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의 저주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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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탐정의 저주>는 <명탐정의 규칙>의 후속작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독특한 형식으로 추리를 위한 추리, 추리소설을 위한 추리소설의 세계를 까발리며 냉소적인 블랙유머를 난사했던 <명탐정의 규칙>. 그러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을 자청하며 그의 수많은 작품을 읽어 온 이래 도중에 책을 덮고 저 멀리 팽개쳐 버린 유일한 작품이 <명탐정의 규칙>이었다. 분명 웃기라고 써놓은 블랙유머들이 실소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형편없는 수준이었고, 누구나 추리소설을 보고 읽으며 느꼈을 법한 부조리를 나름의 상황과 인물 설정을 통해 신랄하게 비판했다지만 말 그대로 누구나 생각했을만한 평범한 이야기와 수준에 그쳤기에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획과 시도는 좋았으나 명색이 추리소설을 수십권 집필한 작가가 써낼만한 글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명탐정의 규칙>을 히가시노 게이고 최고의 소설 중 하나로 꼽는 분들도 많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망작대열에 올려놓는 분들도 상당하다. 그만큼 호오가 갈리는 작품.

 그런만큼 <명탐정의 저주>를 구입하는데 까지는 제법 오랜 망설임과 크나큰 용기가 필요했다. 다작의 작가이니만큼 성공작 만큼이나 범작, 망작도 많아 실망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래도 일본 추리물의 세계로 이끈 히가시노 게이고 그 이름 하나만으로 아직까지는 그의 신작을 기다리고 주저없이 구입해 읽는 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명탐정의 저주>는 <명탐정의 규칙>보다는 훨씬 좋았다. 작중화자로 등장하는 추리소설가는 분명 히가시노 본인의 투영일터. 그 소설가가 빨려 들어가는 미지의 세계. 강한 기시감이 존재하고, 익숙한 이름 덴카이치 탐정 역할을 하게 된 그 세계. 어김없이 살인은 일어나고, 밀실이니 인간 소실이니 하는 익숙한 형태가 등장하는 그 세계! 읽어가다 보면 역사와 전통이라는 것이 없다는 그 세계에서 결여된 것, 그 세계의 존재이유, 등장인물 개개인의 존재이유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강한 기시감의 정체 또한... <명탐정의 저주>에서 일어난 살인사건들에 쓰인 트릭들은 기발하다면 기발하고 평범하다면 평범할 수 있다. 물론 그 사건과 트릭 해결 자체가 본질은 아니기에 큰 공을 들이지는 않은 것 같지만.

 결국 작중화자인 추리소설가가 히가시노 본인의 투영이었던 만큼, <명탐정의 저주>는 본격물에 대한 비난과 비판, 회의였던 동시에 히가시노 게이고 자신의 자기성찰 내지는 투덜거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띠지에 적힌 광고문구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라고 조금은 뻔뻔하게 쓰여있으나 말미에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1996년작이니 데뷔 후 10년정도 지난 시절의 작품으로, 뭐 그렇게 큰 회의감과 자괴감이 들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데뷔(1985년)부터 96년까지 히가시노 게이고가 써낸 작품이 무려 35권(단행본 기준)이나 되니,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후 발표된 작품들을 쭉 둘러보면 <명탐정의 규칙>과 <명탐정의 저주>에서 그렇게 신랄하게 비난했던 그 세계에 발을 다시 담궜는지 아닌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다만 <백야행>, <환야>, <편지>, <방황하는 칼날>, <용의자 X의 헌신>, <유성의 인연> 등 그의 대표작들이 모두 96년 이후의 작품들이라는 데서 이후 그가 지향했던 바를 명백하게 느낄수 있다.

 마지막으로 작중화자인 추리소설가가 에필로그에 차기작으로 교통경찰에 대한 소설을 쓰기 위해자료를 조사하고 있다고 한 부분이 나온다. 처음에는 이 작품의 현지 출간년도를 신경쓰지 않고 봐서 당연히 그 작품이 <교통경찰의 밤>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교통경찰의 밤>은 1991년작이었다. 그렇다면 교통경찰을 주제로한, 혹은 교통경찰이 등장한 차기작은 과연 어느 작품이었단 말인가? 준비하다가 엎어 버렸을까? 아니면... 소설은 소설일 뿐, 그런거 준비한 적도 없어~ 라고 하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독자를 향해 날린 마지막 필살기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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