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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거리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1년 9월
평점 :
히가시노 게이고의 파급력은 상당하다. <용의자X의헌신>으로 일본 추리 미스테리 장르에 입문한 사람도 부지기수 일 것이다. 85년 데뷔한 이래로 수십편의 작품을 발표했지만 아직도 일본 현지에서 신작을 내고 있다. 실로 어마어마한 집필력.
그의 2007년작 <새벽거리에서>. <플래티나 데이터>, <명탐정의 저주>에 이어 올해 국내에 번역, 발간된 히가시노 게이고 세번째 작품이다. '재인'출판사에서 나왔는데 언제나 그렇듯 깔끔한 양장본으로 출간됐다. 깔끔한 높은 가격도 여전하고. 하기야 이름값이 높아진 히가시노 게이고의 계약금과 인세가 어마어마하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불륜을 저지르는 남자는 정말 멍청한 사람이며, 결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굳게 믿던 와타나베. 그랬던 그가 회사에 계약직으로 들어온 아키하와 불륜에 빠지며 달콤하면서도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귀여운 유치원생 딸과 좋은 아내를 두고도 마치 '감미로운 지옥'에 빠져 헤어날 수 없는 불륜의 외줄을 타는 와타나베.
그렇게 불륜 이야기로 초반 100여 페이지가 지날 무렵 '이건 그렇고 그런 불륜 이야기가 아니라 미스테리야!'하고 항변하듯 아키하의 과거와 비밀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아키하가 고등학생이던 무렵 아키하의 집에서 아버지의 여비서 혼조 레이코가 살해된 것. 15년 동안 범인을 잡을 수없어 시효를 맞이할 즈음이었지만 집요하게 사건을 물고 늘어진 형사가 있었던 것이다. 형사는 아키하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수사를 계속하지만 증거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시효를 맞이할 수 밖에 없는데...
전체적인 큰 틀은 두가지다. '와타나베와 아키하의 불륜관계는 어떻게 마무리될까?', '아키하는 정말 15년전 살인사건의 범인일까?' 하는 것. 복선도 있고, 반전도 있고, 마지막 정말 소소한 반전도 있다. 크게 꼬아놓은 부분들은 거의 없으므로 세세히 읽어나가며 상상하다 보면 생각보다는 반전을 눈치채기 쉬울 지도 모르겠다.
'이건 정말 아닌데' 싶은 낼모레 마흔살 남자의 정신 못차리는 불륜행각. 아는지 모르는지 온갖 거짓말과 외박도 별의심없이 넘어가는 와타나베의 부인. 범인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애딸린 중년남자와 사랑에 빠진 아가씨. 마무리가 어찌되었건 그다지 읽기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나라 불륜막장 아침드라마가 생각나기도 하고.
하기야 불륜막장 아침드라마는 주시청층이 주부들이라 돈많고 멋지고 잘생기고 몸좋은 남자가 등장하지만, 이 작품은 그저그런 평범한 아저씨의 중년판타지에 불과하다. 어여쁜 딸과 좋은 아내, 집도 있고 직장도 안정적이고. 더 바랄나위 없이 평온하고 안정적인 이 행복한 생활을 버릴 것인가, 바람은 말 그대로 스쳐가는 바람일 뿐, 결국에는 젊은 여자를 버리고 가정으로 다시 돌아갈 것인가. 결말에서 해답은 나오지만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었다는 점이 참 씁쓸하다. 그리고 반성의 시간없이 뚝 끊어버는 마무리란. 그리고 과연 15년전 살인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그 진실의 그림자 속에도 결국은 불륜이 자리하고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답게 가독성은 정말 최고다. 담백한 문장과 빠른 전개, 그러면서도 놓치지 않는 세세한 심리묘사. 그렇지만 역시나 <용의자X의헌신>이나 <백야행>만큼의 임팩트는 없다. 사실상 추리요소도 조금은 부족한 작품.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이 나오면 또 사서 읽게 될 것이다. 투덜투덜 하면서도 히가시노의 '감미로운 지옥'에 빠져 허우적대는 정신 못차리는 애독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