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이란 무엇인가
야마모토 시치헤이 지음, 고경문 옮김 / 페이퍼로드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일본은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나라이고, 직·간접적으로 제법 많은 영향을 주고 받은 나라지만 막상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라고 질문 받으면 단상적으로 떠오르는 몇몇 부정적인 생각들 이외에는 대답할 거리가 궁하기 마련이다. 일본의 평론가이자 일본연구자인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의 《일본인이란 무엇인가》는 기본적으로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하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단, 물음의 주체와 객체의 위치가 좀 다른데, 외국인들이 일본에 대한 여러가지 궁금증을 물었을 때 일본인들이 그에 대한 명료한 답변을 제대로 내놓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일본에서 태어나고 일본에 사는 일본인들이 일본에 대해 객관적이고 자세하게 파악하고 깨달은 다음, 일본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 좀더 명확하게 답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집필했다고 밝히고 있다. 야마모토 시치헤이의 직접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질문에 답하지 못해 '노래하는 법을 잊어버린 카나리아'와 같은 비참한 심정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따라서 상당히 방대하고 학술적인 색채가 짙은 저술이지만, 기본적으로 외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여러가지 의문과 물음에 대해 저자 자신이 직접 답하기 위해 차곡차곡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저술이기에, 막상 읽어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책장을 넘겨 나아갈 수 있다. 또한, 어떤 현상이나 결과가 나타나게 된 원인과 전후관계 등을 잘 따져 조목조목 설명해 주고 있으므로 생소한 일본의 과거사와 문화들에 대해서도 비교적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작품의 주제와 형태를 떠나, 집필의도가 얼마나 잘 전달되는가, 독자에게 얼마나 친절한 책인가를 놓고 보면 분명 상당히 좋은 점수를 줄 수 있는 저작이라 하겠다.

 

 

 저자가 외국인들에게 받은 질문과 개인적인 경험을 각 장의 서두에 언급해주고, 그에 대해 설명하는 형태로 쓰여져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중구난방식의 구분은 아니고, '다테 지히로(伊達千廣)'가  『다이세이산텐코(大勢三轉考)』에서 나눈 시대구분을 따라 전개해 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고서와 역사 연구에 있어 시대구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만든 메모장인 '다이세이산텐코'에서 다테 지히로는 에도 시대 이전까지를 '씨족시대(骨), 율령시대(職), 바쿠후시대(名)'로 나누었다. 이를 따랐기에 이 책의 각 부 제목이 '제1부 씨족 시대에서 율령 시대로', '제2부 율령 시대에서 바쿠후 시대로', '제3부 바쿠후 시대-서구의 충격', '제4부 다테 지히로의 현대'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총 4부 27장(에필로그까지 합치면 28장), 611페이지로 이루어진 이 책을 마치 대학 전공책 공부하듯 읽으며 노트 서른 두 페이지가 넘게 메모하고 정리했지만, 각 부 각 장을 일일이 열거하고 요약한다는 것은 사실 무의미하고, 전체적인 틀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들을 위주로, 받은 느낌과 함께 아쉬웠던 점들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제1부 씨족 시대에서 율령 시대로'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우선 일본 문화의 근원을 '가나'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인은 스스로 자신의 말을 기록하는 고유의 문자를 만들었고 그 문자를 사용해 책을 썼기 때문에 조직적인 통일국가를 이루었으며, 그때 일본은 나라의 틀을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부주도로 만든 것이 아니므로 창제가 아니라 '가나의 발명'이라 했는데, 당시 최강국이었던 중국의 '한자라는 부적의 주술'에서 일본인을 해방시키고, 소리나는데로 표기했기 때문에 서민계급에게까지 손쉽게 전파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나라의 경우인 우리의 말을 그대로 표기하는 '한글의 창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일본과 마찬가지로 우리 고유의 한글이 없었더라면 막강한 중국의 한자문화에 그대로 매몰되고 말았을 것이란 아찔한 생각이 새삼 들었다.

 

 

 율령제의 도입을 거쳐 불교의 수용에 이르면 불교 전래과정 보다도 관심이 쏠리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겐페이(源平)혼란기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는 '호넨(法然)의 정토종'이 그것이다. 방법과 형식에 구애될 필요없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이름을 반복해서 읊는 것만으로도 극락정토에 구제된다고 믿는 정토종은 훗날 센고쿠시대(戰國時代)에 천재 전도사 '렌뇨(蓮如)'가 등장하면서 가장 수가 많은 농민의 종교가 되어 큰 세력을 이루게 되고, 이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해 많은 센고쿠다이묘(戰國大名)들을 괴롭힌 '잇코잇키(一向一揆)'의 뿌리가 된다는 것이다.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많은 소설과 매체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요소였던지라 새삼 반갑기까지 한 부분이었다. 일본의 불교는 최초에 진호국가(鎭護國家) 종교로 국가가 수용했지만 곧 귀족의 종교가 되어 무사에서 백성에게까지 퍼져나갔고, 불교가 널리 전파되면서 변질되어 일본 특유의 종교가 되었다고 한다.

 

 

 '제6장 민주주의의 기묘한 발생'에서는 일본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기반요소에 대한 근거로 특정불교집단의 다수결(다어비니에 의한 다수결), 신토와 불교를 아울러 믿는 신불혼효신사의 존재, 승려들의 강소(强訴) 등을 들고 있다. 물론 이러한 예들이 하나의 요소로서 작용했을지도 모르지만 특수한 신분, 특수한 집단에 국한된 예시들이고, 결과적으로 특정집단의, 위로부터의 민주주의스런 요소일뿐, 민초(民草)로부터 올라오는 오늘날의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보이기에, 저자의 주장이 조금은 견강부회(牽强附會)적인 발상은 아닌가 싶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제2부 율령 시대에서 바쿠후 시대로'에서는 우선 다테 지히로가 왜 바쿠후 시대를 '니노다이(名の代, 이름의 시대)'라 했는지가 흥미로운데, 그것은 자신의 소유권을 나타내는 이름을 붙인 논이 있는 시대라는 의미라고 한다. 논의 소유권자가 묘슈(名主)이고, 그들을 통합한 사람이 바로 '다이묘(大名)'인 것이다. 제2부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일본만의 독자적인 법이라고 주장하는 '시키모쿠(式目)'과 화폐경제의 시작, 그리고 하극상과 '잇키(一揆)'이다.

 

 

 가마쿠라 바쿠후 시절 가마쿠라와 로쿠하라(교토 근교, 즉 수도 근교에 대한 영향력을 의미)를 통해 전국을 다스릴 수 있는 새로운 법의 제정이 필요했고,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무사나 백성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시키모쿠(式目)'을 제정하고 공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시키모쿠에는 외래 입법전거(典據, 근거가 되는 책·조문)가 없기에 다른 나라와 차별성이 부각되는 일본고유의 법이라는 주장이다. 이 시키모쿠를 바탕으로 영지의 자유상속제, 여성의 권리를 높히 인정했던 풍토, 무사의 능력주의, 연좌제가 없는 개인주의 등 바쿠후 정권 아래서의 일본의 특질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2012년) NHK대하드라마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에서도 한 에피소드로 다루어졌던 '송전(宋錢)의 수입'. 가마쿠라 바쿠후가 들어서기 전 일본최고권력자였던 기요모리는 일본의 풍부한 사금을 주고 중국 화폐를 들여와 유통시켰고, 이 때부터 화폐경제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화폐경제는 상상을 뛰어넘는 기세로 토지에 밀착된 평면적 이차원 경제를 무너뜨렸고, 이는 곧 일족 위주의 소료제(惣領制)가 붕괴되는 원인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일족(가문)의 혈연과는 관계없는 '잇키(一揆)'라는 이해집단으로의 변모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된다. 무능력한 아시카가(足利) 바쿠후 체제에서는 자신의 영지를 안도해줄 정부가 부재했고, 무사들이 스스로 규약을 만들어 단결하고 지켜야만 했는데, 그래서 나타난 것이 잇키라는 것이다. 책의 앞쪽에 나온 모리 모토나리의 연판장 자료 관련, 다케다 가문의 지배형태, 잇코잇키와 같이 특정 종교나 집단의 결성 등 고하를 막론하고 여러 형태의 잇키가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잇키의 리더가 실권을 쥐고, 바쿠후의 지배권은 유명무실해지면서 일본은 '센고쿠시대(戰國時代)'로 돌입하게 된다. 저자는 아시카가 시대에 발생한 자력주의, 평등주의, 집단주의, 능력주의 등이 시대가 바뀌어도 지속되어 일본인의 피와 살이 되었다고 말한다.

 

 

 '제3부 바쿠후 시대-서구의 충격'에서는 우선 '잇코잇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다테 지히로가 말한 '밑바닥에서 들고 일어나 점점 강해져 멈출 줄 모르는 기세'가 점점 확대되어 마침내 농민에게 영향을 미쳐 당시의 사회질서를 밑바닥부터 뒤엎을 기세였고, 혼간지의 정토진종과 결합하여 잇코잇키가 된다. 잇코잇키는 잇코슈(一向宗)와는 다른 종파이고, 사람들의 오해로 불리게 되었지만 어느새 통칭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도쿠가와 바쿠후의 쇄국정책에 관한 부분. 도쿠가와 바쿠후 하면 이에야스의 이미지가 강해서 이에야스가 처음부터 강하게 기독교를 박해하고 쇄국을 밀어부쳤을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고 한다. 도쿠가와 바쿠후가 기독교를 철저히 배척하고 쇄국하게 된 것은 그 유명한 '시마바라(島原)의 난' 이후이다. 시마바라의 난의 원인과 과정, 그 결과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어 상당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제4부 다테 지히로의 현대'는 제목은 이렇지만 사실 도쿠가와 바쿠후 체제 전반, 에도시대의 사상, 생활, 기술 등을 설명하는 장이다.

 

 

 우선 도쿠가와 바쿠후 초대 쇼군인 이에야스가 만들어놓은 체제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파란만장한 삶을 겪고 끝내 일본을 통일하고 쇼군의 자리에 오른 이에야스. 이에야스는 새로운 원리에 기초해 법과 제도를 만들지 않고 모든 법의 근거를 과거 선례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새로운 법은 백성 고통의 근원이다. 과거의 법은 나무의 뿌리이고, 새로운 법은 나무의 가지이다." (p.378)

 

 

 이에야스의 사고방식을 잘 드러내주는 말이다. 향후 300여년, 나아가 그 이후의 일본사회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이에야스의 법과 제도, 그의 사고방식이 무척 흥미롭다.

 

 

 그리고 바쿠한(幕藩)체제 하에서 가신들이 연합해 주군인 번주를 갈아치우는 새로운 형태의 하극상도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이다.

 

 

 마지막 26,27장은 제목이 각기 '현대 일본인의 원형', '현대 일본의 원형'으로 되어 있어 드디어 저자가 직접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제대로 등장하나 싶었는데, 사실 이 두 개의 장은 에도시대 학자와 사상가들의 사상과 연구를 소개하는데 그치고 있어, 과연 이것이 어째서 일본의 원형이 되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설명과 논거가 부재해 상당히 아쉽게 느껴졌다. '합리적 일본인'이라는 색채를 덧칠하기 위해 뭔가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더 본원적이고 근본적인, 앞선 '잇키'와도 같은 류의 설명을 기대했는데 그렇지 못했고, '일본인의 원형, 일본의 원형'과 같은 거창한 제목보다는 '근·현대 일본에 영향을 끼친 사상가들'정도의 제목이 어울리는 장이다. 그렇지만 이 사상가들의 생각과 사고가 대단하고 무척 흥미로워 읽어볼 가치는 충분하다.

 

 

 

 이 저술은 '일본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사실 그 내용은 과거 일본의 역사, 제도, 생활, 발전, 사상 등 메이지유신까지의 일본의 모든 것을 망라해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거기에서 '일본인'과 직결시켜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부분도 있고 딱히 그렇게 말할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어쨌거나 작가가 수많은 자료를 인용하여 집대성하고, 자신만의 이론과 생각을 정리해 더해 내놓은, 잘 만들어진 전공 교과서와도 같은 멋진 작품이다.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고, 때로는 제법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도 마주치게 되지만 말 그대로 차분히 전공서적 공부하듯 읽어나가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느끼고 깨우칠 수 있는 좋은 저작이다.

 

 

 서술 방식에 있어서도 인과관계를 차례로 따져 조곤조곤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에 눈과 머리에 술술 잘 들어온다는 점 역시 훌륭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도쿠가와 시대의 특징을 '쌀의 경제'라고 부르곤 한다. 한마디로 '쌀이 화폐와 연결된 경제'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큰 거래가 이루어진 이유는 거래의 배후에 쌀뿐만 아니라 많은 상품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대개간 시대였다. 개간을 하려면 농기구의 개량이 필요했고 농기구를 만들려면 철이 있어야 했다. 풍부하고 값싼 철이 없었다면 쌀의 경제는 나타날 수 없었다." (p.453)

 

 

 다만 주로 장점 위주의 서술에 국한되었다는 느낌이 들고, 지나치게 긍정적인 견해로만 바라본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외국인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일본인에게 일본을 객관적으로 알려주기 위해 쓴 저술의도를 놓고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기나긴 시간을 거쳐오는 동안 그늘과 어둠도 충분히 많았을테고, 현대 일본의 그림자에 영향을 끼친 인자(因子)들도 많을텐데, 일본인의 시각으로 솔직하게 터놓고 말해주는 일본의 '어둠'을 직접 듣지 못한 것이 살짝 아쉽기도 하다. 마치 응당 나와야 할 코스 요리에 요리 몇가지 빠진듯한 기분.

 

 

 또한, 지도나 그림, 사진자료의 부족도 아쉬운 부분이다. 사건이 일어난 지역의 지도, 설명하는 인물의 초상, 서술하는 부분의 그림이나 사진자료들을 사이사이에 첨부했다면 훨씬 이해도를 높히고, 보다 풍부하고 다채로운 작품이 될 수 있었을텐데. 물론, 조목조목 차분히 설명해주는 서술 그 자체와, (몇가지 오탈자를 제외하면) 무리없이 술술 읽히는 좋은 번역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작품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며칠간 많은 시간을 투자해 푹 빠져 읽어내렸던 이 작품을 덮으며 마지막으로 해보는 생각. 우리나라에도 대중역사서가 많지만 주로 왕조사나 그에 얽힌 야사를 가공한 것들, 유명인의 삶과 공과에 치중하여 집필한 작품들이 주로 인기를 얻고 있는데, 《일본인이란 무엇인가》처럼 역사, 제도, 경제, 생활, 발전, 사상 등을 아우르는, 그러면서도 보다 대중성을 띄고 많은 이에게 널리 읽힐 수 있는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한국인이란 무엇인가?'하는 외국인의 물음에 조목조목 속시원히 답할 수 있는, 한국과 한국인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멋진 대중 전공 교과서가 나오는 그날을 기대해 본다. 이 기대와 바람이 바로 '일본인이란 무엇인가'가 오롯이 가져다 준, 가장 크고 훌륭한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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