 많아졌다.

일본에서는 아버지가 사라져버렸다. 지진, 벼락, 화재와 함께 두려움의 상징이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예 사라진 것이다.

사회적으로 충분히 어른으로 인지되고 어른으로 행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는 유아성을 탈피하지 못한 어른이 많아졌다.


이것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국가로서 자립하지 못했다는 것과 크게 관계가 있다. 미국의 우산 아래에서 태평스럽게 자라온 것이다.

유바바의 비호하에 몸만 커다랗게 성장한 보처럼 일본의 남자는 경제적 발전 속에서 정신적으로는 줄곧 자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웃집 토토로 이야기

 

57-58
사츠키와 메이가 꽤 분방한 감정(기쁨이나 슬픔)을 드러내고 있는 데 비해 아버지는 이상하게 냉정하다. 그 억양 없는 목소리에 냉정한 태도는 뭔가 중대한 비밀을 감추고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미야자와 겐지가 쏙독새의 별에서 쏙독새의 죽음을 그리지 않은 것처럼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이웃집의 토토로에서 그려서는 안 되는 것을 엄격하게 지킨 셈이다.

토토로나 고양이 버스를 작품세계에 출현시키는 작가는 어떤 일이 있어도 현실의 죽음을 그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반대로 생각하면 납득이 간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일류샤 소년의 죽음을 그렸다. 아버지 스네리교프 대위의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절망을 그려냈다. 이제

막 열 살이 되어 불치의 병으로 죽어야만 하는 사랑스런 소년의 죽음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걸로도 안 돼, 여기까지인가, 아니 여기까지 만큼이랄 정도로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이웃집 토토로』라는 애니메이션에 숨겨진 현실은 너무나도 슬픈 현실이다. 결핵병원에 입원 중인 엄마는 병사하고 메이는 엄마를 좇아 익사, 그리고 어쩌면 언니 사츠키조차 생명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이미 자전거나 전철, 비행기로는 갈 수 없는 장소로 떠나버린 것이다.

 

 엄마가 있는 곳에는 이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고양이 버스를 타고 갈 수밖에 없다. 고양이 버스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왕래할 수 있는 탈 것이다. 그러나 엄마가 있는 곳에 가기 위해서는 (고양이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ㅅ츠키도 메이도 이 세계에서 죽지 않으면 안 된다. 아빠는 아내만이아니라 귀여운 두 딸도 잃어버린 것이다. 이토록 비참한 현실은 없다(이런 비참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이웃집 토토로』의 관객은 없을 것이다). 이 비참한 구원 없는 '현실'을 체험한 아버지. 오직 혼자서 이쪽(현실세계)에 남겨져 버린 아버지가 이 『이웃집 토토로』를 만든 것이다.

 이 아버지는 토토로의 존재도, 고양이 버스의 존재도 믿고 있다. 아내가 살아 있다는 것도, 사츠키와 메이도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도 믿고 있다. 이 아버지의 간절한 믿음이 『이웃집 토토로』를 훌륭한 작품으로 완성시키고 있다. 이 아버지가 관객의 눈에서 비참한 현실을 완전히 감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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