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1964)
범우사에서 나온 `무진기행`은 야행, 서울. 1964년 겨울, 역사, 무진기행 총 4편의 단편소설을 싣고 있다.
야행
현주는 동료 직원과의 결혼을 숨기고 은행에 다니고 있다. 낯선 남자가 손목을 붙잡아 끈 그 날 이후 그녀의 야행이 시작된다. 통행금지 시간이 다가와 택시를 잡는 여성에게 합승을 제안하는 남자들. 그녀의 은밀한 욕망은 답답함과 공포 사이의 아슬아슬함 속에서 피어오르는데... 야행은 계속되지만 덧없이 걷고만 있다.
서울. 1964년 겨울
제목에서 작가가 말해주는 시간과 공간의 느낌이 한껏 뭍어난다. 한 겨울의 선술집이나 시체팔기, 여관방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선술집에서 만난 동갑내기 안과 김, 그리고 아저씨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들의 대화는 툭툭 던지는 듯도 하고 무례한 듯도 공허한 듯도 하다.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의 대화는 팍팍하다. 배운 이도 가난한 이도 살기 힘든 세상이라 말하는 것만 같다. 여관에서 각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셋. 아침이 되어 도망쳐 나오는 안과 김이 결국 아저씨의 마지막을 함께 한 이들이다.
역사
하숙집 두 곳이 등장한다. 본래 살던 창신동의 그곳은 볼 것없는 인간 군상이다. 몸을 파는 영자, 일용직 노동자 서씨, 중년 아저씨와 딸 그리고 내가 하숙한다. 규칙도 희망도 없는 구린 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나는 가풍있는 집으로 하숙을 옮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들 내외, 손녀가 사는 집은 깔끔하다. 정확한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하는 가족들의 모습은 이질적이다. 기타줄 좀 튕겨보니 할아버지가 기타치는 시간을 배정한다. 천박한 장난으로 나는 약국에서 흥분제를 사 가족들이 마시는 물컵에 약을 탄다. 시간이 가고 벌컥 문이 열리기만 기대하는데 할아버지만 나올 뿐이다. 이야기를 마친 그가 묻는다. 어느 쪽이 잘못된 것인지.
`역사`는 그 시대 두 집을 보여주며 맞고 틀림을 묻는다. 소설 속 대답처럼 나도 글쎄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대비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일까? 전쟁 이후 혼란스러움과 현대 사회의 갈림길 속 이중적인 우리의 삶을 보여준다. 잘사는게 목표인 삶에서 어느 방향이 바람직했을까. 젊은이는 결정내리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다.
무진기행
나는 무진가는 버스에 올랐다. 명산물 하나없이 사람들만 복작거리며 살아가는 무진은 고향이자 나약했던 나의 과거가 가라앉아 있는 곳이다. 돈푼있는 과부와 결혼해 제약회사 중역자리를 바라보고 있는 내가 잠시 무진으로 온 것이다. 후배 박이 찾아와 동창 조를 만나러 간 자리에서 여교사 하인숙을 만난다. 촌동네의 좁은 관계 속에서 남녀의 감정도 엉킨 가운데 나는 하인숙을 낚아챈다. 서울로 함께 가자며 자신과 닮은 그녀에게 사랑을 말한다. 아내의 전보는 현실로 나를 부르는 손짓이다. 무진을 뒤로 하고 서울로 향하는 그의 뒤로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표지판과 안개가 멀어진다.
`무진기행`을 읽기 시작하면서 굉장한 걸 느껴야 한다는 미천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극찬받는 글이라는 인식을 떨쳐내고자 별거 아닌 단편소설이라고 되뇌었다. `무진기행`은 앞서 읽은 `역사`처럼 공간과 장소를 통한 대비를 보여준다. 서울과 무진이라는 상반된 지역을 통해서 말이다. 안개가 자욱한 무진은 늪같은 느낌이었고 사람을 가라앉게 하는 이미지다. 무진의 인물들도 생활감이나 활력보다는 내면이나 감정 위주로 표현된 것 같다. 서울에서 내려간 희중은 잠시 무진에 머물다 가는데 이면을 보여준다. 출세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면서도 보잘 것 없지만 젊었던 과거 무진에서의 자신을 끄집어낸다. 현실로 돌아가는 그는 마치 무진이 꿈인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무진의 단 하나의 명물 안개도 환상적인 이미지를 배가한다.
4편의 단편소설 속 인물들의 나이는 많지 않다. 많아도 기껏 30대 초반이다. 그들의 삶의 모습이나 이미지에서 중년의 느낌들이 많이 났다. 50년 전 청년들과 지금 젊은이들은 비슷하지만 많이 다를 것이다.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허무함도 공통되게 느껴졌다. 단편적으로 통제를 보여주는 통행금지나 데모만 봐도 사회 분위기나 통념을 짐작할 수 있다. 작가는 완연한 방관은 아니지만 허무한 감정을 통해 한탄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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