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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케 전설 살인사건 ㅣ 명탐정 아사미 미쓰히코 시리즈
우치다 야스오 지음, 김현희 옮김 / 검은숲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총 113편의 방대한 볼륨을 자랑하는 '명탐정 아사미 미쓰히코' 시리즈 두 번째 작품 『헤이케 전설 살인사건』. 느즈막하게 등장해 사건을 해결하고 이름을 알린 전작 『고토바 전설 살인사건』과는 달리 작품 초중반부터 이리저리 뛰며 적극적으로 수사하고 추리해 사건을 해결합니다.
간명한 문체와 책장 넘어가는 속도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명료하고 활달한 전개를 선보이는 이번 작품은 압축률 높은 이야기 밀도를 자랑하며 분명 전작보다 진일보한 수준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페리 여객선 선상에서 벌어진 추락사고, 한 건의 밀실트릭, 과거 태풍이 휘몰아치던 날밤의 아스라한 기억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아련함과 애틋함, 그로부터 비롯된 종내의 반전 등 다양한 트릭과 읽을거리를 짜임새 있게 꾸며놓았습니다. 그 수준이 첨예하여 하늘에 닿을만큼 높은 대작까지는 아닐지라도 읽는 이를 빨아들이는 몰입도와, 애처로운 사연이 녹아난 서글픈 이야기라는 점에서 충분히 고전 명작 반열에 올려놓아도 손색 없는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선상 추락사고와 밀실트릭,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반전 등 추리 자체에 관련한 솜씨 역시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다만 '헤이케 전설 살인사건'이라는 제목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큰 오점내지는 단점이 될 수 있겠는데, 제목에서 풍기는 냄새는 분명 '김전일스러움' 혹은 '긴다이치 고스케스러움'이 진하지만, 이 시리즈에 대한 사전지식없이 얼핏 제목과 분위기만으로 이 작품을 집어든 독자라면 분명 강한 배신감을 느낄 수 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전설'과 결부되어 고풍스럽고 두려움을 자아내는 사건과 추리 가득한 '요코미조 세이시'류의 작품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외려 제목은 '무슨무슨 전설 살인사건'이지만 작품 자체는 지극히 현대적이고 깔끔하며 세련된 외관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작가가 전작 '고토바 전설 살인사건'이 전설이라는 제목 덕분에 더욱 흥했다고 보기에 차기작 제목 역시 '전설'이 들어간 제목으로 지었다고 하는군요. 이거야 원 '장미의 이름'도 아니고 말이지요.
어쨌거나 '헤이케平家(일본 중세시대 최고의 권력자였던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의 가문과 세력을 일컫는 말)'나 '전설'이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않고 작품 자체의 분위기와 이야기에 집중한다면 배신감보다는 '만족이라는 이름의 열매'를 손에 쥘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네 사정과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은, 지방에서 태어나 서울(도쿄)로 상경하여 직업을 갖고 살지만, 깊은 정서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힘겨운 밥벌이와 팍팍한 인심에 지쳐, 못내 고향과 고향사람들을 그리워하는 타향살이의 고독함. 치밀한 보험사기를 일으키는 작품의 중심인물 세 명은 이런 고독함과 힘겨움을 안고 있었습니다. 또한, 숨겨진 도원桃源과도 같은 오추도 마을을 어린 나이에 떠나 각지를 떠돌며 외롭고 어두운 삶을 살아온 '타로'와 '노리'의 수구초심首丘初心 역시 애틋하고 애처롭기 그지 없습니다. '그 날 그 태풍의 밤'에서 비롯된 사연 역시...
아사미 미쓰히코가 사건 해결을 위해 이곳 저곳을 다니며 보는 풍광과 묘사해주는 인상들이 자못 서정적입니다. 간명한 문체 속에서도 간간이 폐부를 찔러 오는 낭만적인 문장들이 고속도로를 달리며 휙휙 지나치는 저 먼 곳의 산수山水처럼 잠시 갓길에 차 세운 채 한 없이 바라만 보고픈, 눈 앞에 있는데도, 손에 닿을 것만 같은데도 결코 이르지 못하는 저 곳 '피안彼岸'같은 느낌으로 가슴에 아로새겨집니다. 높은 가독성으로 인해 쉴새없이 책장을 넘기다 잠시 멈춘채 여러번 덧읽고 곱씹는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문장들. 짜임새 있는 이야기와 더불어 아사미 미쓰히코 시리즈가 갖는 큰 힘과 매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이 쓰여진 시대(1980년대)를 감안하면, 우리나라보다 나이를 한살씩 적게 치고, 병역 의무가 없는 나라임을 생각하면 서른 세 살이라는 나이가 결혼적령기를 훌쩍 뛰어넘은 노총각임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아사미 미쓰히코. 명망 높은 집안의 키크고 잘생기고 명석한 이 노총각 젊은이에게 조금 뜬금없이 찾아오기는 하지만 사랑의 인연과 연정이 깃들기도 합니다. 이 나이 먹도록 장가 안가고 어머니 눈치 받으며 얹혀 사는 노총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뜬금없는 전개이기는 한데, 어쨌거나 이 연정과 사건이 얽히며 벌어지는 일들도 있어 전혀 '뜬금포'스러운 사랑인 것만은 아닙니다.
이 사랑과 인연은 어떻게 끝맺음 할지 다음 작품들을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작가 후기에서 이후 아사미 미쓰히코의 나이가 서른 셋에서 더 올라가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기에 결국은 못다한 사랑이 되어버릴 것이 예상됩니다. 고토바 전설 살인사건에서는 서른 두 살, 차기작 헤이케 전설 살인사건에서는 서른 세 살. 첫 번째 작품과 두 번째 작품 사이에 명탐정은 자연스레 한 살을 더 먹었지만 이후로는 서른 셋에 못박힌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또 다음 후기에서 밝혀준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궁금해서라도 다음 작품이, 아니 다음 작가 후기가 매우 기다려집니다. 무려 113편의 방대한 볼륨을 자랑하는 시리즈인데, '영원히 서른 셋'이라고 하니 '20년째 초등학교도 졸업 못하고 있는 어느 꼬마 명탐정'이 절로 떠오르기도 하는군요.
방대한 시리즈 가운데 이제 두 번째 걸음. 아직 갈 길은 멀고 명석한 아사미 미쓰히코가 찾아올 날들은 무수히 많이 남아있지만, 이 볼륨 큰 시리즈가 모두 번역·출간될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겠지요. 현지에서 얻은 인기만큼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몰이를 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113편 가운데 명작이라 손꼽이는 작품들은 선별되어 모두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나이 먹지 않는 명탐정'에 얽힌 작가 후기를 위해서라도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