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비정근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소영 옮김 / 살림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찌는 듯한 여름의 한 가운데, 히가시노 게이고가 왔다. 『비정근非情勤』으로. 새롭게 발표한 작품은 아니고, 기존 국내 미출간작 가운데 한 편. 최초 현지 출간년도는 1997년으로, 햇수로 17년 전 작품이다.
교육자로서의 특별한 사명감도,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없는, 그저 먹고 살기 위한 한 방편으로 택한 기간제 교사인 주인공. 기존 교사의 사고나 출산 등 특별한 일 때문에 펑크난 자리를 메우는 기간제 교사인데다 원래 성격 자체도 시크하고 시니컬하고 무심하기 이를 데 없다. 때문에, 안 그래도 간명한 문체를 자랑하는 히가시노 게이고인데, 문장이 더욱 짤막 짤막하고 건조해졌다. 자칫 좀 더 무심했다가는 이 글(소설) 조차 쓰지 않았을지도... 싶을 만큼 사막 같은 내면의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추리소설가를 꿈꾸는 이 주인공, 부임한 각 학교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추리하고 손수 해결하며, 나아가 '미쳐날뛰는 원숭이들'로 묘사하기도 했던 초딩 꼬맹이들에게 나름 꿈과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기도 한다. 몇 주 있다 떠나면 다시 안 볼 학생들이라며 신경쓰기 싫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외양과는 달리, 은근히 관찰하고, 마음써주는 모양새가 '겉으로는 싫어하는 척, 아닌 척 하면서 속으로는 좋아하거나 신경쓰는' 모 인터넷 유행어를 절로 떠올리게 만든다.
살인사건이 일어나기도, 자살미수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사건과 추리 자체는 꽤나 가벼운 편이다. 각 챕터 분량도 많은 편이 아니라서 사건의 발생과 해결이 금방금방 이루어 지고, 크게 골머리 앓을만 한 수준의 사건은 등장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서술은 전무한데다 불면 날아갈 듯 건조하고 간명한 문체 덕분에 속도감과 진행에 있어 더더욱 빠르게 휘리릭 지나가는 바람과도 같은 느낌.
전체적으로 무난한 흐름이지만, 어린 나이의 초등학생들, 그들이 비좁은 교실 속에서 머리와 몸을 맞대며 복작복작 생활해 나가는 가운데 벌어지는 여러 종류의 결코 웃지 못할 사건들이 가져다 주는 생각거리들은 꽤나 인상적이다. 교실문 안쪽에 공기처럼 존재하는 우정과 배신, 시기와 질투, 동경과 배척 등. 이 특유의 인자들이 아이들의 눈과 손과 마음에 스며들어 아차 하는 순간에 벌이게 되는 안타까운 일들. 공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때로는 눈살 찌푸리게도 만드는 이 일들 역시 비정근 교사 주인공이 후루룩 해결하고, 잘못한 이에게도, 일을 당한 아이에게도 잘못을 바로잡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만 한 시크한 한 방을 휙- 날려준다. 그리고 동심으로 감싸여진 아이들의 가슴에다 대고 직접 탕- 하고 쏘아버리는, 녹록치 않은 현실과 세상에 대한 냉혹하고 비정非情한 한 발 역시.
깔끔하고 멋지게 디자인된 표지 역시 참 인상적인데, 다만 '비정규직이 비정한 현실에 던지는 돌직구!'라는 띠지 홍보문구는 작품의 내용과 메시지에서 180도 정도 빗나간 듯 하여 아쉽다. 문구만 보면 비정규직의 비애와 울분을 토하는 처절한 이야기를 상상하기 쉬운데, 실상 그런 내용은 전혀 없다.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도 이 주인공이 스스로 택한 일이며, 오히려 이 기간제 교사만의 여유와 생활을 즐기며 생활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제목은 '비정근'이지만, 내용상 학교 내외에서 벌어지는 교사와 학생들의 여러가지 사건 사고들이 주요 흐름이기 때문에 이에 포커스를 맞춘 홍보문구를 내걸어야 타당하지 않았을까.
늘 그렇듯 히가시노 게이고의 모든 작품이 '용의자 X의 헌신'일 수도 없고, 모든 작품이 '백야행'일 필요도 없다. 만약 이 작품의 작가란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름이 아닌 다른 작가의 이름이 걸려 있었다면 과연 이 작품을 관심 가지고 열심히 읽었을까 하는 일말의 의문이 스멀스멀 뭉그러니 피어오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펼쳐들고 읽어 나가는 그 순간 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면서도 흥분된다. 작품의 대소 규모, 트릭의 기발함, 캐릭터의 매력 등 이것저것 머리써 고민하고 고려하기 이전에, 오롯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읽는다는 그 자체만으로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자 기쁨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써내는 신작과 아직 국내에 미출간된, 아직 정복하지 못한 그의 세계가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흥분과 기대와 안도의 만감이 교차한다.
다음에 찾아올 작품에서는 또 어떤 세계와 삶과 추리와 카타르시스를 펼쳐 보여줄지. 찌는 듯한 여름의 한 가운데, 바라고, 또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