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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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채가 없다는 것, 이렇다 하게 내세울 것도 별로 없고, 그저 주변 사람들이 그의 텅빈 마음 속 공간에 잠시 머물렀다 이렇다 할 이야기도 핑계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흔적도 없이 떠나 사라져 버린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속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를 표현하는 말이지만, 이 말은 하루키의 작품 그 자체를 그대로 관통해 잘 드러내주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긴 제목. 그저 처음에 몇 줄 끄적여 놓은 것에서 시작해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될 지 아무것도 생각지 않은 채 붓에만 모든 것을 맡겨 나아갔다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세간의 혹평처럼 실체 없이 허세만 가득한 뜬구름 같은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지만, 책장을 덮은 뒤 냉정하게 되짚어보면, 꼭 읽어야만 하는 이야기라거나, 놓쳐서는 안될 필수불가결한 정거장 역시 아닙니다.  

  

 최근 모 영화에 대해 평한 한 평론가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우리(너희)까지 이 이상한 열풍에 휩쓸릴 필요는 없다'. 즉, 하루키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하고, 하루키의 글을 맛있게 잘 먹는 사람들은 빼먹지 말고 이 하루키역에 교통카드 찍고 들어가 그대로 승차하면 될 일이고, 하루키를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들이나 별 관심 없는 사람들, 하도 주변에서 하루키, 하루키 하니까 이게 뭔가 싶어 기웃거려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대로 지나쳐 자신이 목표한 지점을 향해 걸어가면 그 뿐입니다.  

  

 전철을 타고 햇살을 받으며 달리는 지상선로의 어느 지점 즈음에, 파릇파릇 돋아난 풀무더기 몇 포기와 덩그러니 놓여 있는 조약돌 몇 개에 눈길을 주고, 그 현상을 곱씹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 보는 일. 누군가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그저 눈 내리깔고 한숨 잠을 청하는 일만도 못한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내면의 우주를 발견하는 깊고 깊은 사색의 찰나일 수도 있습니다. 하루키의 소설, 특히 이번 신작을 읽는 일이란 그런 것입니다. 

  

 감각적인 표현과 색다른 맛을 느끼게 해 주는 문장들이 '이것이 하루키의 근원이자 저력이지' 싶게 만듭니다. 쓰쿠루가 처한 상황, 쓰쿠루의 사색들, 쓰쿠루의 상실감 등 여러 상황에서 쓰여진 '적당히 잘 삶아진 파스타 면발'스러운 비유와 표현들이 '버릴까 말까'하는 마음의 갈등을 점점 연장시키며 소설의 종착역까지 이끌어 갑니다.  

  

 밑도 끝도 없이 죽음 운운하며 허세부리는 양 느껴지는 소설의 시작부터 강하게 올라오는 뜨거운 반감의 역류도 쓰쿠루가 겪어야 했던 일, 쓰쿠루가 처한 상황을 알게 되면서, 달궈진 쇳덩이가 차가운 물에 급격하게 식혀지듯 치익- 가라앉았습니다. 지나쳐 온 제 삶의 정착역 어딘가 즈음에도, 그렇듯 말없이, 일말의 변명 한 조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져 없어져 버린 사람들과, 자의적이건 혹은 타의에 의해서였건, 불시에 한없이 따스했던 원과 무리로부터 야멸차게 내팽개쳐져 튕겨 나갔던 경험의 쇳꼬챙이가 섬뜩하게 가시박힌 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따스하고 한없이 그리운 황금의 균형 상태를 상실할 것이 두려워, 나도 모르게, 어리석게도, 스스로 주변의 모든 것들을 매몰차게 외면하고 돌아서 버린 적도 있습니다. 한 두 번이 아니죠.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입니다. 

  

 쓰쿠루의 '상황'과 나이에 도달한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제게도 순례를 떠나 산산이 조각난 채 상실의 우주를 떠돌고 있는 시간의 파편들을 거둬들이고, 창백한 피를 쏟으며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가슴의 용혈溶穴을 메워 없앨 수 있는 처절한 기회가 찾아오게 될런지. 그 순간이 찾아온들 한없이 부끄럽고 괴로운 역사의 한자락 앞에 똑바로 고개들고 눈 맞춰 제대로 응시나 할 수 있을런지. 미지수. 지금으로서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심연沈淵의 나락那落 일테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불현듯 뒤털고 일어나 제대로 씻고 단장하지도, 옷도 제대로 갖춰입지조차 않은 채 맨발 맨걸음 내딛어 차갑고 어두운 바닥에 가만히 볼을 대어 볼 용기가 짜릿하게 스며들기를. 고개 돌린 채 지극히 이율배반적으로, 간절하게 바라 봅니다. 

  

 버릴 수 없이, 아끼고 아껴 곱씹는 감각적인 문장과 표현, 머리를 거치지 않고, 처지와 상황을 고스란히 가슴으로 받아들인 서글픈 공명共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전철 선롯가 어디 쯤에 자라난 풀 한 포기, 어디 즈음에서 눈에 들어온 돌멩이 하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과도한 선인세에 대한 많은 논란과 알맹이 없는 문학이라는 하루키 소설에 덧씌워진 멍에,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아니, 그것을 고스란히 차치하더라도. 

  

 크나큰 상실, 젊은 날의 고독과 방황.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와 메시지, 쓰쿠루의 행보 등을 가만히 지켜보면, 작가의 유명한 작품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를 떠올릴만 한 얼개와 형태를 지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작가 스스로 그것을 의식하고 의도하며 집필했는지, 그저 붓가는 대로 저벅저벅 나아가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이 소설의 긴 제목을 '상실의 시대 II' 혹은 '핀란드의 숲'으로 바꿔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얼풋설풋 해 보았습니다. 작가가 그리던, 혹은 그리는 것처럼 보였던 '거기, 그 곳'에 차마 가 닿지는 못하고 중간에 어정쩡하게 멈춰 서버린, 또는 하이얀 포말을 흩뿌리며 도중에 해체되어 사라져 버린 메마른 양상이라 할 지라도.  

  
 색채가 없다는 것. 이렇다 하게 내세울 것도 별로 없는 보통, 평균. 그저 주변 사람들이 그의 텅빈 마음 속 공간에 잠시 머물렀다 이렇다 할 이야기도 핑계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흔적도 없이 떠나 사라져 버린다... 늘 그래왔듯, 다자키 쓰쿠루는 하루키 분신이자 영념影念의 조각입니다. 독자의 가슴에 깊은 생채기를 새겨 놓는 예술가는 아닐 지라도, 어딘지 모르게 텅비어 보이는 아스라한 공간이 영 마음쓰여 한번쯤 들어가 볼 여지를 남겨 주는 사람. 무심한 듯 무미건조하게 던져주는 활자 한 줌 가운데 서너 개 쯤 건져 훌훌 먼지털고 혀를 대어 볼 만용을 부리게 만드는 사람. 내 주변을 훑고 사라지는 수많은 시간 가운데 한줄기 이채로운 색채로, 본 듯 잊은 듯 생생하게, 그리고 흐릿하게 뇌리 속 바람길을 그대로 따라 스쳐 흘러가는 한가로운 미풍 한 조각. 그것이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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