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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없는 환상곡
오쿠이즈미 히카루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그저 카라얀 컬렉션에 들어있던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A단조를 들었을 때, 단번에 그 서정적이고 애상적이며 몽환적인 선율에 흠뻑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들었던 그의 곡 트로이메라이는 당시보다 나이를 먹고 난 뒤에 그 악상에 크게 감응하여 감동해 마지 않았듯이, 나이가 든 뒤에 듣는 슈만은 하잘 것 없는 인생의 깊이와 삶의 무게가 더해져 그 매력과 참맛이 가슴을 깊이 파고드는 것 같다. 외려 현실을 잊고 머나먼 환상과 이상의 세계로 아득히 침전沈澱하는 부동의 시간인지라 철이 덜 들었다는 반증인 듯도 하다.
<손가락 없는 환상곡>의 원제는 <슈만의 손가락(シュ-マンの指)>이다. 제목부터 그렇지만 이 작품은 슈만을 위해 쓰여진 헌정곡과도 같은 소설이다. 실제로 지난 해 슈만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집필했다고 한다. 따라서 철저히 추리 미스테리 작품으로 믿고 읽는 분들은 조금은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의문과 한 살인사건에 대한 미스테리는 제법 추리소설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고, 읽는 이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가운데 손가락을 잃은 피아노 천재 나가미네 마사토가 어느 날 유럽에서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다는 믿기 힘든 사실이 전해져 온다. 그 소식으로 말미암아 젊은 날 나가미네 마사토와의 추억이 되살아나고, 마사토가 환상곡을 연주했던 그날 밤 학교에서 있었던 여학생 살해사건의 전모가 떠오른다.
슈만을 예찬하고 지극히 애정해 마지 않는 나가미네 마사토와 어린 시절부터 각광받은 마사토를 무한히 동경하는 음악도 나(사토하시 유). 두 사람 사이에서 오고간, 정확히 말하자면 마사토의 입을 빌어 작가가 쓴 슈만에 대한 평과 찬양이 소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미소년 마사토라는 인물은 작가의 슈만에 대한 동경이자 슈만의 현신, 화신 그 자체다. 음악의 우주속에서 보일듯 말듯한 은빛 끈으로 닿은 사랑과 애정, 동경과 질투, 온갖 혼재된 감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사토하시는 슈만을 애끓는 눈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투영일 터.
슈만 애호가나 슈만을 공부한 이가 이 소설을 본다면, 이 소설의 뼈대와 탄생의 원류를 읽어낸다면, 사건의 진상을 보다 쉽게 눈치챌 지도 모르겠다. 결정적인 힌트는 필담으로 오가는 '다비드 동맹' 노트. 그리고 슈만의 생애. 아울러 슈만을 애정하는 이에게는 갖가지 현학적인 수식어로 쓰여진 슈만의 음악에 대한 평과 감상이 반갑고도 기쁠 것이다.
그러나 슈만 애호가가 아니라면, 클래식 애호가가 아닌 이들에게는 어떨까?
나는 들을 때마다 어색함을 느끼면서도 재치 있는 그 표현에서 묻어나는 그가 자란 '문화'의 감촉을, 나의 그것과 너무나 동떨어진 '세계'의 감촉을 느꼈다. -p.86
작중 '나'가 마사토의 이야기를 들으며 느끼는 감상이다. 그러나 이는 곧 일반 독자들이 느낄만한 감상을 너무나도 잘 표현해주는 문장이 아닐까.
슈만광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슈만에 호의를 가지고 슈만을 찾아듣는 쪽에 속하기에 비교적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듣지 않았던 작품을 온갖 수식어로 평하고 써놓은 부분들은 그저 문자 그대로만 남아있을 뿐, 스스로 음악이 되어 그 속에서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나는 연주 안 해. 그야, 연주할 의미가 없잖아. 음악은 이미 여기에 있어." -p.45
'다비드 동맹 무곡집' 악보를 놓고 주장하는 마사토. 혹은 그의 변명.
틀렸다. 천재적 감성으로 마치 완벽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변명은 철저하게 틀렸다. 음악은 연주되고 그것이 타인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비로소 존재가치를 가진다. 공상 속에서 울려퍼지는 연주와 자아에 고립된 음악은 그저 공허일 뿐이고, 그저 소음일 뿐이다.
마사토의 가치관과 연주를 꺼리는 모습들. 이것들도 결국은 반전의 힌트가 된다.
그리고 마사토의 환상곡이 울려퍼지던 그 달밤에 일어난 살인사건. 달빛 속에 자아가 흔들리고 내 존재에 대한 실존마저 의심스러운 그 밤에, 하필 연주된 곡도 환상곡(Fantasy in C major, Op.17)이라니. 살인사건에 대한 전모가 밝혀지고, 마사토가 손가락을 잃은 사연, 손가락을 잃은 마사토가 훗날 어떻게 연주를 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과 해결. 그 모든 것은 마치 '손가락 없이 연주된 환상곡'처럼 몽환적이고, 보일 듯 말 듯 한 정체의 숨바꼭질처럼 아스라히 처리되고 이루어졌다. 그리고 내게 남은 것은 손에 닿을 듯 말듯 쉽게 닿지 않는 음악의 우주에 대한 무한한 동경.
환희와 평안 속에 애수와 우울, 불안의 그늘이 스치는 것은 낭만파 음악의 특징이다. 어둠을 품지 않는 빛은 없으며, 어둠에는 반드시 빛이 있다...(중략)... 슈만의 음악은 뭐라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불온한 의미를 띤 평이한 꿈과 유사했다. -p.55
슈만에 흥미가 없는 분들도, 클래식을 즐기지 않는 분들도 슈만의 환상곡(Fantasy in C major, Op.17)과 피아노 협주곡(Piano Concerto in A minor, Op. 54)은 한 번 들어보시길 권한다. 지극히 서정적이고 애상적인 그 선율에 감화되고 감응하지 않더라도 아, 이런 음악 세계도 있구나, 이런 우주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그 것만으로 로베르트 슈만에 대한 헌사와 위대한 찬양이 될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