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아라크네 - 정여울이 만난 방송, 드라마, 책, 사람들
정여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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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이의 재능이나 외모를 부러워해본 적이 없다. 심지어 부유한 이를 부러워해본 적도.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아니면 그에 버금가는 재능이나 외모, 혹은 무언가를 가졌겠지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런 것도 아니다. 몸이 한창 살이 쪘을 때조차, 나는 몸이 마르고 얼굴이 고운 아이를 부러워한다거나 혹은 330명 정도 되는 석차 중에서 240등 정도 할 때도 전교 1등을 부러워해본 적이 없었다. 미스코리아가 하버드를 갈 때도, 로또를 맞은 사람도 부러워해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나는 부러워하는 능력이 부족한 아이였다. 이 부족함은 공부를 못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내가 자각한 적은 별로 없지만 말이다.

다른 이의 재능을 부러워한 적도, 외모를 부러워한 적도, 좋은 물건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한 적도, 많은 돈을 부러워한 적도 없는데 나는 내가 엄청난 질투를 하는 것을 느꼈던 적이 있다.

그것은 내가 모르는 좋은 것을 누군가가 먼저 알고 있을때 발휘되곤 했다.

그것은 누군가 “영화 뭐뭐 재밌더라”, “혹은 소설 뭔가 재밌더라” 할 때였다.  

미디어 아라크네를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역시 질투였다. 내가 알지 못한 많은 멋진 것들을 알고 있다는 데 나는 질투를 느끼면서 책을 읽었다. 


 

p80

줄 수 있다는 것은 단지 재화뿐 아니라 재능이나 사랑처럼 무형의 선물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인류에게 영원한 감동을 선물한 아티스트라든지, 탄생한 그 자체만으로도 축복인 갓난아기들을 보면, 그들은 타인에게 희망을 안겨줌으로써 그들 스스로 완전한 존재라는 생각에 부러움이 샘솟는다.

달라이 라마의 설법을 듣기 위해 앞을 보지 못하는 젊은이가 티베트에서 히말라야를 넘고 네팔을 거쳐 인도까지 왔다. 젊은이의 건강이 염려되어 달라이 라마가 자신의 주치의에게 그를 진찰하게 했을 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살아 있는 사람의 안구 기증이 흔하지 않았는데도 남인도에서 온 한 젊은 수도승이 앞으로 보지 못하는 젊은이에게 안구 기증 의사를 밝혔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앞을 보지 못하는 젊은이는 젊은 수도승의 안구 기증을 거부했다. 그가 장님으로서 받았던 고통을 다른 사람이 또다시 반복해야 된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주고받는’ 경제관념에 대한 근대인의 사고를 전복시키는 힘이 있다. 이 네 명 사이에는 금전을 포함하여 그 어떤 ‘물질’도 오가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오간 것이나 다름없다. 앞을 보지 못하는 젊은이는 타인의 무한한 호의를 받았으며, 젊은 수도승은 아직 겪지도 안은 고통을 걱정해주는 우정을 받았다. 주치의는 어떤 치료도 하지 않았지만 의사로서 감동적인 체험을 했으며, 달라이 라마는 이 모든 아름다운 ‘기브 앤드 테이크’를 가능하게 한 지혜로운 매파였다. 이토록 아름다운 ‘공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힘겨운 삶의 전투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우리를 88만원 세대라고 이름붙인 세대가 짜증난다. 우리-그러니까 내주변의 우리-는 한번도 우리가 루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돈을 많이 못 번다는 이유로. 다양하게 많은 우리가 있을 텐데 이름 붙인 이가 그들 주변의 20대를 88만원세대라고 묶어 확장시켜버린 기분이다. 토익책을 던지고 짱돌을 들라는데 난 토익책을 제대로 쥐어본 적도 없어서 짱돌을 들 필요도 없는 것 같다.  

p90

한편 88만 원 세대의 소외된 계급성을 가장 명징하게 드러내는 작가는 김애란이다. 그녀는 《달려라, 아비》에서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10만 원으로 버티는 백수 청년의 삶(<종이물고기>)을 그리고, 편의점만이 이 도시의 라이프ㅡ타일에 편입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믿는 20대 여성의 삶(<나는 편의점에 간다>)을 그린다.<노크하지 않는 집>에서는 저마다 똑같은 방문 안에 갇혀 서로의 얼굴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원룸 세대의 고독과 공포를 그려내며, <성탄특선>에서는 다들 흥청망청 소비의 축제로 탕진하는 크리스마스가 오히려 가혹한 재앙으로 느껴지는 가난한 오누이의 삶을 짚어낸다.

김중혁은 <유리방패>에서 백수 청년들의 요절복통 취업 실패기를 그려냄으로써 그 어떤 탈출구도 찾을 수 없는 88만 원 세대의 비애를 한 편의 슬랩스틱 코미디로 빚어낸다. 시종일관 무지하게 웃기고 막판에 독자를 울리는, 이렇게 슬픈 김중혁식 코미디는 근래 보기 드문 채플린식 감수성의 탄생이다. 이제 ‘이태백/이구백’ 세대들에게 실업은 ‘상황’이나 ‘환경’을 넘어 ‘세포’나 ‘무의식’처럼 너무 깊이 각인되어버린 존재의 토양이 되었다. 김중혁의 소설 제목처럼 우리 사회의 가난하고 볼품없는 존재들은 ‘무용지물 박물관’의 전시품이 되어 그 고통마저 상품으로 전시되고 있다.

호연지기와 객기를 아무리 부려도 모자랄 세대들, 인생에서 가장 팔팔한 원기를 자랑해야 할 세대들. 그들을 ‘88만원 세대‘라는 초라한 별명으로 가둬두는 이 사회야말로 진정 만천하에 ’소환‘되어 심문받아야 마땅한 존재가 아닌가.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에 대한 에피소드 하나, 

아버지는 한달에 3-4일 집에 들어오신다. 배를 타시기 때문이다. 

얼마전 집에 오셨는데 스포츠채널이 나오는 케이블TV를 달자고 했는데 가족 구성원 모두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한달에 3-4일 있으실 건데 굳이 달아야겠느냐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 대부분은 정규방송과 엠넷 정도면 충분하다고 반대했다.아버지는 삐졌다. 

그리고 결국 그 다음날 아버지는 지역케이블TV를 달았다. 

그리고 그날저녁 가족에게 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해서 우리에게 한우를 사주시며 

정말 이런 저런 얘기를 해주셨다.  나와 동생은 열심히 한우를 먹으며 아버지의 말에 종종 으응, 그런 거였구나 정도의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다엿던 것 같다. 아버지는 이야기를 하느라 고기를 거의 못 드셨는데도 오히려 우리보다 기분이 좋아보이셨다. 이야기하고 들어주는 이가 있고 이해받는다는 것은 먹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 배불리 먹은 사람은 우리였는데 오히려 그 돈을 다 내고 먹을 건 못 먹고도 기분 좋아보이는 건 아버지였다.  

물론 다른 이야기지만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 그로 인해 주목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예전부터 존재했던 것 같다. 신분이 높은 이들일수록 더욱.

p96 속독은 가능한가, 비독서의 쾌락은 가능한가

로마에 이셀이라는 큰 부자가 있었다. 그는 대궐 같은 저택에 학자를 비롯한 유명인 300명을 초대하여 식사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 수많은 책에 관한 이야기꽃을 피우는 그들의 저녁식사는 행복한 지식의 성찬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초대한 이셀은 지식이없어 대화에 동참할 수 없었다. 그는 하인들에게 각자 책을 한 권씩 암기하도록 시킨 후, 손님들이 모였을 때 하인을 불러 책의 내용을 읊도록 했다. 이셀의 ‘살아있는 도서관’은 로마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어느 날 이 성대한 지식의 성찬에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이야기가 나왔다. 이셀은 <일리아스>를 암기한 하인을 불렀으나 어쩐 일인지 그가보이지 않았다. 또 다른 하인이 말했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일리아스가 복통을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연쇠장은 폭소의 도가니가 되었다. 하인들은 주인을 ‘대신하여’ 책을 읽었지만, 그로 인한 망신은 온전히 ‘주인’의 것이었다.

이 에피소드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한 불안’과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고 싶은 욕망’의 갈등이 인류의 오랜 딜레마였음을 보여준다.

아직 《유쾌한 하녀 마리사》는 읽어보지 못했다. 정작 작가 본인은 영화 쪽에서 성공하지 못한 천명관은 대신 영화인들 사이에서 은근 인기다.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장진 감독이 고래를 영화화하고 싶긴 한데 원작의 느낌을 반도 못 살리겠다고 하면서 서사의 힘을 추천했고 문근영 양이 언젠가 TV에 나와 《유쾌한 하녀 마리사》를 재미있게 읽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흐흠... 한번 읽어볼까..

p134

신파의 본질은 자기의 서사를 향한 연민이다. 신파는 타인의 삶을 매개로 자신의 삶을 애도하는 의식이다. 신파의 효용은 현재의 고통을 회피하는 데 있다. 언뜻 신파는 관객(독자)이 타인(주인공)의 고통을 대신 아파해줌으로써 슬픔을 투명하게 표출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정작 신파는 고통의 형식을 과장하되 고통의 내용을 은폐하는 행위다. 우리는 고통이 할퀴고 간 존재의 폐허를 드러내는 데는 너그러운 한편, 고통의 기원을 더듬거나 고통의 심연을 응시하는 데는 인색하다. 고통의 중핵과 맨얼굴로 독대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용기나 순수한 절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파는 고통을 연기(演技)함으로써 고통의 기원을 감추는 대중의 자기 기만술이다. 신파로 인해 우리는 정직하게 슬퍼하는 법을 망각하는 것이 아닐까. 감정이입이라는 아름다운 자기 기만술은 고통을 제대로 앓는 용기, 철저히 고립되어야 얻을 수 있는 자유를 앗아가는 것은 아닐까.


자기개발, 또 하나의 자폐증


천명관의 《유쾌한 하녀 마리사》의 인물들은 고통의 소통 불가능성을 소름끼치도록 투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들은 신파가 고통을 숙주로 하여 고통의 내용을 타자화시키는 무의식의 전략임을 ‘몸으로’ 안다. 신파는 고통의 이미지를 현시하면서 고통의 기원을 회피한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편집된 타인의 고통을 향해 한바탕 시원하게 울고 나면 순간적으로 영혼이 정화되는 듯한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 착시다. 타인의 고통을 관음하며 감정이입의 눈물을 흘리더라도 우리 자신의 고통을 분석하는 눈은 전혀 깊어지지 않는다. 신파는 나보다 더 아픈 자의 눈물을 보며 느끼는 소시민적 안도감과 쉽게 연대한다.

천명관의 소설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소시민적 영웅상, 즉 UCC나 블로거 뉴스의 미담을 통해 현장 캡쳐되는 휴머니즘의 이미지와 절연한다. 그는 가장 순수해 보이는 존재에게서 가장 세속적인 욕망과 충동을 끌어내며, 가장 세속적으로 보이는 존재에게서 영혼의 턱없는 순수를 끌어낸다. 무엇보다도 천명관은 인물을 꼼꼼히 ‘읽지’ 않고 인물을 철저히 방목한다. 다만 소설 속 인물을 자신이 만든 텍스트 공간 속에서 ‘놀게’ 한다. 그는 관념 속에서 인물의 행동반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텍스트 속에 옴짝달싹할 수 없는 한계 상황을 만들어놓고 인물들을 그 낭떠러지로 슬쩍 밀어 끝내 추락하게 내버려둔다. 그들은 애면글면 절망을 견대내지 않고 위대하게 몰락하고 표독스럽게 고통을 떠벌린다. 그는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낭만적 신파나 계몽적 이념이 아니라 처절한 리비도 그 자체일 뿐임을 신명나게 긍정한다. 그리하여 그의 안티-신파는 안티-이념을 향해 질주한다.

그는 언어적 관습이 서사를 매너리즘에 빠뜨리기 전에 날것의 욕망이 제멋대로 서사를 휘두르도록 내버려둔다. 그에게 언어보다 선험적인 것은 이미지이며, 이미지를 움직이는 힘은 육체 안에 갇힌 욕망이다.

“우린 필요도 없는 고급차나 비싼 옷을 사겠다고 개처럼 일한다.”“우린 목적을 상실한 역사의 고아다. 제2차 세계대전도 공황도 겪지 않았지만, 대신 정신적 공황에 고통받고 있다. TV를 통해 우리는 누구나 백만장자나 스타가 될 수 있다고 착각했다.그게 환상임을 깨달았을 때 우린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자기 개발은 자위행위에 불과하다. 어쩌면 자기 파괴만이 삶의 해답일지 모르겠다.” (영화 <파이트 클럽>중에서)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독자는 물을 것이다. 천명관의 에너지는 “답은 이거야”라고 말하지 않는 것, 독자로 하여금 낭만적 감정이입이 아닌 투명한 상황으로의 몰입을 충동질하는 것이다. 그는 독자가 자신의 고통을 길들여 가장 ‘닮아 보이는’ 타인의 고통에 자신의 고통을 끼워 맞추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한 신파적 감정은 타인의 고통을 매개로 자아의 고통을 희석시키는 정신의 마취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공포에 사로잡히지만 않으면 된다. 그가 보여주는 세계, 신파의 단맛과 이념의 짠맛이 철저히 배제된 날고기의 ‘피맛’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다만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세계의 자극에 온전히 노출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천명관의 안티- 신파와 안티- 이념이 다다른 안티-서사의 세계는, 그리하여 저자가 차마 공들여 완성할 필요가 없는 정지된 화면이다. <델마와 루이스>에서 자동차가 허공에 멈춘 채로 충분했듯이, 천명관의 소설은 소설이 끝난 순간 비로소 독자의 마음속에서 시작되는 또 하나의 소설을 낳는다. 거의 소설을 읽는 행위는 타인의 지옥이 나의 지옥으로 전염되어 비로소 내가 나일 수 있는 세계의 또 다른 시작이다. 《유쾌한 하녀 마리사》를 통해 우리는 책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또 하나의 섬뜩하고 날선 이야기 앞에 알몸으로 서 있다.


그러니까 인디언에게 고통스러운 일들이 콜럼버스에게는 치적으로 둔갑되어버리는 등의 일이 아직도 지구촌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다. 가난한 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실적을 올리는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 승리자의 시선을 담은 성공담을 내어 새로운 착취자의 꿈을 심는 그런 요즘의 작태를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보여줄 것도 같다. 

 

p143

기억의 유통방식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기억의 본질이다. 어쩌면 현대인이 내리는 그 모든 역사적 해석들은 과거인들이 보기에 얼토당토않은 침소봉대이거나 못 말리는 연목구어일지도 모른다.

존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

그는 제국의 일보지만 제국의 야만 외부에 존재하고 싶다. 어느날 그는 제국인의 고문으로 시력을 잃은 채 구걸하고 있는 야만인 여자 한명을 발견한다. 그는 기묘한 인력에 이끌려 그녀를 자신의 거처로 데려오고 이해할 수 없는 욕망에 이끌려 그녀의 발을 씻겨준다. 참혹한 고문을 당해 원래의 온전한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그녀의 발은 제국의 야만이 훑고 간 폭력의 자리이며, 그의 잃어버린 기억과 그녀가 잃어버리고 싶은 기억이 만나는 제의적 공간이다.

“우리는 백년도 넘게 이곳에 있었소. 우리는 사막으로부터 농토를 보호하고 관개시설을 만들고 들에 곡물을 심었으며., 탄탄한 집을 짓고 도시 주변에 벽을 쌓았소.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우리를 이곳에 일시적으로 체류하는 방문객으로 생각하고 있소. 아직 살아 있는 노인네들 중에는 그들의부모가 이 오아시스가 전에 어떠한 형태의 것이었는지 그들에게 얘기해줬던 걸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오.” 제국인들은 야만인들에게 새로운 ‘문명의 기억’을 주입하려 하지만, 야만인들은 그들만의 오아이스에서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을 결코 순순히 지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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