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과 영혼의 경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송태욱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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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전에 한 번 출간되었다가 절판, 이번에 역자와 출판사가 바뀌어 복간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사명과 영혼의 경계』. 절판되었던 덕분(?!)에 몇 남지 않은, 미답未踏의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목록 가운데 한 칸을 차지하고 있던 작품이다. 내용에 대한 사전 정보 전혀 없이, 시퍼런 색의 표지와, '영혼'이라는 제목의 한 단어와, 의학 서스펜스 스릴러라는 장르 소개를 종합해 짐작했을 때는 다카노 가즈아키의 『K.N의 비극』과 유사한 구조와 분위기를 상상했었는데, 읽어 가다 보니 예상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와 내용이 펼쳐지더라. 

 

 막상 읽을 때는 이야기 속에 푹 파묻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지만, 이 작품과 굉장히 유사한 구조와 얼개를 지닌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근작이 있음을 깨달았다. 바로 『매스커레이드 호텔』. 형사의 위장잠복은 없지만 호텔에 근무하는 프로페셔널 직원과 겹쳐 보이는 여주인공 수련의修鍊醫 유키, 호텔을 무대로 한 각 손님들의 에피소드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들의 그것과 닮아 있고, 호텔이라는 불특정 다수의 고객들이 바글대는 장소에서 특정한 목적을 이루려는 범인의 의도 역시 비슷하다. 시설물에 대한 '협박과 테러'라는 측면에서 작가의 『백은의 잭』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런 생각과 겹쳐보이는 이미지를 차치하더라도 너무나 익숙하고도 뻔한 전개와 어느정도 결말이 손쉽게 예상되는 분위기 등이 혹시나 하는 대작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일찌감치 접게 만든다.  

 

 그렇지만 병원과 의사, 간호사 등 특정 직업군에 대한 치밀한 사전조사를 바탕으로 한 생생한 묘사, 뻔한 예상을 한 발 쯤 헛디디게 만드는 몇가지 함정과 장치들, 나름 드라마틱한 이야기 등이 그래도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다 싶은 마음이 절로 들게 한다. 쉽고 가볍고 건조한 문체와 속도감 있는 전개 덕분에 시공時空을 잠시 망각한 채 무서우리만치 몰입하게 만드는 가독성 또한 훌륭하다. 후끈한 더위로 지친 여름 밤 나기에 더할 나위 없으리라. 

 

 간간이 독자의 심장을 향해 쏘는 비장의 한 발 역시 꽤나 날카롭고 매섭다. 

 

 "유족에게 중요한 것은 '납득'이야. 의사는 환자의 치료에 전력을 다할 뿐 아니라, 만약 유감스러운 결과가 일어났을 때는 유족의 마음에 남은 상처를 치유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네." (p.201~202) 

 

 "환자의 유족에게 반복해 설명하는 일은,"

 "의사가 자기 자신을 구하는 일이기도 하네." (p.203) 

 

 가볍고 건조한 난사 속에 슉- 팍- 하고 가슴 깊이 날아와 박히는 서늘하고 차가운 강철과도 같은 한 발 한 발. 히가시노 게이고를 끊을 수 없게 만드는 쉬크하면서도 절절한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의 백미는 마지막 수술실 장면에 있다. 이전까지 어느정도 예상되는 평범한 전개를 이어오다 최후의 결전과도 같이 벌어지는 라스트 씬. 각자의 사명을 지키고 완수하기 위해, 그 급박한 위기의 순간에도 침착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 나가는 의사와 간호사 및 병원 관계자들의 결의에 찬 모습들. 제목에서부터, 중간중간 언급되는 '사명'이라는 단어의 울림과 공명한, 어렵지만 아름다운 그 장면에서 가슴이 찡해 눈물이 솟아오를 뻔 했다. '사명을 완수하는 사람'들. 그 멋지고 당당한 풍모에 감복, 마음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움이 정수리에 이르는 짜릿함.  

 

 긴장감과 급박함, 드라마틱함이 충만한 너무나 멋진 절정이었다. 이 절정이야말로 뻔하디 뻔한 범작이라는 멍에를 훌훌 벗어 버리게 만드는 힘이자 망각의 유배지로 떠날 뻔한 죄인을 극적으로 돌려세운 성지聖旨다. 

 

 끝부분에, 모든 일을 겪고 한층 성장한 유키가 훌륭한 심장혈관외과의로서 멋지게 수술을 성공하는 장면을 보고 싶었는데, 매정한 작가 양반은 종점을 두 정거장 쯤 남겨둔 채 운행을 멈춰 버린다. 충분히 독자의 상상력으로 메울 수 있는, 내려서 혼자 힘으로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지만 뻔한 이야기와 뻔한 전개 끝에 뻔하지만 훈훈한 그 결말의 장면을 히가시노 게이고만의 솜씨로 만들어 먹여주길 바랐던 이에게 이보다 더 매정할 수 없는, 못내 아쉬운 '미완未完의 거리'다.  

 

 침침한 가로등 불빛 아래, 목적지까지 남은 그 미완의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 지나쳐온 정거장의 풍광과 그곳의 소리, 냄새, 스쳐지났던 인물들의 면면을 찬찬히 곱씹는다. 그렇게 생각의 앨범을 정리하고 목적지에 도달할 때쯤, 미처 지친 다리 쉬기도 전에 도달한 그 곳에는, 보일 듯 말 듯 씨익 미소띈 채 마중나온, 히가시노 게이고의 리무진이 그림처럼 기다리고 있을게다. 일말의 의심도 없이, 선선히 올라탄 채 그가 이끌어 데려갈 새로운 세계와 세상을 향해 눈짓하고 발돋움하겠지. 이는 영원의 굴레 속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찾아 올, 남아 있는 무수히 많은 밤과 낮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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