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감염유희 ㅣ 히메카와 레이코 형사 시리즈 5
혼다 테쓰야 지음, 한성례 옮김 / 씨엘북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일본의 인기 여배우 다케우치 유코 주연의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되어 인기를 끈 '스트로베리 나이트' 원작 시리즈이자 '히메카와 레이코 형사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 『감염유희感染遊戱』.
이 시리즈에 빛과 영광을 더해 준 것은 분명 시리즈 원작을 바탕으로 영상화 한 드라마와 영화가 맞겠지만, 원작의 구성과 흐름과 스토리, 그것이 주는 충분한 재미와 교훈과 가치를 온전하게 담아내지 못했다고 여겨지기에, 어설프고 조악하게 영상화 해버린 드라마가 원망스럽기는 처음입니다. 바로 이번 작품 '감염유희'를 읽고 나서 보니.
전체적인 구성은 세 개의 단편에서 다루어진 사건과 실마리들, 그것이 종내에 하나의 물줄기로 합쳐져 마지막 중편에서 결말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흐름을 쭈욱 한 번에 따라 읽어야 새삼 그 구성에 감탄하며 주요 소재 및 주제의식을 좀 더 직접적으로 가슴에 받아들일 수 있는데, 드라마 시리즈에서는 이것 저것 찢어다 여기 붙이고 저기 섞고 해 놓았기에 그것을 오롯이 느끼기에는 역부족입니다. 특히 마지막 '추정유죄 Probably Guilty'의 경우는 드라마 상에서는 너무나 축소시키고 단편화시켜 심각한 주제의식과 고민을 제대로 고려할 새도 없게 만들어 놓았음을, 원작을 읽고 난 이제서야 깨닫게 되었네요.
히메카와 레이코 형사 시리즈이지만 이번 작품에서 히메카와의 활약은 거의 없고, 출연 분량 역시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번 작품의 주연은 매력적인 악역 '간테츠' 카쓰마타 형사와, '노리' 하야마 노리유키 형사, 그리고 '지나친 정의'에서 등장했던 바 있는 전직 형사 쿠라타 슈지입니다. 히메카와가 잠깐잠깐 등장하는 형식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전작 『인비저블 레인』의 다소 충격적인 결말 이후 그녀의 행보와 계획을 알 수 있고, 앙숙 간테츠와의 투닥거림으로 읽는 이를 살픈 미소짓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시리즈 팬이라면 누구나 기대하고 기다릴 법한 키쿠타의 소식은 아쉽게도 없고, 다음 작품인 『블루머더』에서 상당히 '충격적'인 소식을 가지고 등장한다고 합니다.
15년 전 벌어진, 대상을 오인하고 벌인 한 살인사건. 아들이 살인범이 되어버려 무거운 마음과 곧 경찰을 그만둘 예정 속에 쿠라타 슈지가 마지막까지 쫓던 살인미수 사건. '인비저블 레인' 이후 관할서로 나간 하야마 노리유키가 뜨거운 분노를 토하며 추리해 낸 노인 간 폭행 사건의 전모.
이 세 사건에는 칠흑같은 어둠과 짙은 분노의, 그러나 결코 사건 당사자 개개인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아니, 볼 수 없었던 크나큰 '악의의 씨앗'들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 때 나는 알아버렸다. 사람은, 특히 원한을 품은 인간은 한 종류의 정보가 방아쇠가 되어 살인을 결심할 가능성이 생긴다." (p.284)
모든 것이 밝혀진 뒤에 살펴보면, 참으로 세세하고 치밀하게 짜냈구나 싶을 만큼 구성이 흥미롭고 너무나 멋집니다. 이 구성에서 비롯된 방법과 문제의식 및 주제의식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너무나 잘 와닿는, 그러기에 더욱 쉽사리 결론짓기 어려운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비록 범인의 치밀하고 비겁한 방법과 끝간데 없이 섬뜩하고 사악한 살의가 백 번 잘못되었다고 할 지언정.
그래서인지 작가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손쉽게 단죄하기가 어려운 이 범인을 그렇게 잔혹하고도 허망하게 처리합니다. 결국은 자신의 잘못된 언행으로 빚어진 비극이기는 하되, 사회의 시스템과 굴레 속에 억울하게 희생된 개인의 비극으로부터 벌어진 촌극이자 참극이기에 씁쓸하고 무거운 뒷맛을 남겨줍니다.
이 비극의 단초를 제공한 그들, 혹은 불특정 다수의, 나라를 불문하고 낙하산 및 온갖 무능과 비리로 뉴스에 오르내리는 고위 공직자들에 대한 현실적고도 막연한 분노. 오늘날 너도나도 인터넷 세상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누구나 걱정해야 할 개인정보와 사생활 노출,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것이 누군가에게 이용되고 악용되는 문제. 명백히 잘못을 저지르고, 수많은 비참한 희생자를 내고도 뻔뻔하게 웃으며 살아가는 인사들,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결코 단죄할 수 없는 그들을 향해 손수 휘두르는 무모하지만 장엄한 심판의 칼날.
그렇게 길지 않은 이 작품 속에는 이렇듯 다양한, 명백하면서도 쉽사리 단정지을 수 없는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문제와 곱씹을 거리들이 알알이 촘촘하게 수놓여져 있습니다. 배우들의 면면과 화려한 영상의 비주얼에 의한 매몰, 갖가지 각색과 변형 속에 상당부분 손상되고 퇴색되어진 이 문제의식과 주제의식들을 캐치하고 읽어낸다는 것만으로도, 드라마의 그것과는 견줄 수 없는 원작의 가치와 향기를 향유하는 뿌듯하고 뜻깊은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명한 듯 하지만 쉽게 시선을 진행시키지 못하게 하는, 날렵하고 매끈한 문장들과 그 속에 담긴 제법 깊은 맛 또한 원작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먹어보지 못했을 진귀한 산해진미가 아닐까 합니다.
"과연 몹시 자극적인 맛이다. 그러모은 생명을 농축하고 그 농축한 음식을 즐거이 단숨에 먹어치운다. 죄가 너무 무거워 차마 각각의 희생까지는 되새김질할 겨를이 없다. 너무 깊이 생각하면 입속에 들이밀지 못한다.
꾸역꾸역 먹는다. 죄악을 흡수해 동화된다. (중략)
각오는 되었다. 내가 떨어져야 하는 지옥쯤은 스스로 준비해두었다." (p.234)
충격적이면서도 즐거운 시리즈의 시작을 알렸던 '스트로베리 나이트', 진한 부성애가 가슴을 아프게 했던 '소울 케이지', 시리즈를 애정하는 팬들에게 작고 소중한 씨앗과도 같았던 '시머트리', 슬프지만 눈부신 빗속에서 벌어졌던 히메카와의 서글픈 춘몽 '인비저블 레인'.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재미있고 화려했던 앞선 그 어느 작품보다도 이번 '감염유희'를 더욱 흥미진진하고 의미있게 읽었습니다. 사회문제에서 비롯된 개인의 비극, 불특정 다수에게 치밀하게 뿌려진 깊고 어두운 살의의 씨앗, 농밀하면서도 흥미진진한 구성 그 자체와 간명하면서도 깊은 맛을 주는 문장들. 시리즈를 쭉 집필하면서 더욱 물오른 손맛를 과시하는 혼다 테쓰야의 솜씨가 눈부셨던, 아니, 이것저것 갖다붙여 얘기할 것 없이, '참 마음에 들었던'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시리즈에서 떼어놓고 그냥 일반 독자들에게 들이밀어도 꽤나 호의적인 반응 이끌어낼 수 있을 만 한 재미있는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농익을 대로 농익은 솜씨, 그리고 캐릭터와 이야기가 가져다주는 매력 물씬한 시리즈의 다음 작품이 더욱 기대되고 기다려지는 것은 비단 저 뿐만은 아닐테지요. 히메카와의 다음 행보, 키쿠타가 물고 올 '충격'적인 소식, 히메카와 반의 개성넘치는 인물들은 과연 다시 뭉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 새로운 사건과 새로운 등장인물에 대한 기대, 악랄하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카쓰마타 등.
새 작품이 이미 나와 있고, 국내 출간 역시 확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깊은 안도를 가져다 줍니다. 그것은 히메카와 유희에 감염된 한 독자의 어쩐지 어리석으면서도 만인공감 할 깊고도 환한 기려한 안도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