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월담
누쿠이 도쿠로 지음, 한성례 옮김 / 씨엘북스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지구에서 가까워 때로는 그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커보이기도 하는 달. 밤마다 흐붓한 하얀 빛을 뿜으며 마음을 적셔주기도, 공상과 이상의 세계로 인도해 주기도 하는 달. 그러나 달이라는 존재는 영원불멸하지도, 결코 제대로 손에 와 닿지도 않습니다. 때때로 이지러지고 모습을 바꾸고, 모습을 드러내기도, 감추기도 하며 마음만 싱숭생숭 심란하게 만드는 그 달.     

     

 누군가를 이쪽 한켠에서 늘 지켜보고 그리워하며 사랑한다는 것은, 지구와 달 사이에 놓인 우주공간의 거리와 깊이 만큼이나 가깝기도, 멀기도, 그 암흑의 공간을 헤쳐 건너가는 것 만큼이나 어렵기도 한 일입니다. 태양이라는 존재를 피해 어둡고 어두운 한밤중에만 그 모습을 훔쳐볼 수 있는 대상이며, 태양이 없으면 그 빛을 타인에게 드러낼 수 조차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언제고 내 손에 움켜 잡을 수 있을까, 저 달이 내가 있는 곳으로 와 나에게 닿을 날이 올까, 내 몸과 마음을 죽음과 공허라는 이름의 우주에 던져서라도 저 달에 가 이를 수가 있을까.  

  

 누쿠이 도쿠로의 《신월담》은 반평생 넘도록 한 남자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마음의 부침浮沈을 겪고, 완성할 수 없는 사랑의 고독함에 가슴 사무쳐 한 한 여인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누쿠이 도쿠로가 말하는 '신월(新月)'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분명하게 언급되어 나오지만, 저는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저 달에 두고 결코 사랑을 맹세하지 말아요'라고 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대사를 떠올리며, 그 어리석은 배반의 달을 몽매에 그리며 한 평생 바라보다 끝내 돌이 되어 사라져간 고독한 여인의 모습을 그려, '망월담望月譚'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불러 봅니다. 

    

 

   

 후에 사쿠라 레이카라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변모하는 고토 가즈코의 사랑은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언제나 말 번지르르하게 하며 마음을 농락하고, 자기 편할 대로 왔다가 다른 이와 달아나 숨어 버리고, 여자의 마음과 생을 어지럽히고 이리저리 바꿔놓는 남자. "당신이 싫어져서 이러는 게 아니야, 이해해줘"하는 대사를 서슴없이 내뱉으며 남자의 입장에서도 상상하기조차 싫은 이기적인 행동을 일삼는 천하에 몹쓸 놈이 대체 뭐가 좋아서-. 때문에 읽는 내내 이 작품의 또다른 이름을 작가의 대표작 제목에 빗대 '우애록愚愛錄'이라 지어 부르기도 했습니다.  

  

 마음 한 켠에는 가즈코를 천치, 얼간이로 매도하는 질시의 목소리가 가득했지만, 다른 한 켠, 언젠가 깊이 뿌리 박혔다 그 주변의 살점까지 함께 쑤욱 하고 뽑혀 나가버린 애상哀傷의 잔해, 그 깊은 저 어딘가에서 스며나오는 또 다른 목소리에는 '그럴 수 있지... 나도 그런 적이 있었지... 내 마음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던, 내 마음이 내 것이 아니었던 그런 때가 있었지...'하는 지금도 살짝 아리는 파편의 암영暗影이 묻어 있습니다. 그땐 정말로 앉아 있는 시간, 서 있는 시간, 걷고 있는 시간 할 것 없이, '저 달에 가고 싶다. 저 달로 보내줘.'하는 생각만이 온 몸을 지배한 채, 이 세상에 다리 딛고 숨쉰다는 것 자체가 괴롭고 힘겨워서 나만의 어둠 속으로, 저 먼 공상과 이상의 시공간으로 날아가 소멸되어 버리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즈코가 피와 눈물로 써 내려간 우애록에는 제 자신, 언젠가 어느 한 날의 부끄럽고 어리석은 제 모습도 함께 그려져 있었던 겁니다. 비록 사랑의 형태는 조금 다를지라도, 어찌됐건 생의 끝까지 그의 곁에 있을 수 있었던 그녀와 달리, 한 순간에 바스라져 흩어져 날아가버린 메마른 꽃잎같은 시간의 한 조각이었을지라도. 

  

 불행과 행복의 경계를 쉬이 가늠하기 어려운 가즈코의 사랑과 생애. 가즈코는 모든 것을 쏟아낸 단 한 번의 고백, 이후 남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남으로써 이 어리석은 사랑을 '완성'했습니다.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그 누구보다, 그 언제보다 행복한 웃음을 가득 지닌 그 시절 가즈코의 그 추한 얼굴에서, 짧지만 어딘가 되짚어 볼 거리가 그래도 조금은 남아 있는 내 삶의 회한과 외면과 아쉬움의 시간, 공간, 조각들을 더듬어 볼 용기를 얻습니다. 그 용기의 순간은, 끝내 사무치는 그리움과 후회의 비수가 되어 식은 가슴 아리게 합니다. 가즈코의 웃음, 그 모습이 끝내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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