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의 여자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오후세시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육감적인 몸매와 얼굴, 남자를 홀리는 기묘한 솜씨로 가는 곳마다 짙은 의혹의 소문들을 진하게 흘리고 다니는 여자. 그리고 그 여자와 직접·간접적으로 얽히며 여자에 대해 입방아 찧기도, 여자에게 엉뚱한 마음 품기도 하는 남녀노소 인간 군상들.  

  

 《소문의 여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면면과 그들만의 목소리, 큰 물줄기 아래 지류처럼 뻗어나간 여러 이야기들을 다시 댐으로 불러 모아 거대한 호수로 만드는 절묘한 구성, 익살스러움에 피식, 한탄의 피식, 경탄의 피식, 절로 쓴웃음 짓게 만드는 대화와 글솜씨 등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의 재기발랄한 손맛이 잘 발휘된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돈 많은 남자들을 차례로 꿰차고 들어갔다가 이내 그 남자들은 차례로 급사, 각종 이권이 개입된 곳에서 절묘한 협박으로 이득을 취하기도 하고, 사소한 곳에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인사들을 기묘한 술수로 내쫓아버리기도 하는 무서운 여자 미유키. 직접적인 그녀의 '손놀림'은 잘 묘사해주지 않고, 그저 남들의 쑥덕공론이나 일의 경과를 얼핏설핏 전해 듣는 형태로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언뜻 '백야행의 그녀'와 비스무리한 실루엣을 일렁이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만 미유키의 경우에는 좀 더 적극적인 수단으로 직접 손쓴다는 것이 확실한 차이점. 

  

 남의 일을 안주삼아 질겅질겅 와그작와그작 씹어대는 사람들. 소문은 소문을 잉태하고, 소문은 소문이라는 이름의 아들과 딸을 낳고. 따지고 보면 지극히 익숙한, 바로 나와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는 이 행태, 그리고 미유키의 행각 그 자체도 곱씹을 거리가 많습니다만, 이 작품의 진정한 묘미는 그 미유키를 두고 얽히는 다양한 직업과 처지의 사람들, 그들이 보여주는 만화경과도 같은 '인간 군상 퍼레이드'에 있습니다. 직장 동료가 산 중고차의 결함을 트집잡아 중고차 판매점에 타이어 하나라도 뜯어내려고 수작부리는 진상 직상 상사, 육감적인 미유키와 어찌 한 번 엮여보려고 애쓰는 동창생, 인맥으로 타고 들어와 실습 재료들 마저 자기 집안 슈퍼에서 팔다남은 상태불량한 것들을 가져다 쓰는 요리 교실 강사, 시영 아파트 입주권을 얻기 위해 요리 교실에서 만나 설풋 친해진 (공무원 남편을 둔) 동료에게 온갖 떼쓰며 진상부리는 여자 등등. 가난에 찌든 집안의 무거운 공기, 경찰서 내부의 어처구니 없는 알력과 비리, 지방 건설업자 연합회 꼰대들의 추태, 무식하고 단순한 현 의회 의원의 속사정 등등. 

   

 이 모든 인간 군상들과, 이 모든 상황들을 직접 겪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의 솜씨가 얼마나 놀라운지 새삼 재삼 경탄하고 감탄할만한 작품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소한 한 문장, 대화 한 마디 낭비 없이 풍자와 해학을 곁들이며 자조의 쓴 웃음이 절로 배어나게 만드는 글빨입니다. 일본 사회 다양한 곳곳의 사는 모습들을 곁눈질해 볼 수 있는 재미있는 기회라 여겼는데, 자꾸 보다보면 굉장히 익숙한 모습들이라 이 곳이 일본 모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네 사는 모습, 우리 주변 동네 어느 곳에서 일어날만한 매우 일상스러운 일들임을 곧 깨닫게 됩니다. 좀스럽고 사소한 이익에 집착하는 이기적인 사람들과, 크게 크게 한 탕씩 해먹고 치고 빠지는 간 큰 여자 미유키와의 대비 그 자체도 무척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현실적인 대사와 처지들이 공감되면 될수록, 미유키의 악행보다 자잘한 인간 군상들의 행각이 더 한심스럽게 여겨지고 우려되면 될수록, 어쩐지 맥이 빠지고 한숨 지어지며, 가슴 답답해져옴은 비단 저만 느끼는 감정의 파동은 아닐테지요. 충분히 재미있고, 공감되기도 하고, 촌철살인의 묘미도 넉넉하지만, 비록 형식적이라 할지라도 독자가 이렇다하게 느낄만한 한 톨의 교훈과 카타르시스가 부재한다는 점이 이 작품을 다시 손에 잡도록 하는 행동을 꺼리게 만듭니다. 팍팍하고 힘든 삶이지만 일말의 빛과 희망이 있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 아무리 '독자를 계도할 생각은 없다'라고 못박는 오쿠다 히데오라지만, 숨통은 터주고 어두운 발 언저리에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라도 슬쩍 비춰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중그네》 못지 않은, 아니 오히려 '공중그네'의 그것보다 진일보한 관찰안과 통찰력을 선보이는 오쿠다 히데오 간만의 걸작이라 할 수 있겠지만, '공중그네'와의 결정적인 '그 차이' 때문에 이 작품을 다시 들춰보는 일은 여간해선 없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재독의 손길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책장 속 포지션이 으슥하면 으슥할수록 외려 이 작품의 완성도와 가치가 드높아지는 아이러니. 그렇게 덮어지고, 꽂힌 채 슬그머니 잊혀져 갈테지요. '소문의 여자'가 흘리고 간 온갖 검은색 소문의 꼬리만큼이나 길게 드리워진, '오쿠다 히데오 신작 《소문의 여자》 재밌더라, 볼만하더라'라는 무성한 소문의 글자취만을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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