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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빛 속삭임 ㅣ 속삭임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현정수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관시리즈'로 유명한 아야츠지 유키토, 그가 스물일곱살에 썼다는 1988년작 <진홍빛 속삭임>. 그의 작품 <어나더>와 비슷한 분위기의 호러미스터리다.
어떤 사정에 의해 기숙사 여고로 전학 온 소녀. 엄격하기 이를데 없는 교칙과 숨막힐듯한 분위기, 기묘한 반 아이들의 소근거림과 눈빛들, 흐릿흐릿 기억날듯 말듯한 소녀의 과거, 그 속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연쇄살인사건.
소녀들의 피(월경)에 대한 원초적 공포, 자라난 환경과 가정상황 등에서 빚어진 트라우마, 그로인해 분출되는 뒤틀린 욕망, 감금(폐쇄적인 기숙사, 특별실, 근신실)과 억압(엄격한 교칙)에 대한 두려움과 반사심리 등 여고생들이 느낄만한 두려움과 공포를 적절히 뒤섞어 그럴싸한 물리적, 심리적 분위기를 잘 만들어내고 있다.
다만, 일부러 공포스런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 쓴 여러가지 서술장치들에 있어서는 특별히 무섭다거나 오싹해졌다기 보다는 왠지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배어났다. 이십대의 젊은 작가가 이렇게 하면 독자들이 무서워할까, 저렇게 하면 오싹해할까 하며 공포분위기를 만들어보고자 낑낑대며 열심히 노력해 써내려간 흔적이 역력히 드러나 보였기 때문에. 어쩌면 개인적으로 지나치게 밝을 때 작품을 읽어나갔기 때문일지도... -.-;;
그리고 원초적이고 인위적인 소녀들의 욕망에 더해 그 나이대 소녀들이 가질법한 시기와 질투, 겉과는 전혀 다르게 저 깊은 속에서 은근히 끌어오르는 한줄기 내밀한 심리를 잘 버무려 놓았더라면 좀 더 좋지 않았을까 하지만, 무대와 배경이 제한적이었기에 어쩔수 없었다 싶고, 약간은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분위기의 작품이라 조금 못미친 부분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후에 문고판으로 다시 내면서 쓴 아야츠지 유키토의 후기에 '얼굴이 붉어지는 부분이 많아서 차라리 다 뜯어 고치고 싶었다'고 술회하고 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들. 범인은 누구일까, 어떻게 된 일일까 궁금해 책장을 신속하게 넘기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나는 범인의 정체와 반전.
관시리즈도 그렇지만 이 작가의 작품에서 복선과 복선회수는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철저하다. 사소한 것 같은, 그냥 흘려버린 문장과 표현 하나하나에도 결말과 반전을 위한 '빵조각'이 숨어 있으니, 모든 것을 다 알고난 뒤에 책장을 팔락거리며 앞부분을 허겁지겁 넘겨보고 '아, 그랬구나.', '이게 그 의미였구나.'하고 느끼는 허탈함과 묘한 쾌감. 아야츠지 유키토의 작품을 찾아 읽게 만드는 주요 원동력 가운데 하나임이 틀림없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속칭 속삭임 시리즈는 <진홍빛 속삭임>, <어둠의 속삭임>, <황혼의 속삭임> 이렇게 세 편으로 알려져 있다. 본격의 분위기를 한껏 만끽할 수 있는 '관시리즈'라는 메인요리에 곁들여 내놓는, 아야츠지 유키토식 호러미스터리를 한번 맛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들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