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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여름
아카이 미히로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제49회(2003년) 에도가와 란포 상을 수상한 《저물어 가는 여름》은 유명 신문사 공채 합격자의 집안 사정으로부터 촉발된 20년 전 영아유괴협박사건의 진실을 다루고 있는 작품입니다. 느즈막한 나이에 데뷔한 작가 아카이 미히로는 TV방송국 기자 출신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당업계의 면모와 그림자를 이 작품 속에 생생하게 투영해내고 있습니다.
2개 외국어에 능통하고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도자이 신문사 입사 합격자 아사쿠라 히로코. 알고보니 그녀의 아버지는 20년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영아유괴사건의 범인. 한 주간지가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도자이 신문사 측은 입사를 포기하려는 히로코를 설득함과 동시에 20년전 사건에 대해 재조사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 초반부 논란의 여부에 대해서는 그리 쉽게 공감이 가지는 않았습니다. 20년전 사건 범인의 딸이라고 해서 세간의 입방에 오르내리는 것도 그렇고, 그렇다고 도자이 신문사 측이 그것을 문제삼아 합격을 취소시켰다거나 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사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입사를 반려하겠다는 당사자를 간곡하게 설득하까지 하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라는 것이 병원에서 영아를 유괴해 병원을 협박한 아주 악랄한 사건이고, 당시 범인의 사망으로 사건은 종결되었지만 끝내 이 아기의 생사행방은 밝혀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렀다는 점을 상기시켜주자 아, 미처 끝나지 않은 그 악랄한 죄질의 족쇄가 그 딸에게도 채워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그 딸이 가지려는 직업이 불특정 다수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언론사 기자이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치 20년전의 사건에 또 다른 진실이라도 있는양 사건을 재조사·재취재하고 나서는 것은 좀 억지스럽기도 했습니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전직 형사, 사건을 취재했던 기자들, 사건의 당사자들 대부분이 20년전 사건에는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착착 밝혀지는 새로운 진실의 궤軌를 순탄하게 굴러굴러 흘러가는 재조사. 어쩌면 그렇게도 순조롭게 중요 인물들과 관계자들을 차곡차곡 만나게 되고, 20년 전의 일들을 잘도 기억해내고 되살려내고, 그 때는 말하지 않았던, 혹은 그 때는 미처 생각안났던 일들이 무려 20년 후에 마침 딱 떠오르게 되는지... 좀 에둘러가고 힘들게 가더라도 이 과정을 좀 더 흥미롭게, 최대한 덜 작위적이게 쓸 수는 없나 하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만일 그게 된다면, 그 소설이야말로 엄청난 작품이 되겠지요. ^^;
초반부 인물들의 성격이나 대사 등이 너무 단조로운 것 아닌가 하며 읽기 시작했지만, 영아유괴사건 당시를 떠올리며 묘사해 나가는 부분은 상당히 생생하고 긴장감 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작품에서 가장 잘 쓰여진 부분이며, 드라마틱한 전개와 묘사가 제법 훌륭합니다.
안타깝게도 사건의 진실과 범인, 그 아기의 행방은 중반부 한 인물의 너무나 적나라한 대사 딱 한마디 때문에 너무나 손쉽게 간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주변 관계자들의 아픔과 힘겨움이 주가 되는 작품이기에 진실 그 자체가 생각보다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유지한 채 작품을 이끌어가는 큰 힘이 되는 그 패를 너무나 쉽게 알아차리게 해 버린 것은 상당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물론, 제 경우에만 그랬을 뿐, 다른 분들은 그것을 알아채실지 어떨지는 모를 일입니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이거든요.
나름 생생하게 묘사된 언론업계의 뒷모습과 흥미로운 플롯,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는 주제. 발표 당시로서는 신인작가였던 사람과 이 분야 대모의 자리에 오른 사람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만 읽는 내내 미야베 미유키를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지극히 미야베 미유키스러운 소재와 주제, 그리고 미미여사였다면 훨씬 더 절절하게 그려냈을텐데 하고 말이지요. 그러나 앞서 말한대로 신인작가와 이 분야 최고수의 솜씨를 직접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 몇몇 거칠고 투박한 재료와 솜씨를 제외하면 충분히 재미있고 읽을만한 작품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사건 범인의 딸, 아기를 납치당한 부부, 사건이 일어난 병원의 병원관계자들, 그렇게 사건을 종결시켜버렸던 수사관계자들, 의혹과 진실을 좇아가는 취재관계자들. 사건에 직접 관계된 당사자 모두에게는 지난 20년이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무덥고 힘겨운 여름인 채, 사건이 일어났던 그 여름날이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어 속을 뜨겁게 태운 채, 계속 메말라 가고 있었을 겁니다. '저물어 가는 여름'이란 제목은 이런 뜨겁고 무섭고 힘겨운 여름이, 마침내 밝혀진 진실로 말이암아, 드디어 당사자들의 마음 속에서 서서히 저물어 간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 여름의 끝에, 서글픔과 회한의 낙과落果 가득한 공허한 들판 대신 화해와 행복으로 결실맺는 아름답고 기분좋은 가을로 여울졌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