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안 - 일본 최고의 미스터리 작가 9인의 단편집
미야베 미유키 외 지음, 한성례 옮김 / 프라하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미야베 미유키, 아야츠지 유키토, 시마다 소지, 미치오 슈스케, 모리무라 세이치, 아리스가와 아리스, 오사와 아리마사, 요코야마 히데오. 일본 추리미스터리에 관심이 있다면 눈이 번쩍 뜨일 법한 유명 작가들의 단편을 한데 모아 내놓은 작품집 《혈안》. 거기에 『은하영웅전설』로 유명한 다나카 요시키의 단편까지.

 

 실은 2009년 일본 추리·미스터리 임프린트 '카파 노블스' 50주년을 기념해 출간된 단편집 『ANNIVERSARY 50』의 번역작품이다. 일전에 『도박 눈』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출간된 적이 있지만 해당 출판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절판, 이번에 새롭게 번역되어 나왔다. '혈안'이라는 제목으로, 절로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무시무시한 눈알 그림의 표지와 함께.

 

 표제작 '혈안'은 미야베 미유키의 장기 중 하나인 에도시대 괴담 시리즈 한켠에 자리놓인 듯한 작품이다. 이 '혈안'을 읽어보면 표지 그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언뜻 말이 안되는 듯 하지만 은근히 가슴 깊이 파고드는 괴담을 통해 무서운 사람의 마음과 시대적 배경을 절묘하게 스케치해 내는 미야베 미유키의 솜씨가 역시 놀랍다.

 

 '관시리즈'와 '어나더'로 국내팬들에게 유명한 아야츠지 유키토의 '미도로 언덕기담'은 말 그대로 기담奇談이다. 국내에는 발간되지 않았지만 아야츠지 유키토의 '미도로가오카 기담' 단편 시리즈가 있는데, 아마 그 시리즈의 연장선에 놓인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제법 묘한 분위기와 느낌의 기묘한 이야기다.

 

 '점성술 살인사건',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 등 국내에서도 추리 미스터리 하면 손꼽아 주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인 시마다 소지의 단편 '신신당 세계일주-영국 셰필드'는 추리 미스터리물은 아니지만 잔잔한 감동과 여운을 느낄 수 있는 한토막 훈훈한 스토리.

 

 '까마귀의 엄지', '광매화' 등으로 국내외에서 호평받고 있는 젊은 작가 미치오 슈스케. '여름의 빛'은 어린 아이를 주인공으로 한 성장담 속에, 일상의 한 스토리 뒤에 감춰진 작고 은밀한 미스터리를 녹여낸 단편이다. 최근 그가 주력하고 있는 작풍作風을 잘 반영한 전형적인 작품.

 

 '인간의 증명'으로 유명한 모리무라 세이치의 '하늘에서 보내준 고양이'는 앞선 작품들과는 달리 제법 그럴싸한 추리 수사물의 풍모를 지니고 있는데, 그보다도 여러가지 절절한 심정과 묘사들이 제법 마음에 와닿는, 씁쓰레함이 느껴지는 문장들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사건 자체에 있어서는 '지극히' 우연스런 설정이 '지극히' 단편스럽다고 느껴지지만, 그래도 짧은 단편속에 녹아있는 사건의 구조나 분위기는 제법 좋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눈과 금혼식'은 제대로 된 본격 추리물이다. 노부부의 금혼기념일이던 눈 내리는 밤에 일어난 살인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이야기. 깔아놓은 포석에 비해 '결정적인 설정과 단서'가 사알짝 실망스럽기도.

 

 '신주쿠 상어'의 하드보일드 작가 오사와 아리마사. '50층에서 기다려라'는 비록 상당히 가벼운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역시나 그다운 풍취를 살살 흘려주는 오사와 아리마사스러운 단편이다. 반전있는 결말이 어딘가 씁쓸하면서도 무척 익살스럽게 느껴진다.

 

 SF라는 옷을 입고 있지만 실은 대하정치드라마인 '은하영웅전설'. 너무도 유명한 작품의 너무도 유명한 작가 다나카 요시키. 그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오래된 이야기 '오래된 우물'은 고즈넉하면서도 은근히 소름끼치는 설정과 결말이 멋진 단편이다. 표제작 '혈안'과 함께 이 단편집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인데, 마지막 구절이 무척 인상깊다.

 

 "인간의 악의는 밤보다도 어둡고 오래된 우물보다도 훨씬 깊어. 거기서 검은 손이 뻗어 나와 갑자기 사람의 발목을 잡는 거지." (p.417)

 

 깊고 어두운 저 깊은 우물 속에서 은근히 피어오르는 한줄기 의문과, 소름끼치게 다가오는 깊고 고독한 악의가 의외로 큰 임팩트를 남기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얼굴', '제3의 시효' 등 경찰물을 주로 쓰는 작가 요코야마 히데오.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담겨 있어 짙은 여운을 남기는 솜씨가 훌륭한 작가다. '미래의 꽃'은 그의 단편집 '종신검시관'의 주인공이기도 한 구라이시가 등장하는 단편인데, 짧은 문장들이 반복되고 뒤섞이면서 드러나는 진상과 반전이 역시나 요코야마 히데오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괴팍하면서도 일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냉철하고 철두철미한 구라이시의 일면을 보는 재미도 있다.

 

 이 작품집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카파 노블스 50주년을 기념해 내놓은 것인 만큼 각 작품마다 '50'과 관련된 소재들이 하나씩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저것 나름 기발하게 가져다 쓰이고 있는데, 그 '50'을 찾아내며 읽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전체적으로 작가들의 단행본이나 대표작들에 비해서는 조금 깊이가 부족해 보이는 부분들도 있고, 기념단편집이라 그런지 어깨에 힘을 살짝 빼고 가볍게 쓴 티가 나는 자국들로 군데군데 얼룩져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내노라 하는 거장들의 솜씨가 응축·집약·발휘된 단편의 조약돌들이 한데 모이니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거대한 무게를 지닌 바위가 되어 독자의 마음을 행복하게 짓누른다. 당장 다시 읽지는 않을지라도, 세월의 켜 속에 묻어두면 언젠가 다시 다가가 들춰보게 만드는 묘한 마력을 내뿜는 '오래된 우물'같은 작품집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