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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사유의 기호 - 승효상이 만난 20세기 불멸의 건축들
승효상 지음 / 돌베개 / 2004년 8월
평점 :
집을 짓는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누군가가 거기에서 삶을 잉태할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요즘 우리는 집, 하면 아파트를 떠올린다. 이게 정상일까? 모든 것이 세계화되고 있는데
건축만은 아직 한국은 아파트가 답인 것처럼 보인다. 마치 왜 봄이 되면 꽃이 필까요?라는 문제가 꽃이 세상 무서운 걸 몰라서요, 아름다움을 보여주려구요 따위의 창의적인 답 대신 정해진 답을 써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계속 집=아파트라는 공식을 강요받은 기분이었다. 건축가들에게 건축은 무었이었을까?
그 당시는 국내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으로 오로지 건축만이 나에게 희망이었으니 나에게 닥친 그 건축의 한계는 내 삶의 한계와 다름이 아니어서 하루가 멀다했던 통음의 습관이 겨우 그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였다.
“나는 건축이 우리의 삶을 바꾼다고 믿는 자이다. 부부가 같이 오래 살면 서로 닮는다는 것도 한 공간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까닭에 그들의 삶이 그 공간의 지배를 받아 같이 바뀐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수도하는 이가 작고 검박한 공간을 찾아 떠나는 것도 그 공간의 지배를 받기 원함이라고 여긴다. 윈스턴 처칠 경도 1960년 『타임』지와 회견을 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We shape our Building; thereafter they shape us."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그 건축이 다시 우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좋은 건축은 좋은 삶을 만들지만 나쁜 건축은 나쁜 삶을 만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좋고 나쁨이 화려함과 초라함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화려한 건축 속에서는 삶의 진실이 가려져 허황되고 거짓스러운 삶이 만들어지기 십상이며 초라한 건축에서 바르고 올곧은 심성이 길러지기가 더 쉽다. 비록 그 건축의 효과가 즉각적이지 않다 우리가 느끼기에 더딜 뿐이지 건축은 우리의 인격체를 완성하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 그래서 건축은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건축이란 어떤 것이며 건축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일본인이 만든 ‘건축(建築)’이라는 단어는 건축을 설명하는 데 적합한 말이 아니다. 세우고 올린다는 물리적 운동만을 뜻하는 이 단어로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되는 건축의 오묘함을 설명하지 못한다. 영어의 ‘architecture’가 ‘건축(建築)’이라는 뜻보다는 조금 났다. 으뜸 혹은 크다는 뜻의 ‘arch’와 기술 혹은 학문이라는 뜻의 ‘tect’라는 라틴어에 어원을 둔 이 영어 단어를 직역하면 ‘원학(元學)’이나 ‘큰 기술’이 된다. 얼마나 건축이 중요하고 크면 그리 불렀겠는가. 심지어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가 건축이라는 단어에 정관사를 붙인 “The Architect”로 영어 성경에 기재될 정도이니 대단한 직업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단어 역시, 건축의 중요성을 강변하는 데는 적합할지 모르나 건축을 본질적으로 설명하는 데 좋은 단어는 아니다.
우리에게는 건축이라는 말 대신 참 좋은 단어가 있었다. 한자말이긴 하지만 ‘영조 [營造]’가 그것이다. 밥을 짓고 농사를 짓고 시를 짓듯이 집은 지어서 만드는 것이다. 짓는다는 뜻은 무엇인가. 어떤 재료를 가지고 생각과 뜻과 마음을 통하여 전혀 다른 결과로 변화시켜 나타내는 것이다. 단순한 물리적 운동의 결과와는 그 방법과 과정이 다르며 근본적으로 사상이 다르다.
흔히들 건축을 공학으로 분류하거나 예술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는 것이 나는 못마땅하다. 이는 건축이 가진 작은 속성을 오해한 결과라고 여긴다. 물론 건축에서 기술은 중요한 부분이다. 사실 20세기 들어 전개된 기술의 시대에서는 기술에 대한 표현이 건축의 중요한 목표인 적도 있었으며, 눈부실 기술 개발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개혁된 바도 크다. 이 기술의 속성은 항상 진보와 발전을 목표로 한다. 문제는 이 진보된 기술의 건축 속에서 우리는 더욱 행복한가 하는 데에 이르면 심사가 복잡해진다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노동자들을 위한 집합주택과 초고속 통신으로 모든 설비를 조정할 수 있게 된 현대의 원룸 아파트 주거의 평면 구조를 비견하면 그다지 달라진 게없다는 데 놀라움을 표하게 될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가 살았던 집의 평면을 잘만 모사하면 우리의 현대 생활을 더욱 윤택하게 하는 놀라운 현대주택을 가지게 될 것임을 결단코 의심치 않는다. 이는 바로 기술의 진보가 우리의 삶을 그 비례대로 진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스트리아 빈에 훈더르트 바서라는 미술작가가 아파트를 지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완성된 지 십수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관광객까지 모으는 그 건물이 과연 건축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 건물은 예술일지는 몰라도 건축으로서의 가치는 별무이다. 이 건물은 그 공동주택의 거주민을 위한 특별한 제안을 하지도 않고 있으며 주택의 내부 구조 또한 건축가로서의 새로운 삶의 조직을 만들어놓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옆 아파트의 주거 형식과 차이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외벽을 어지러운 색채와 장식으로 칠하고 덧댐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고 있을 뿐이다. 그 장식과 색채가 그 속의 삶의 시스템과는 아무 연관을 맺지 못한 채 그 벽면들은 하나의 도시적 스케일의 그림이 되어 칙칙한 빈의 거리를 화려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은 건축이 아니다.
아직도 건축은 많이 다가서기 힘든 구조들이다. 그러면서도 가장 많이 접하게 되고 어딜 가든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게 되는 것도 건축이다. 우린 좀더 건축에 다가서야 하고 좀더 많이 이해해야 한다. 무엇보다 건축은 그저 짓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담는 것이다. 그걸 알고 나서야 우리는 건축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